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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죽 같은 사람,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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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죽 같은 사람, 김근태

[기고] 그의 죽음, 그리고 이별과 회상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큰 별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11년 12월 30일 새벽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 평생을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정치개혁에 앞장섰던 그의 죽음 앞에서 민주화운동 동지들, 정계 인사와 수많은 시민들이 비통해하며 애도를 표했었다. 특히 그의 죽음이 민주화운동 시절 그 악명 높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과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여 더욱 안타까웠던 것이다.

인류의 영원한 테제, 삶과 죽음

죽음이란 무엇인가?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서 죽음을 논하지만, 과학적 지식과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대개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를 죽음으로 정의하지만, 죽음의 세계는 인간의 경험과 지각을 넘어서는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완전히 파악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은커녕 삶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삶이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고서도 죽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전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공자님은 제자 자로(子路)가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자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 했다. 곧 삶을 알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는 스승의 타이름이면서, 동시에 죽음과 그 이후의 내세보다는 현세의 문제를 더 중시하는, 현세의 연장이 곧 내세라는 공자님의 철학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은 죽음에 대해 "나[生]는 것은 죽음의 시작이요, 성(盛)한 것은 쇠하는 것의 발단이다. 영화스러운 것은 욕되는 일의 조짐이요, 얻는 것은 잃는 것의 원인이다. 그런 때문에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성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영화스러우면 반드시 욕됨이 있고, 얻으면 잃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정당한 이치로서, 어리석거나 지혜가 있거나 간에 아무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어두운 사람은 매양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성(盛)한 데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를 그칠 줄 알지 못하고, 영화를 탐내어 피할 줄 알지 못하고, 얻는 것만 힘쓰고 경계할 줄 모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며, 죽음에 고뇌하기보다는 현세의 올바른 삶을 강조한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의식, 장례와 제례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죽음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일찍부터 인간의 관심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각종 종교와 민간신앙의 내세관으로 관념화되고, 그 극복의 기제로서 장례와 제례의 탄생과 발전으로 실체화했다.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탄생이 축복인 것처럼 죽음도 축복 속에서 다음의 세계로 떠나보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장례의식을 행하는 동물'이라 하였고, 볼테르는 "인간은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종(種)으로서, 그들은 경험을 통하여 죽음을 인식한다"고 말했다.

장례와 제례의식은 각자의 종교적 계율과 믿음에 따라 하늘에서의 영원한 삶을 구하거나, 땅에서의 더 나은 윤회적 삶을 비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면, 장례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삶의 관계를 정리하는 '이별의 의식'이고, 제례는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기억을 이어가는 '회상의 의식'이다. 곧 이승의 산 자와 저승의 죽은 자를 잇는 그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하여 장례와 제례의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음복(飮福)은 제례를 끝낸 후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해 제상에 올라왔던 제주와 제수를 나누어 먹는 절차이다.『설문해자』는 복(福)자에 '제사 때 바치는 술과 음식'이란 뜻도 있다고 풀이한다. 곧 산 자와 죽은 자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늘과 땅, 조상과 후손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뜻이 변전하여 요즘에는 음복을 해야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골고루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장례와 제례가 축복의 의식인 만큼 어느 면 틀린 해석도 아니리라.

김근태의 죽음

김근태 고문이 위독하다는 사발통문이 돌자 12월 29일 밤, 그의 평생의 민주화 동지들이 서울대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그의 짧은 생명의 끈이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국 그는 가버렸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인의 오랜 민주화운동 동지 이창복 선생을 호상으로 모시고, 장영달 · 박선숙을 공동 장례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실무진을 꾸리고, 유은혜를 대변인으로 하여 밀려드는 보도진을 상대하게 했다. 호상은 유족을 대신하여 장례 전반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여러 논의 끝에 장례식 이름을 '민주주의자 김근태 민주사회장'으로 결정하였다.

ⓒ김근태재단

TV에 자막으로 고인의 별세 소식이 보도되고, 연이어 인터넷에 이 뉴스가 오르자 많은 이들이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조문을 왔다. 첫날에는 과거 민주화운동 동지들이나 친지들이 많았지만, 둘째 날부터는 일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고인과 대척점에 섰던 박정희의 딸도 조문을 왔다. 유족들이 밀려드는 조문객을 긴 시간 맞이하기가 힘들어 이해찬 전 총리 등 민주화운동, 정계 동료들이 상주를 대신했다. 고인이 피 흘려 이룩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린 이명박도 조화를 보내 와 설왕설래하였으나, 인간 이명박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직이 보낸 것이라고 정리, 그냥 수용했다.

12월 31일 오전, 김 고문의 시신을 입관하였다. 유교적 관습으로는 입관 전에는 조문을 받지 않는다. 비록 육신의 생명은 끊어졌지만, 사랑하는 가족으로서 그것을 정서적으로 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관 전에는 상주들이 상복을 입지 않거나 저고리 소매를 한 쪽 팔에만 넣으며, 조문도 받지 않는다. 경황 중이기 때문에 세수도 하지 않는다. 입관은 유족 입장에서는 죽음의 물리적이고 공식적인 인정이다. 그래서 입관 이후에야 상주들은 정히 몸을 씻은 뒤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하는 것이다.

김 고문은 임종 직전에 함세웅 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았다. 종부성사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주는 가톨릭의 영세이다. 김 고문의 본명은 구약의 예언자 '즈카리아'이다. 그래서 장례 전반을 가톨릭 식으로 거행하였지만, 우리 전통 제례 형식도 같이 했다. 해를 넘겨 1월 2일 오후 5시 함세웅 · 김병상 신부 등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이 명동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드렸고, 6시에는 같은 성당 문화관에서 가수 장사익 · 안치환 · 김원중, 소리꾼 임진택, 영화배우 문성근, 친구 손학규 등이 함께 한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김근태재단

김근태와의 이별, 장례

김근태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의 경우 대개 3일장이다. 아무리 슬프고 애달파도 3일 정도 되면 우선 유족들의 육신이 고단해진다. 이제 슬픔은 줄어들고 일상은 늘어난다. 또 냉장시설이 없었을 때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데는 3일 정도가 최대치다. 그래서 3일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정을 떼는 적절한 기간으로 친다.

1월 3일 아침 서울대병원 빈소에서 발인 예절을 끝내고, 김 고문의 영구 대열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들렀다가 장례미사와 영결식이 거행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9시 명동성당의 장례미사는 천주교 측의 배려로 최대한 빨리 끝냈고, 바로 사회 각층이 참여한 영결식이 같은 장소에서 이어졌다. 종교계의 지선 스님,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정계의 이정희 · 이인영, 민청련의 장영달, 고교동창 김국주가 추도사를 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당시 동년배의 대학생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학생운동은 그때까지 자유와 민주주의 문제에 대부분 천착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 등 민생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김근태 고문도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의 벗이 되고자, 전태일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투쟁했다. 장지인 모란공원묘원으로 가는 길에 청계천 4가 '전태일 다리' 위에서 노제를 지냈다. 노제는 묘역으로 가는 도중 고인과 인연이 깊었던 장소에서 지내는 약식 제사이다. 열사의 흉상 바로 옆에 김 고문의 영정이 나란히 놓였고,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이 향을 피우고 잔을 올렸다.

모란공원묘원에는 문익환 목사님 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쓰다가 돌아가신 분들, 전태일 열사 등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다가 자기 한 몸 불사른 노동열사들의 유택들이 몰려 있다. 김 고문의 묘는 문 목사님 묘소를 돌아 맨 위에 있는 자리에 잡았다. 바로 그 옆에 형님인 소설가 고 김국태 선생도 이장해올 계획으로 자리를 좀 넓게 잡아 놓았다 한다. 가톨릭 식으로 하관 예절을 마치고 간단한 추도행사를 거행했다. 김거성 목사가 기도를 하였고, 고인의 친구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추도의 말씀을 했다.

ⓒ김근태재단

ⓒ김근태재단

달구는 집터를 다지거나 장례에서 하관하고 묘 주위를 다질 때 쓰는 도구이다. 대개 굵고 둥근 나무나 넓적한 큰 돌에 줄을 여러 개 묶어 만든다. 달구질을 할 때는 사방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달구 묶은 줄을 들어 올렸다가 동시에 놓아야 하니 동작을 맞추기 위해 소리를 하는데, 이를 달구소리 또는 회다지소리라고 한다. 하관 후 흙을 덮어가며 달구질을 하는 것은 메운 흙을 단단하게 하여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거나, 벌레나 산짐승이 훼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 날 수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풍물굿패 '삶터'의 이성호가 선소리로 달구질을 이끌었는데, 축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장례의식에 신명을 일게 하여 보기 좋았다.

김근태와의 회상, 제례

장례 날에는 몇 번의 제사를 지낸다. 장지로 떠나기 전에 빈소에서 지내는 발인제, 묘자리를 파기 전에 산역 인부들이 지내는 산신제, 하관을 하고 봉분을 만든 후 지내는 평토제(平土祭, 또는 봉분제), 집으로 돌아와 지내는 첫 제사 초우제(初虞祭)다. 이튿날에는 집에서 재우제(再虞祭)를 지내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묘에 가서 삼우제(三虞祭)를 지낸다. 요즘은 평토제를 초우제로 겸해 지내고, 재우제는 생략, 삼우제만 지낸다. 1월 5일 김 고문의 삼우제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이 했다. 시간이 약인가, 유족들도 슬픔을 극복하고 원기를 차린 듯 했다. 삼우제를 마치고 식사를 하는 중에 여러 사정으로 보아 고인의 탈상을 49제(祭)에 맞추기로 의견을 모았다.

탈상(脫喪)은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치는 유교의 절차로, 원래는 해상(解喪)이라 했다. 따라서 기독교, 불교 등 다른 종교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지만, 한국인은 종교에 관계없이 죽은 혈육에 대한 애도와 숭모의 마음에서 일정 기간 근신한다. 그 기간이 전통시대에는 3년이었지만, 요즈음은 현실에 맞게 100일 또는 49일로 한다. 100일은 '백일기도'에서 볼 수 있듯 민간신앙에서의 꽉 찬 숫자를 의미하고, 49일은 불교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올리는 49재(齋)가 원용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중음신으로 떠도는데, 이 기간에 7일에 한 번씩 일곱 번의 재(齋)를 올리면 망자가 천도되어 업보를 씻고 다시 좋게 태어난다고 한다.

2월 16일 김 고문의 탈상 제사를 묘소에서 지냈다. 유족들은 오전에 추도미사를 드리고 묘역으로 왔다. 김 고문은 숨지기 얼마 전 '2012년을 점령하라'는 글을 홈피에 올렸다. 유언처럼 된 이 글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파탄 나게 한, 그리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이명박 정권을 총선, 대선에서 심판하라는 김 고문의 절규였다. 그러므로 이 날 '김근태의 탈상'은 이제 슬픔과 미안함을 떨쳐내고 반민주 반민족 반민생 수구세력과의 싸움에 힘차게 나서라는 '김근태와 함께 하는 출정식'이었다.

흰죽 같은 사람, 김근태

김근태와 아프게 이별했던 12월을 보내고, 이제는 회상해야 할 12월이 왔다. 어렵고 고단했던 1년을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 대해 소박한 희망을 품고 이 땅의 장삼이사들도 12월을 맞는다. 흥청흥청 여기저기에서 술자리도 벌어진다. 지난 한해 지긋지긋하게 고달팠던 사람들에게는 점잖게 '보내는' 송년회가 아니라 한해를 아주 '잊어버리고 싶은' 망년회가 맞을 성싶다. 그 어느 비슷한 자리에서 김근태를 '회상'하는데 누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음식칼럼니스트라 하온데, 이를테면 김근태 고문은 어떤 음식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답했다.

"선생은 흰죽과 같은 사람이오."

다시 그 이유를 묻기에 내가 설명을 이어갔다.

"누가 흰죽을 산해진미의 하나라 하겠소? 또 누가 흰죽을 아무 때나 찾겠소? 흰죽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하여 지어낸 쌀에 깨끗한 물만 부어 끓여낸 가장 원초적이고 순결한 음식이오. 평소에는 누구도 찾지 않지만, 어릴 적 병치레로 입맛을 잃었을 때 어머니가 끓여준 흰죽 몇 숟갈을 입에 떠 넣으면 생기가 살아나지 않소? 김근태 선생은, 평상시는 누구도 찾지 않지만, 아플 때는 어느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흰죽과 같은 그런 사람이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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