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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애물단지 같은 불편한 가족, <걸어도 걸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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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애물단지 같은 불편한 가족, <걸어도 걸어도>

[뷰포인트] 쓰린 매 걸음걸음에 서려있는 가족의 불행과 숙명을 들여다보다

이 영화는 부엌에서 딸과 어머니가 요리를 하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곧 이 가정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외손자들과 사위가 등장하고, 둘째 아들이 아내와 의붓아들을 데리고 집에 도착한다. 이렇게 가족의 전체적인 윤곽이 극 초반에 서서히 형체를 이루어 가듯이 이들이 끊임없이 주고받는 사소한 대화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실마리들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분명해지면서 가족의 비극적인 과거를 드러난다. 이 집의 전도 유망한 장남이 15년 전 바닷가에서 한 소년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가족들은 이 장남의 기일을 맞아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 걸어도 걸어도

걸어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함이 있다. 그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의 숙명이다. 의사가 될 거라고 기대했던 총명한 아들은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남은 아들은 집을 나가서 신통찮은 일이나 하면서 애 딸린 과부와 결혼하고, 딸 역시 별 볼일 없는 사위를 맞은 것도 모자라 호시탐탐 부모의 집에 얹혀 살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것이 노부부 인생의 긴 걸음의 끝에 남은 것이다. 차남인 료타의 입장에서도 가족과 걸어가는 길은 고되다. 형이 죽은 뒤 자기에게 쏠리는 부담 때문에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다른 일을 택했지만 인생은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늦게나마 친손자를 보고 싶고 아들의 차도 한 번쯤 타 보고 싶은 바람을 슬쩍 이야기하고, 아버지는 언제 같이 축구 경기를 보러 가자고 말하지만 결국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모의 묘를 참배하러 온 료타에게는 이전에는 없었던 어린 딸과 자동차가 있다. 이렇게 가족들은 계속 엇박자로 걸으며 이나마도 조금씩 늦는다. 료타 부부가 부모의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 부부를 다음 설에 다시 볼 것을 기대하지만 정작 버스 안의 료타와 유카리는 설에는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식의 서로에 대한 작은 배신의 순간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걸음은 멈출 수 없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주로 좁은 실내에서의 움직임과 대화에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이따금 등장하는 야외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노는 부분을 제외하면 언제나 가족들은 느릿느릿 걸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하늘이나 산, 바다와 같은 아득한 원경을 잡는다. 그들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거나, 어머니를 모시고 죽은 형의 묘에 가거나, 아버지와 함께 바닷가에 간다. 사실 그 걸음의 끝은 집도, 바닷가도, 묘지도 아니다. 그 모든 엇갈림과 갈등을 원죄처럼 지고도 가족은 억지로 발을 맞추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걸음을 옮긴다.
▲ 기키 기린은 겉으론 밝게 보이지만 사실은 회한을 간직한 어머니를 훌륭하게 연기한다 ⓒ프레시안

이 영화의 제목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엔카 곡인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의 가사 중 한 소절이다. 료타의 어머니가 이 노래를 이용해 남편의 비밀을 알고 있음을 남편에게 폭로하는 에피소드는 짤막하고 무심하게 지나가 버리지만 이 영화 속의 가족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료타의 아버지가 준 상처를 계속 기억하고 있다가 터뜨리는 어머니처럼 과거의 기억들은 서로를 모른 척 하고 긴 시간 묻혀 있다가 지뢰처럼 일상 속 말과 움직임의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지난한 걸음의 과정에서 가족의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가해자로, 공범자로, 피해자로 묶이고 해제되기를 반복한다. 아버지는 첫 며느리 이야기를 하다가 애 딸린 과부는 결혼하기 힘들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둘째 며느리를 마뜩찮아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료타의 어머니는 이런 남편의 태도를 책망하지만 사실 료타 부부가 도착하기 전에 딸 지나미와의 대화 속에서 이미 둘째 며느리를 '중고품'이라고 칭하며 불만을 드러낸 전적이 있다. 료타의 아버지가 첫째 아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구하고 죽은 청년이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분개할 때 료타는 그런 아버지의 말에 반박하지만 가족들은 모두 은연중에 그런 유감을 공유하고 있다. 료타의 어머니 역시 '복수'하기 위해 그 청년을 매년 부른다고 료타에게 고백함으로써 가족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서의 의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극의 초반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연연하고 있는 집안의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다가 어머니가 홀린 듯이 노란 나비를 쫓으며 아들의 혼이라고 부르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구상했다는 이 영화가 결코 가족과 어머니에 대한 낭만적인 추억만을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은 그것이 번거롭고 아프다고 해서 삶의 저편에 마냥 치워둘 수 없는 굴레이고 족쇄이다. 이런 가족의 어머니 역시 기키 기린이 어머니로 등장하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에서처럼 판타지적일 정도의 헌신과 희생의 미덕을 갖춘 자상한 어머니는 아니다. 이 어머니는 한없이 불완전하고 때로는 이기적이며, 삶의 걸음 걸음에 자리했던 슬픔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으로써 이 어머니와 가족은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진실성을 획득한다.

오즈 야스지로가 대사와 대사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정지된 여백에서 이야기를 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속의 가족들은 말과 행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어필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요란스런 존재들이다. 감독은 나레이션처럼 '오버'스러울 수 있는 요소들의 사용에도 별로 거리낌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는 것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해진 무수한 것들 속에서 진정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다른 트렌디한 일본 영화를 볼 때 인물들의 성격과 상황에서 간혹 느껴지는 가공의 느낌이나 소위 말하는 '일본적인' 이질감을 거의 주지 않는다. 전작들의 실험을 거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른 이 길은 앞으로 그가 만들어갈 영화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한 작품만으로도 그 성취는 이미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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