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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위대한 혁명가를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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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위대한 혁명가를 죽였는가

[공연리뷰] 연극 <마라, 사드> 리뷰

▲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여기 한 편의 그림이 있다. 아직 채 완성하지 못한 원고와 펜을 손에 든 채 피로 가득 찬 욕조에 몸을 기울이고 있는 한 혁명가가 있다. 19세기 고전주의 회화의 창시자인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작품, <마라의 죽음>이다. 1793년 7월 13일, 피부병 때문에 자주 목욕을 하던 마라가 자기 집 욕실에서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처녀에게 살해당한 유명한 사건을 이 자리에서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혁명가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화가는 무방비의 폭력에 노출된 예상치 못한 죽음을 건조하고 덤덤하게 묘사한다. 샤를로트가 마라의 가슴에 칼을 꽂는 순간을 보여준다거나 주변 사람들이 마라의 시체를 발견하는 순간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상상해 보자. 살인 충동이 가득한 샤를로트의 눈동자, 경악하는 마라의 표정, 혹은 시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하녀. 훨씬 더 강렬하고, 고발적인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순간을 피하고 대신 피로과 고뇌로 인해 잠든 듯이 마라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그림의 핵심은 혁명가가 살해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혁명가의 죽음을 화가가 어떻게 보여주고 싶어하는가에 있다.

페터 바이스의 <마라, 사드>가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막을 올렸다. 첫 공연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이 치뤄진 29일 금요일이었다. 빨개진 눈으로 공연장을 들어선 내게 이 연극은 굉장히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슬퍼하라, 그러나 냉철하라. 이토록 뜨겁게 외치면서 차갑게 만류하는 연극이 관객을 만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죽음이 가진 파급력과 영향력에 동의한다면 이 연극을 통해 문제 의식을 예각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의 핵심 역시 다비드의 그림과 마찬가지이다. 한 혁명가가 살해당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의 죽음을 예술가가 어떻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가에 있다. 그 예술가는 사드일 수도 있으며, 작가일 수도 있고, 연출가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 모두인지도 모른다.

▲ 마라, 사드
<마라, 사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행동가가 등장한다. 장 폴 마라와 사드 후작이다. 급진적 혁명파의 지도자였던 마라와 육체와 욕망에 집요할 만큼 천착해 '사디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던 냈던 사드.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기를 각기 다른 신념으로 살았던 두 사람을 동시에 무대 위에서 마주치게 한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을까.

페터 바이스는 서사극의 기법을 차용하여 극중극 형식으로 작품을 풀어낸다. 작품의 배경은 샤랑통 정신 병원으로 이곳에 요양을 위해 머물러 있는 사드 후작의 지도 하에 '장 폴 마라의 최후의 시간'에 대한 연극이 선 보인다. 사드 후작이 쓴 희곡을 정신병자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다. 관객은 샤랑통 병원의 원장 쿨미에와 그의 부인과 딸이다. 현대 관객은 연극이 진행되는 무대이자, 관람석을 동시에 보게 된다. 극에는 세 가지 층위의 시간이 존재하게 된다. 연극 속의 현재인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즉위한 지 4년 뒤인 1808년과 마라가 샤를로트에 의해 암살된 극중극의 시간인 1793년, 그리고 극이 공연되는 현재(2009년)이다. 복잡해 보이는 구조이지만 연극을 보게 되면 이 층위들이 매우 조화롭고, 안정적으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극작가의 뛰어난 역량 때문이기도 하고, 연출과 배우가 그 구성을 튼튼하게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누가 위대한 혁명가를 죽였는가. 역사적 사실로서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처녀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이 유효한 것은 한 사람의 행동은 결코 그 개인의 독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샤를로트 코르데는 한 명의 처녀가 아니라 열렬한 지롱드당의 숭배자였으며, 그의 지인들은 마라의 선동에 의해 단두대에 오르거나 감옥에 갔다. 즉, 샤를로트 코르데의 행위는 그녀가 속해있는 집단의 행위로 읽어야 한다. 행위는 신념에서 나온다. 그 신념이 옳건 그르건 간에 신념이 없다면 행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누가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위대한 혁명가를 죽였는가.

등장인물의 질문을 나의 문제로 현재화하기

이 작품에는 굉장히 다양한 정치적 관점이 녹아있다. 민중을 폭압하고, 기만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폭력을 이야기하는 마라와 그런 마라의 행보를 위험하다고 간주하며 마라를 제거하려는 샤를로트, 섹스를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는 사드. 그리고, 동요하는 군중들까지. 원장인 쿨미에는 극중극의 소란은 과거의 일일 뿐이며 나폴레옹 황제의 제정이 들어서서 사회가 안정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각 인물들의 사유를 따라가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며, 현재의 우리 자신을 반추하게 하는 힘이 있다.

작품은 특정한 한 사람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주된 사건은 급진적인 혁명가 마라의 죽음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 역시 만만치 않은 무게를 갖고 제시된다. 다양한 세계관이 꼼꼼하게 쳐진 거미줄마냥 방사형으로 뻗쳐있다. 극중 해설자는 끊임없이 현재의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사건은 현재 우리의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의미화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마음에 간직하고 연극을 본다면 혼란한 시국을 살고 있는 우리 각자의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 마라, 사드
가령, 샤를로트는 마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은 평등해져야한다는 위대한 루소에서 출발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일치하지 못한 이유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각자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에요." 마라는 왕족과 귀족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었던 같은 세계관을 가졌던 자의 손에 의해 제거된다. 마라의 죽음은 보는 관객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한민국의 현실과 연결될 것이다. 누군가는 수구 보수 세력에 의해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이전 정권의 지도자를 떠올릴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진보 세력에 힘 입어 정권을 잡았으나 FTA와 이라크 파병 등으로 진보 세력에 칼을 들이댔던 사건들을 기억해 낼 것이다. '마라'는 특정한 기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진보적이었던 세력을 보다 온건한 세력이 밀어낼 수 밖에 없었던 권력의 역학을 보여준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을 마라와 샤를로트에 대입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스스로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예각화되어 떠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관객에게 역사적 주체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할 것을 요구하는 드문 작품이기도 하다.

제3의 시선으로 제시되는 인물은 사드 후작이다. 일생의 1/3을 정신병원과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위험한 회의주의자이자 시대를 관조했던 냉철한 지식인 사드는 "인간이 사랑을 자유롭게 나눌 수 없다면 이 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반문한다. 사드의 질문은 작품 전체를 뒤흔들 만큼 강력하고, 날카롭다. 개인적으로 막연하게 품고 있었던 의문을 구체화해주는 말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독재와 그에 맞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세력의 기나긴 투쟁이다. 권력을 동원하여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세력들은 서로 반대의 방향에 있지만 동시에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의 내면에 깔려있는 '금욕' 혹은 '욕망의 억압'이다.

독재정권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욕망을 억누른다면 민주화 운동 역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욕망을 억누르게 된다. 기형도는 푸른 나무 그늘을 지나는 학생들은 그 아름다움을 차마 응시할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고 노래한다. 고통받는 민중이 있는데 미를 향유하려는 마음이 죄스러웠던 까닭이다. 공지영은 대학 시절 테니스를 배우고,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 스스로의 욕망이 한없이 속물스럽게 보였다고 고백한다. 한쪽에서 '국가'의 이름을 걸고 국민의 욕망을 억누를 때, 다른 한쪽에서는 '민중'의 이름을 걸고 개인의 욕망이 억눌러진다. 사드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이 '박정희'라는 키워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기존 지식인들이 당혹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신세대들은 이전 세대의 담론에서 오롯이 '어떤 욕망을 포기할 것인가'를 읽었던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개인의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면 어떤 욕망을 버릴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욕망과 억압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징후들의 나열이기도 하다. 최근 개봉한 <박쥐>와 <마더>의 정신분석학적 코드들을 보자. 대한민국 사회를 분석하고, 묘사하려는 예술가의 시도가 최종적으로 귀결되게 되는 부분이 어디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드는 극중의 그 누구보다도 위험하고, 매력적인 혁명가이다. 18세기를 살았던 사드의 외침이 바로 이렇게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로 전환된다.

연극 보기의 즐거움

복잡한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에 지루하고, 하품이 날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오산이다. 이 연극은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평단과 대중 양쪽 모두에게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박근형 연출은 긴장과 유머,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재미가 없다면 연극은 꽝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연극 <마라, 사드>는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정신병원에서 일어나는 소란극 아닌가. 엄숙한 표정을 한 채 책상머리에 앉아서 철학을 논하는 살롱의 이야기가 아니다. 춤과 음악, 광기가 혼재되어 있는 매혹적인 카니발이다. 놀라울 만큼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는 페터 바이스의 희곡과 관객의 긴장을 한순간도 떨어뜨리지 않는 박근형의 연출력, 40여 명의 배우들의 연기와 호흡, 이 삼박자가 잘 맞아진 작품이다. 특히 배우가 특정한 착란 증세들을 가진 '정신병자'와 극중극 내의 '역사적 인물'을 동시에 연기하는 층위를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번 서울시극단의 <마라, 사드>는 원작의 음악 대신 박천휘 작곡의 새 음악을 도입한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이자 프랑스 혁명기의 민중들의 합창이 극 중간중간 삽입된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또 색다른 느낌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정극 형식에 대해 부담을 크게 느끼는 관객들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연극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 본다. 덧붙여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들을 위해 <마라, 사드> 공연과 함께 <특강 시리즈>가 개최된다. <프랑스 혁명이 공연 예술에 미친 영향>, <페터 바이스의 유산>, <현대 독일 연극과 유럽연극> <통일 이후의 독일의 공연예술> 등에 관해 해당 분야 전문가 및 교수가 알기 쉽게 설명해줌으로써 공연과 연극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작품의 의미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일정은 다음과 같다.

6월 3일(수) 17:00-18:30 <마라/사드>에 나타난 연극론들(Dramaturgien), 최병준 교수
6월 4일(목) 17:00-18:30 <마라 사드>의 현대성과 시의성, 김미혜 교수
6월 5일(금) 17:00-18:30 <마라 사드>에 담겨 있는 아르또와 브레히트의 연극미학, 이재진 교수
6월 10일(수) 17:00-18:30 찬란한 통일과 연극지형도의 변화, 백은아 교수(연출가)
6월 11일(목) 17:00-18:30 저항의 연극, 연극의 저항- 페터 바이스의 총체극, 서지영 박사
6월 12일(금) 17:00-18:30 프랑스 혁명이 예술에 미친 영향, 노성두 박사 (미술사가)

◎ 공연개요

공 연 명 : 마라, 사드 (Marat, Sade)
일 시 : 2009년 5월 29일(금) ~ 6월 14일(일)
평일 8시/ 토요일 3시, 7시/ 일 3시/ 월 쉼
장 소 : 세종 M씨어터
가 격 : S석 30,000원/ A석 20,000원
예 매 : 1544-1887(인터파크)
문 의 : 02-3272-2334

작: 페터 바이스(Peter Weiss)
연출: 박근형
작곡: 박천휘

- CAST -

마라: 김주완
사드: 강신구
쿨미에: 이창직
코르데: 강지은
자크 루: 주성환
해설자: 김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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