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한 줌, 나뭇잎 두 줌, 19세기 차(茶) 시장의 민낯
오늘 아침 무엇을 마셨는가? 커피? 아니면 차? 혹시 차를 마셨다면, 그 차 봉지 하나가 사실은 꽤나 급진적인 발상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9세기 초 영국에서 차는 귀족과 부자들의 음료였다. 값비싼 물건일수록 속임수가 판치는 법. 당시 차 장수들은 차 무게를 늘리기 위해 먼지, 말린 나뭇잎, 심지어 울타리 덩굴 부스러기까지 섞어 팔았다. 지금으로 치면 분유에 멜라민을 탄 격이니, 어느 시대에나 상도(商道)를 저버린 자들은 존재했다. 소비자들은 찻잎을 산건지, 정원 쓰레기를 산건지 알 길이 없었다.
바로 이 흙탕물 같은 시장에, 한 퀘이커교도 청년이 뛰어들었다.
존 호니먼(1803~1893), 우산 만드는 아버지 아들이 세상을 바꾸다
존 호니먼은 1803년 12월 4일 영국 버크셔주(州) 레딩에서 우산 제조업자 토머스 호니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우산 장수 아들이 차 혁명을 일으켰다니, 인생이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다. 그의 부모는 결혼 직후 퀘이커에 입문했으며, 존과 형 로버트는 요크셔에 있는 퀘이커 학교 액워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퀘이커교는 17세기 영국에서 생겨난 개신교계열 신앙공동체다. 화려한 의식도, 성직자 계급도 없이, 오직 '내면의 빛'과 정직·평등·평화를 강조한다. 이 신앙이 존 호니먼의 평생을 관통하는 원칙이 됐다.
그의 초기 사업경력은 파란만장했다. 버밍엄에서 식료품상, 서머싯에서 치즈 장수, 노샘프턴에서 직물상을 전전했다. 요즘 말로 하면 '연속 창업실패자'쯤 되겠다. 그러나 그 실패들이 오히려 시장을 꿰뚫어 보는 눈을 길러 줬다.
1825년 무렵 노샘프턴에서 차 판매상으로 자리를 잡은 그는, 1826년 마침내 와이트섬 뉴포트에 '호니먼 차(茶) 회사'를 세웠다.
봉인된 차 봉지,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존 호니먼의 핵심혁신은 사실 기술적으로 대단할 것이 없다. 그는 찻잎을 기계로 봉투에 담아 밀봉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한번 봉인된 차 봉지는 누구도 손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행위는, 당시 맥락에서 보면 일종의 사회적 선언이었다.
"우리 차에는 쓰레기가 없다. 믿어도 좋다."
상품 포장지에 진실을 담은 것이다. 그는 이 차에 '호니먼의 순수한 차(Horniman's Pure Tea)'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장은 화답했다. 1850년대 영국의 저명한 의학 학술지 『랜싯(The Lancet)』이 식품 불순물 문제를 집중보도하며 각종 식품을 검사했는데, 호니먼의 차는 '당당히 검사를 통과했다'는 극찬을 받았다. 오늘날로 치면 소비자단체 시험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은 셈이다.
19세기 말 호니먼 차 회사는 세계최대의 차 교역회사로 성장했다. 1893년 기준으로 연간 1천만 봉지의 차를 팔았으며, 차는 인도·중국·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서 들여왔다.
돈을 벌었다고 끝이 아니다, 사회를 바꾼 노년
여기서 보통 사람이라면 여생을 저택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존 호니먼은 달랐다.
은퇴 후 그는 자신의 정력과 재산을 사회공헌 활동에 쏟아 부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단체 중에는 노예제폐지 협회와 하워드 형사개혁 연맹이 있었다. 두 단체 모두 퀘이커교도들이 깊이 관여한 곳이었다.
그는 또한 평화협회에도 자금을 지원했으며, 1892년에는 취약계층 아이들을 위한 요양원을 세웠다. 노예제를 반대하고, 교도소 제도를 인도적으로 바꾸려 하고, 가난한 아이들이 쉬어갈 공간을 만들었다. 이쯤 되면 기업인인지 사회운동가인지 구분이 어렵다. 아마 본인은 둘 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퀘이커 신앙에서 신앙과 삶은 분리되지 않으니까.
1893년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남긴 재산은 32만 파운드(오늘날 가치로 약 370억 원)였는데, 유언장에 따라 그 대부분이 공익목적에 기부됐다. 죽어서도 나눈 것이다.
아들 프레더릭이 이어받은 것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 프레더릭 존 호니먼(1835~1906)은 차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세계 각지를 돌며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했다. 1890년 런던 포리스트힐에 자신의 집을 박물관으로 개방했고, 1901년 그 박물관을 시민에게 완전히 기증했다. 오늘날 남런던의 '호니먼 박물관'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가 돈으로 세상을 바꿨다면, 아들은 문화와 지식으로 세상을 바꾼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고백을 하나 해야 한다. 호니먼 가족이 영위한 차 무역은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아 차 값을 낮춘 구조에 기대어 있었다. 차 농장의 노동은 힘겨웠고 보수는 형편없었으며, 많은 경우 강제노동에 가까웠다. 호니먼이 영국에서 외쳤던 노동자 보호는 정작 자신의 공급망인 해외농장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역사의 위인이 늘 그렇듯, 존 호니먼 역시 빛과 그늘을 동시에 지녔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그에게서 온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한국에서 읽는 존 호니먼,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 보자. 지금 한국에서 '봉인된 차 봉지'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기업의 정직함이 곧 경쟁력이다. 존 호니먼이 봉투를 밀봉한 이유는 소비자가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대기업 갑질', '납품단가 후려치기', '허위광고'가 여전히 뉴스를 장식한다. 정직함을 브랜드 전략이 아니라 신앙처럼 여긴 호니먼의 사례는, 청렴이 이익과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둘째, 부(富)는 사회에 돌려줘야 마땅하다. 수십 년 차 장사로 번 돈을 노예제반대 단체와 교도소 개혁기관, 가난한 아이들의 요양원에 쏟아 부은 사람. 반면 지금 한국의 일부 재벌가는 수조 원의 자산을 편법 상속하고 세금을 회피하는 데 정력을 쏟는다. "번만큼 내 놓는다"는 원칙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들리는지가, 오히려 우리사회의 현주소를 말해 준다.
셋째, 약자보호는 '가까운 데서부터'가 아니라 '공급망 전체'로 확장돼야 한다. 호니먼의 가장 뼈아픈 한계는 해외 차 농장 노동자들의 처우에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기업들도 국내 노동법은 지키면서 해외 하청공장의 아동노동이나 열악한 환경에는 눈감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착한기업'이라는 딱지는 공급망 맨 끝 노동자까지 닿아야 진짜다.
넷째, 신앙과 양심이 사업의 원칙이 될 수 있다. 퀘이커교도들은 17~19세기에 영국에서 초콜릿(캐드버리), 과자(헌틀리 & 팔머스), 은행(바클레이스), 차(호니먼)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기업들을 세웠다. 공통점은 하나였다. 속이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양심적인 사람이 사업을 하면 "그래서는 못 버텨"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호니먼은 그 말이 반드시 옳지 않음을 증명했다.
차 봉지 하나가 남긴 질문
존 호니먼은 차를 파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진짜 판 것은 '믿을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2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는 그 감각을 어디서 찾고 있는가.
먼지와 나뭇잎을 섞어 파는 장사치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다만 그들이 파는 물건이 차에서 주식, 의약품, 언론, 정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봉인을 뜯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한 퀘이커 노인이 1826년 와이트섬 뉴포트에서 차 봉지를 밀봉하며 꿈꿨던 세상 아니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