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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주를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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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주를 다시 한번

[뷰포인트] <스타트렉> 시리즈의 희망찬 재시동에 부치는 80년대생의 소고

1980년에 몽상가 존 레넌이 죽었다. 나는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그도 히피들도 죽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심지어 환상 속의 정의로운 히어로들도 죽고 없어서, 앨런 무어나 프랭크 밀러가 <왓치멘>이니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니 하는 따위의 안티 히어로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던 때도 80년대였다. 대중문화에서 보이는 지표들은 인류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 80년이 지나가고 90년대가 오자 본격적으로 세기말이라는 실체가 다가왔다. 결국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또한 무엇도 부활하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진짜 실현시킬 수 있었던 시대는, 혹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지나 있었다.

▲ 스타워즈

그러니까 내가 태어났을 때,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의 전설도 끝나 있었던 것이다. 80년대의 SF영화는 더 이상 낙관적인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나 <브라질>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디스토피아적인 SF였다. 조금 내 머리가 굵어질 무렵인 9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이번엔 일본에서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광풍이 몰아쳤다. 거의 모든 SF에서 세계는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고, 개인은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결국 자기 안으로 침잠한 끝에 파멸했다. 그 우주는 <이티>나 <미지와의 조우>의 우주처럼 외계인과 교감할 수 있는 우주가 아니라, <매트릭스>처럼 분열되고 파편화된 우주였다. 스타워즈 기크들이나 트레키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함께 열광하고 공유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오직 혼자만이 곱씹고 절망할 수 있는 세계였다. <블레이드 러너>의 팬들은 결코 <스타워즈>의 팬들과 같을 수 없었다. 90년대부터 새로 시작된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의 새 시리즈는 이런 두 시대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대중들이 즐겼던 이야기가 한 소년이 우주를 구하는 이야기였다면, 90년대와 2000년대의 청소년들은 한 남자가 우주를 말아먹고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이야기를 보면서 눈물을 뿌려야 했던 것이다. 단순히 순서가 뒤바뀐 이야기일 뿐이라고 해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 블레이드 러너
다행스럽게도, 나를 비롯한 80년대 아이들은 한 철 지난 서구의 컨텐츠를 소비하면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 자체가 서구의 그것보다 좀 더 느린 시간축에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랬던 만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별다른 준비도 없이 갑자기 나의 희망찬 우주를 빼앗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인류는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류의 테마를 다룬 컨텐츠는 너무 '촌스러운' 물건이 되었고, 약간은 삐딱하고 냉정한 태도로 암울한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래를 바라보며 다가올 재난에 대비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쿨한 태도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것이 촌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소년이 우주를 구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연민하면서도 결국은 루크 스카이워커의 이야기에 더 열광하는 나는,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사랑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으리란 것을 믿고 싶었다. 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가장 전형적인 이야기를 만들곤 하는 할리웃 블록버스터 SF를 뒤져봐도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시리즈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혹은 앤드류 니콜의 <가타카>와 같이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뭔가 인류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려 한 듯한 새로운 SF가 간간히 출현하긴 했지만, 그것들은 이미 화려한 신화의 시대에 종지부가 찍힌 상황에서 온갖 악덕이 튀어나온 뒤 미미한 희망이 남아있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지친 환상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비슷한 게 있다고 해도 대다수가 60 ~ 80년대 초반의 유산들을 다시 끌어와 재생시킨 것이다. <트랜스포머>, <스피드 레이서>, <인디애나 존스>...

이런 상황에서 <스타 트렉>이 갑자기 리뉴얼되어 극장판으로 돌아온 것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올드 팬도 올드 팬이지만, 한창 별을 보며 꿈꿀 나이에 인류가 끝장나는 이야기만 보고 클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컨텐츠를 온전히 창조할 만한 긍정의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잔해들을 그러모아 다시 불을 붙이고, 미약한 희망을 미래로 전승한다.

▲ 스타트렉 : 더 비기닝

이것이 꼭 게으르고 무의미한 답습이라고만은 단정지을 수 없다. 이 작업들의 결과물 중에는 맥이 빠지는 것도 있긴 하지만, 꽤 마음에 드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 시리즈에 그렇게 추억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충실히 방영된 시리즈도 아니었고, 내 세대가 즐기기에는 너무 올드하고 미국적인 감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잘 생긴 윌리엄 섀트너가 우주를 돌아다니며 연애질을 하고 다녔던 것 같은 다분히 왜곡된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얼마 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난 이 영화는 내가 막연히 향수를 가지고 있던 그리운 우주를 너무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순진한 의도성을 가지고 영화 속에 배치된 다양한 종족과 인종의 분포는 물론이고, 철없는 젊은이들의 넘치는 가능성과 더 나아가 인류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 우주로 파급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야말로 '촌스러운' 감동을 받고 말았다. 심지어 마지막에 엔터프라이즈가 출항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나레이션을 듣자 급기야는 가슴이 설레면서 멋모르고 우주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파이오니어호의 메시지를 받은 외계인이 언제쯤 우리에게 리액션을 취해 올까 두근두근거리던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부활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즐거움을 계속 느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촌스럽고 유치해 보인들 무슨 상관이랴. 게다가 이 영화는 오리지널과의 연계성 면에서도 매우 희망찬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나를 감동시켰다. 아아, 우리는 이렇게 다시 하나의 리셋된 우주를 갖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는 다시 한 번 엔터프라이즈의 선장이 될 수 있었다. 부족한 과거로부터의 유산을 껴안고도 우리는 다시 시작해서 과거 낙관적인 시대가 달성했던 것을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J.J. 에이브럼스. 나는 이제 몇 개의 우주를 돌려받고 싶다. 나와, 내 세대들과, 내 이후의 세대들을 위해서. 마음껏 꿈을 꿀 수 있었고,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던 그 우주를,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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