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클립스>의 리나와 마이클. 둘은 모두 유령을 보는 자들, 즉 '죽음에 홀린' 자들이다. |
나오는 사람들과 분위기로 봐서는 황혼의 로맨스가 펼쳐지는 잔잔한 드라마일 것만 같은 이 영화는 예상치 못한 깜짝쇼를 영화의 중간중간에 배치해 놓고 있다. 마이클의 장인이 유령으로 등장하는 몇몇 장면은 웬만한 호러 영화 뺨칠 정도로 임팩트가 크다. 장인의 유령은 마이클 앞에 나타날 때마다 그를 자기 쪽으로 끌어가려고 하거나 위험으로 몰아넣는다. 책 낭독회에서 자신의 책 '이클립스'의 한 대목을 읽는 것으로 보건대, 리나 역시 유령에 대한 책을 쓰는 작가이다. 리나는 마이클에게 자신이 열한살 때 유령을 실제로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마이클과 리나는 모두, 유령에게 '홀린'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 장르는 사실 호러였단 말인가? 호러영화 공식에 충실한 장면들이 몇 개 있긴 하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인 기조를 흔들 정도는 아니다. <이클립스>는 유령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영화이다. 마이클이 장인의 유령을 보게 되는 것은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며, 또한 장인 어른의 죽음이 가까워오는 시점에서이다. 마이클의 장인은 마이클에게 요양원에서 사는 것의 외로움과 딸을 잃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혼이 죽은 상태와 근접해 있는 장인의 유령은 마이클에게 엄습해오는 죽음의 그림자이고, 마이클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실감과 공포의 현신이다. 리나 또한 죽음과 가까이 닿아 있는 사람이다. 리나는 긴 세월 동안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왔으며, 동료 작가인 니콜라스와 하룻밤 불륜을 저지른 뒤 니콜라스가 열정적으로 구애해 오자 두려움 때문에 무작정 관계 맺기를 거부하면서도 명확히 그 관계를 끊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자신감 없는 모습이나 유령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글을 쓰는 것 역시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리나의 적극적인 삶에의 막연한 두려움은 그녀가 어렸을 때 처음 유령을 본 뒤, 즉 처음 죽음을 자각한 뒤부터 그녀가 계속 죽음의 감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 <이클립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루는 호러영화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영화다. |
'나를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 레퀴엠 성가들이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 와중에 묘지나 성당, 병원처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를 거니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빛을 등진 채 자꾸 검은 그림자로만 남는다. 거칠게 파도치는 짙푸르고 위험한 바다와 안전한 육지가 이루는 경계에 가까운 곳을 배경으로 주로 삼은 야외 장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새벽과 초저녁의 아스라한 빛 속에 남겨지는 그들의 자국은 검은 색이다. 식(蝕)을 의미하는 영화의 제목은 이렇게 맞아떨어진다. 태양이 생의 빛이라면 태양을 가리는 달의 그림자는 죽음의 어둠이다. 이 양면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연에게도, 그리고 인간에게도.
유령의 깜짝쇼가 일으키는 갑작스런 분위기의 반전은 관객에게도 죽음에의 공포를 일깨운다. 죽음은 예고하지 않는다. 마치 유령처럼. 마이클의 장인의 자살은 별다른 설명 없이, 침대에 누운 노인과 피바다가 된 방바닥을 비추는 정지된 하이 앵글 속에서 무심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그 짧은 장면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충격적이다. 이 공포, 죽음이라는 이름의 이 유령에게서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 답은 '도망칠 수 없다'이다. 마이클이 마지막으로 유령이 나오는 악몽을 꾼 뒤 마이클의 고통은 해소된다. 그것은 죽은 아내의 얼굴을 한 죽음과 포옹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연인의 조각상처럼 두 개의 등을 가진 한 덩어리. 쫓고 쫓기는 관계가 아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가슴을 맞댄 생과 사의 결합은 마이클을 악몽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 갇혀 있던 마이클의 일상은 비로소 삶의 모습을 갖게 된다. 죽음과 화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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