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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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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상술 <5>

현대중국 제일 갑부 리우용하오(上)

<사진>
***중국 제일 갑부의 하루 용돈**
"저는 하루에 100위안(1만6천 원 가량) 이상은 절대 쓰지 않아요.”
중국의 제일 갑부 리우용하오(劉永好)는 이렇게 말한다.
“유명브랜드가 뭔지도 모르고요. 그런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아요.”
중국 최대의 민영기업 ‘희망(希望)그룹’ 총재. 그의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은 보통 중국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의 외모에선 그가 개인재산이 10억 불이 넘는 거부(巨富)라는 사실의 단서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중학생처럼 머리카락이 앞이마를 가린 헤어스타일로 염색은 물론 무스나 스프레이도 바르지 않는다. 담황색 점퍼를 걸치고 싸구려 검은색 구두를 즐겨 신는다.

얼마 전 CCTV 2 대담프로에 나온 리우용하오에게 사회자가 물었다.
“총재님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시나요?”
“2000cc급 산타나(독일 폭스바겐과 합작 생산하는 중국산 중형승용차, 한국의 소나타급 정도)입니다.”
“정말이세요? 재산이 당신의 천분의 1만 있어도 벤츠를 타는데 총재님은 왜 산타나를 타나요?”
“무엇 때문에 벤츠를 타는데 돈을 씁니까? 물론 우리들은 초호화형 벤츠를 10대 아니라 1백대, 그 이상도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자동차의 역할은 사람의 두 다리를 대신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정말 저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싶은데 속도가 느리고 비가 오면 옷이 젖어서 탈이라…(웃음). 그냥 산타나로 족해요. 저희들은 돈 많다고 자랑할 시간이 없어요.”

“총재님의 성공비결을 한 마디로 말해주세요?”
“사람이란 타성에 빠지기 쉬운 동물이지요. 사람은 후퇴할 수 없는 길에 몰려서야만 자신의 모든 지혜와 재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외부 환경이 어떻든 간에 저희는 항상 최하의 상태에 있다고 끊임없이 자기암시를 가합니다. 항상 깨어있기 위해서지요."

“…희망그룹의 사훈은 무엇인가요?”
“성(誠) 신(信) 정(正) 일(一), 즉 성실한 태도로, 신용을 근본으로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제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IT 산업 등 첨단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가축사료가 주업종인 희망그룹의 주력업종을 첨단산업으로 전환할 계획은 없는지요?
“허구한 날 신경제만 하고 전통경제를 않으면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입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전통경제가 없으면 새로운 희망도 없어요"

***사업 밑천, 단돈 1,000위안**
1982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걸음마 단계에 놓여있을 시절이었다. 중앙 정부가 과학기술 영농의 구호를 선창하자 농촌 전역은“과학을 배우고 과학을 농업에 응용하자”라는 열기가 후렴처럼 들끓어 올랐다.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시 신진(新津)현 구자(古家)촌의 한 농가.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 넷이 서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후일 사해만방에 위명을 떨치게 된 리우씨 4형제.
맏형 리우용엔(劉永言)은 당시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국영기업 '906 컴퓨터사'의 중견 간부였고, 둘째 리우용싱(劉永行)은 신진현 교육국 부국장이였으며, 셋째 리우용메이(劉永美)는 신진현 농업국의 과장직을, 막내 리우용하오(劉永好)는 쓰촨성 기계공업관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그 시절로서는 매우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이자 공직자였다.

낙천적이고 도전적인 막내 용하오가 화제를 주도하는 편이었다.“저는 전문 영농인의 옷을 입고 싶어요. 평생을 가난한 선생노릇을 하다가 인생을 허비하기는 싫어요. 인생은 기껏해야 몇 십 년, 눈 깜짝할 새에 젊음도 사라지고 말 겁니다.”
과감한 돌파력이 장기인 둘째, 용싱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용하오 말이 백 번 옳은 말이야. 그래 우리는 아직 젊어. 한번 죽기 살기 식으로 덤벼보는 거야. 우리 형제들은 다행히도 부모님으로부터 총명한 머리와 부지런한 천성을 물려받은 데다 각자 해박한 전문지식을 가졌다. 더구나 개혁개방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만났다. 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거야.”
계산에 빠르나 소심한 편인 셋째 용메이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제 아내가 시골 농사꾼의 딸이라 직장을 그만둔 후에 만에 하나 사업에 실패한다하더라도 처갓집에 도급 맡은 논이 몇 마지기가 있어요. 최악의 경우라도 굶어 죽을 리는 없을 거요.”
마침내 과묵한 맏형 용엔이 3일 밤낮으로 지속된 마라톤 가족회의에 대미를 찍었다.“그렇다. 농촌은 지금 개혁의 거대한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다. 농촌 출신인 우리들은 모두 이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자.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리우씨 4형제는 모두 공복을 벗었다. 그 대신 사업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업 밑천이라곤 각자 자전거와 흑백 TV와 시계 등을 팔아 모은 돈, 단돈 1,000위안이 전부였다.

***달걀과 메추리 알**
리우씨 4형제는 중국의 새로운 정책을 잘 읽어냈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들은 발상의 대전환을 하였다. 남보다 한 발짝 먼저 앞서 '철밥통'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들 소박한 중국 농민의 아들들이 의지한 것은 강철같은 신념 하나뿐이었다.

우선 그들은 산에 가서 나무를 베다가 양계장을 지었다. 병아리 10만 마리를 사다 기르면서 "육신(育新)양계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행히도 병아리들은 건강하게 약병아리로 잘 자라났고 벌써 달걀을 낳는 조숙한 중닭도 생겼다. 내다 팔기에 적격일 만큼 컸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이렇다할 판로가 막혀 있었다. 며칠을 고심하던 끝에 막내 용하오가 지나가는 말투로 청두 시 변두리에 돼지와 양을 파는 상설 가축시장을 안다고 하였다.
맏형 용엔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거기는 나도 알아. 하지만 거기 가축시장에서는 돼지나 양은 팔지 닭은 팔지 않잖아?”
그러자 둘째 용싱이 막내를 거들었다.“우리가 닭을 판다고 시장사람들이 우리를 내쫓기야 하겠어요? 같은 가축을 파는 것도 아닌데요. 한번 시험삼아 몇 마리 가지고 나가봅시다.”

리우씨 4형제는 밤새 대나무를 엮어 닭 광주리를 만들었다.
막내 용하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자전거 꽁무니에 닭 광주리를 가득 싣고 청두의 가축시장으로 나갔다. 용하오는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품속에서 나팔을 꺼내 큰소리로 외쳤다. “싸다 싸, 영계가 1위안에 세 마리.”
우려했던 가축시장 사람들의 텃세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젊은 지식인의 때를 벗지 못한 그의 몰골과 대 광주리 속의 닭을 재미있다는 듯이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들은 흥정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다. 용하오는 계속 소리쳤으나 조금씩 지치고 초조해졌다.
누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아니 이게 누구세요, 리우 선생님 아니세요.”돌아보니 기계공업관리학교에 몸담고 있을 때 자기가 총애하던 제자였다. 용하오는 얼굴이 귀밑까지 달아오름을 느꼈다. 닭 장사로 변한 은사에게 동정심을 느낀 제자는 용하오에게 10위엔 짜리 한 장을 쥐어 주면서 닭을 몽땅 다 사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용하오는 돈 받기를 거절하고 제자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자네 마음은 고맙네. 그러나 정말 날 도와주려면 1위안만 내고 세 마리만 사 가게…….”
그리고 다정히 제자의 귀를 잡고 뭐라고 귀엣말을 전했다. 제자가 닭 세 마리를 가슴에 안고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한 사람씩 릴레이식으로 나타나서 닭을 사갔다. 알고 보니 그들은 그 제자의 가족들이었다.
오후 3시경이 되자 그때까지 관망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닭을 사러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날이 어둑해지기 전에 그 날 그가 가져온 닭은 모조리 팔렸다.

그 다음 날 밤도 형제들은 닭 광주리를 엮으면 아침에 용하오가 자전거에 싣고 청두 가축시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달 여가 지나자 8만 마리의 중닭을 전부 팔아치울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까지 팔렸을 때 리우씨 4형제는 그제서야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1만 위안 가량의 순익을 남겼다. 당시 교사 한 달 봉급은50위안도 채 안되었던 시절이라 그것은 상당히 큰돈이었다.
리우용하오는 그때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었다고 회상하며 돈에 대한 갈구와 집착의 정도는 어렵사리 1만 위안을 벌었을 그 시절이 억만장자가 된 지금보다도 수백 배 이상 강렬하였었다고 털어놓았다.

양계 다음으로 리우씨 4형제는 양돈(養豚)에 손을 대보기도 하였고 채소의 종자를 배양해보기도, 또 과수원을 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쓰촨의 비옥한 토지는 여러 사람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주게끔 만들었다. 리우씨 4형제는 각자의 소질과 장점을 살려 각종 자료와 서적을 구하고 시장을 돌아다녔으며 서적을 농업기술 부문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들의 눈길은 메추리 사육에 멈추어 졌다.

80년대 초기 중국은 가난과 동의어로 취급되어왔던 전통 사회주의 이론이 도전을 받기 시작했지만 국영기업은 아직은 마음 놓고 돈을 벌 수가 없었다. 정치적 임무만 완성하면 그만이었다. 이익을 보더라도 손해를 보더라도 상관없이 월급은 제대로 나왔다. 이른바 '사회주의의 우월성'이었다.
그러나 개인기업은 이러한 사회주의 우월성을 누릴 수가 없었다. 국영기업처럼 본전을 까먹으면 국고보조는커녕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개인기업은 생존하기 위하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필사의 정신과 함께 경제적 두뇌회전이 빠른 이른바 이코노믹 마인드가 절실했다.

리우씨 4형제 가운데 계산이라면 셋째 리우용메이가 단연 탁월했다. “달걀이 한 개에 1푼인데 달걀의 5분의 1 크기의 메추리알 한 개는 2푼이다. 메추리는 부화한 지 40일 만에 알을 낳고 한 쌍의 메추리는 1년에 5세대로 불어난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메추리들의 값어치는 모두 100위안을 넘는다. 단 1년 만에 투자의 1만 배를 생산할 수 있다. 메추리 사육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아닌가.”

***메추리 대왕의 메추리 대살육**
그들은 시험삼아 자신들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메추리를 키워보았다. 당시 메추리알 시세는 계란보다 훨씬 높아 짭짤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1983년 말엽 그들은 구자촌에다가 대형 사육장을 짓고 본격적으로 메추리 사육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뜨겁던 메추리 사육열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한사코 말렸다.“메추리 전문사육농가들도 죄다 빚더미 위에 올라 죽을 지경인데 왜 하필이면 이때 메추리 사육인가.”

한데 리우씨 4형제들에게는 아무도 못 말리는 성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길을 하나 정하고 일단 가기로 결정한 이상 두 번 다시 뒤돌아보는 일은 하지 않는 거다.
그들은 이렇게 판단했다.“사업 성패의 관건은 시장보다는 상품 자체에 달려 있다. 기존의 메추리 한 마리당 사육원가는 터무니없이 높은 데 반하여 기술은 턱없이 뒤떨어졌으니 실패할 수밖에. 기술수준만 올려주면 생산원가는 저절로 내려가는 법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리우씨 4형제는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그들의 전문지식의 빛발은 광채를 발하였다. 메추리 마리 당 사육원가를 3푼 또는 4푼으로 낮추기 위하여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최적의 메추리 사육법을 개발하느라고 밤잠을 설쳤다. 세계적 메추리 사육 선진국들, 이를테면 일본이나 독일, 한국이나 프랑스는 모두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노하우가 있으나 중국은 그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술수준은 제로에 가깝다는 실정을 깨달았다. 리우씨 4형제는 굳게 맹세하였다. “반드시 우리에게 적합한 메추리 사육법을 개발하여 중국의 유구한 양식산업에 한줄기 광채를 더해주자.”

그들은 각자의 재간과 지식을 총동원하였다. 사료배합과 우량종을 선택에 관한 자료를 모두 컴퓨터로 입력하고 분석한 결과 이제까지와는 다른 독창적이며 입체적인 메추리 사육법을 개발해냈다. 즉 메추리 분뇨로 돼지를 기르고 돼지분뇨로 물고기를 기르고 어분을 다시 메추리 사료로 쓰는 순환방식이다.
이 생태계 순환식 메추리 사육법으로 원가를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메추리알 생산단가가 계란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낮추어졌다. 이 결과 다시 메추리 시장은 활력이 되살아났고 선진과학기술에 새로운 전기와 희망을 가져왔다.
리우씨 4형제의 과학적 메추리 사육법은 사람들에게 양식업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1985년 리우씨 형제가 직접 사육하는 메추리는 15만 마리로 메추리 단일 농가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농민이 돈을 벌어야만 우리도 돈을 벌 수 있다. 우리의 돈벌이의 기초를 타인도 잘 살아야 된다는 원칙 아래 두자.”
그들은 메추리 사육 노하우를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과 열성을 다해 전수해주었다.다시 집집마다 메추리를 기르는 농가가 하나에서 열로, 열에서 다시 백으로 늘어났다. 메추리 사육열은 구자촌에서 신진 현 전체로 퍼져나가 2만 여 농가는 메추리만 사육하는 전문 농가로 변신했다.

“우리가 국내에서 돈 버는 것을 가지고 무슨 큰 재주라고 할 만큼 자랑거리는 아니다. 재주가 있으면 국제시장을 점령하고 외국인의 주머니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이러한 둘째 리우용싱의 강력한 주장으로 1986년 말 메추리 가공공장이 세워졌다.
통조림 등으로 가공된 메추리 고기와 알은 국내 16개성에 팔려나가고 구소련 등 10여 개국으로 수출되었다. 리우씨 형제가 메추리 사육 사업에 착수한 지 불과 3년 만에 중국은 독일, 프랑스, 일본을 추월하여 최대의 메추리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지금도 쓰촨 성 신진현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메추리 집단사육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1987년 중국 당국은 리우씨 형제에게 "메추리 대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국가과학기술대상을 수여하였다. 재산이 명성과 함께 넝쿨째 굴러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2001년 4월 10일 『중국경영보』의 한 여기자와 리우용하오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기업가가 지녀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불굴의 투지와 탈피할 수 있는 정신력이지요.”
“탈피? 불굴의 투지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요, 탈피라고요?”
“민영기업 초창기에 제일 필요한 덕목은 대담성과 불굴의 투지입니다. 그러나 기업이 커지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탈피, 즉 낡은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괴로운 과정입니다. 중국의 민영기업뿐만 아니라 중국의 거의 모든 기업은 탈피하여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자리에서 비화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사실 저희들은 업종을 메추리 사육에서 돼지사료로 전환하면서 엄청난 대살육을 저질렀습니다.”
“대살육?”
“하루 밤새 메추리 15만 마리를 전부 죽여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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