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장준희씨가 태국의 버마 난민캠프를 찾았습니다. 버마 군부에 저항하다 내쫓긴 카렌족이 모여 사는 마을입니다. 사진가는 이곳에서 오랜 군부 독재가 할퀸 버마의 오래된 희생을 가까이서 기록했습니다. 현지에서 그는 '버마의 봄'을 기다리는 것만큼 '버마의 아픔'부터 보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군부에 저항하다 쫓겨나 타국에 난민으로 살면서 지금도 지뢰 매설 희생자가 속출하는 카렌족의 기구한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화려한 복귀에 가린 카렌족의 희미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지난 4월 1일, 버마에 총선이 있었다.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의 압승으로 선거는 끝이 났지만, 이번 선거에 기대를 걸고, 귀향을 꿈꾸는 카렌족 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버마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외국으로의 이주와 태국사회로의 동화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그곳에는 지난 세월의 폭력과 억압, 분쟁의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아무런 보상과 위로 없이 남겨져 있었다.
태국 최대의 버마 난민캠프인 멜라(Maela) 난민캠프로 가는 길은 생각만큼 어렵거나 검문이 심하지는 않았다. 태국 북부 버마와 국경을 마주한 메솟 시내에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북으로 한 시간여 달리자, 왼편으로 아름답고 이국적인 마을이 보였다. 이 길을 지나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차를 멈추고 사진에 담고 싶어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뭇잎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지붕과, 나무로 만들어진 벽과 기둥, 캠프를 둘러싼 우뚝 솟은 우거진 산과 마을과 마을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 오렌지 빛 아침 햇살과 낙엽을 태우는 연기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찬 그 '아름다워 보이는' 마을이 바로 카렌족의 멜라 난민캠프였다.
1984년 문을 연 멜라 난민캠프는 공식통계대로라면 현재 약 4만여 명이 살고 있다. 그 중 약 98퍼센트가 카렌족이다. 카렌족은 버마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탄압받은 민족으로 자치권을 요구하며 지금까지 무장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버마 정부는 지난 1월 카렌족과의 휴전을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전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실제로 카렌민족해방군의 게릴라 병사들이 치료와 물자를 얻기 위해 캠프에서 몇일간 머물다 떠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캠프에 도착한 뒤 앞으로 머물 한 학교에 짐을 풀고, 학교 학생의 안내를 받아 캠프를 둘러보았다. 식료품과 의료, 가전제품 등을 파는 상점들과 종교 시설, 병원과 기숙사까지 난민캠프지만 없는 게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은 곳은, KHWA(Karen Handicap Welfare Association) 케어 빌라. 카렌민족해방군 지뢰피해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거주하는 시설이었다. 지뢰 피해자들은 지뢰 해체작업을 하거나, 지뢰를 밟아 상해를 입어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고 앞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과의 첫 만남은, 그들이 부르는 합창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20여명의 시설 거주자들은 일주일에 세 번, 2시간씩 합창 연습을 한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이들은, 섭씨 35도에 가까운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려가며 진지한 모습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사진쟁이' 인 나에게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들에게 어떤 아픔과, 어떤 고통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곳에 머물며 취재를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이미지'만을 쫓으려던 가벼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약 3주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면서 나는 숨겨져 있던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었다.
음악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소년, 에다위
시설에서 가장 어린 에다위(14)는, 네 살때 버마군의 폭격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했다. 2009년부터 가족과 함께 캠프로 이주했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이 시설에서 지내게 됐다. 에다위는 절대음감을 가진 특별한 아이였다. 3년 전에 이 시설에서 지내면서부터 시작한 기타와 피아노는, 그 누구의 지도 없이 혼자 터득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음을 듣기만 하면 칠 수 있는 '절대음감' 의 소유자다.
"버마 군부가 무엇이 나쁜지, 카렌의 역사가 어떤지 잘 몰라요. 그런데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누나가 버마군에 납치됐다고 해요"
"이곳에 있으면 노래도 부를 수 있고, 기타도 칠 수 있고, 피아노도 칠 수 있어요. 꿈은 기타리스트가 되어 록밴드를 하는 것이에요"
그는 낡은 기타와 몇몇은 음이 쳐지지도 않는 전자 피아노를 소중한 듯 만지며 이야기한다.
군부에 대항해 입대한 남자들. 그리고 가족
에다위를 제외한 나머지 19명은, 모두 카렌민족해방군 출신이다. 그들이 군에 지원하게 된 이유는 모두 닮아있다. 버마군의 억압과 약탈,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마부(22)는, 2004년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가 이유 없이 총아 맞아 죽게 된 후,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을 위해 농부가 되었으나, 계속되는 버마군의 폭행과 약탈로 16세에 군에 지원했다.
"가족은 모두 여섯 명 인데, 쌀은 물론 양파 하나 남김없이 모두 빼앗아 가고,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때렸어요. 반드시 복수를 하고 싶어서, 상처가 낫자마자 군에 지원했어요"
그렇게 군에 지원하여 카렌민족해방군 제3여단에 편입된 그는 2009년 3월 19일 지뢰 해체작업 중 부상을 입고 이곳으로 옮겨지게 됐다. 마부는 말한다.
"그래도 이곳에 옮겨진 피해자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대부분의 IDP(individually Displaced Person), 지역 정글 속에 남겨진 부상병들은 열악한 시설과 환경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적어도 밥을 굶을 걱정은 없어요. 따지고 보면 내가 태어난 뒤로 가장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이 시설에는 4인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기도 하다. 파투(45)와 그의 아내 무낭(40), 아들 밍야위(13) 조카 무무(11)는 2011년부터 함께 이 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파투 역시 평범한 농부였으나, 버마 군의 약탈과 폭력, 터무니 없는 세금징수로 2000년,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군에 입대했다. 그의 가족은 버마의 수도 양곤으로 돈을 벌러 간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2002년, 11월 파투 역시 지뢰해체 작업 중 피해를 입고 2004년 멜라 캠프로 옮겨져 혼자 생활을 해왔다. 그가 군에 입대한 2000년부터 아내 무낭과 세 아들이 캠프에 오게 된 2011년까지 파투는 12년간 가족과 만날 수 없었다. 그 동안 홀로 남겨졌던 그의 아내 무낭은 가족부양을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지냈다. 4년 간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남편이 죽은 줄만 알았다.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남겨진 세 아들을 위해 닥치는대로 일 할 수밖에 없었다. 세 아들 중 막내 밍야위는, 캠프에 와서야 처음으로 아버지 파투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아빠가 팔이 없고 눈이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빠와 함께 살게 되어 너무 행복해요. 또, 캠프에서는 학교도 다닐 수 있고, 밥도 매일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무낭은, 남편의 부상 사실을 알게 된 2004년, 남편이 많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무너 지는 줄 알았지만, 이제는 편한 곳에서 모두 함께 지낼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말한다. 그녀의 첫째, 둘째 아들은 지금 방콕에서 일을 하고 있다. 모두들 이 난민 캠프가 '편한 곳'이며, 인사이드 버마의 정글 속 난민들의 비참한 생활에 비하면 너무도 운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조카 무무도 데리고 있다. 무무는 어릴적 버마군의 공격으로 부모를 잃어 부모의 얼굴도 모른채 파투와 무낭을 부모로 알고 지낸다고 한다.
지원 끊긴 멜라 캠프, 고립무원의 지뢰 피해자들
그렇지만, 이들에게도 당장 닥친 걱정이 있다. 올 4월부터, 이들을 지원해 오던 CPI(Clear Path International) NGO단체로부터 금전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한달 에 약 50,000밧 (약 180만원)의 지원이 끊기게 되면, 부상 후유증에 대한 지속적인 케어와, 진통제 등의 약품 공급 역시 힘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말라리아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 속에, 중병의 경우 난민캠프 밖 태국의 병원시설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되는데, 태국의 보험적용을 받지 못하는 난민 신분으로서 그 치료비의 부담 또한 감당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합창과 채플수업, 영어, 연극 등을 지도하는 교사의 월급(한 달에 1000밧=약 3만7천원) 의 지급 역시 중단되게 된다.
"이들은 버마 군부와 카렌민족과의 분쟁에 있어서 직접적인 피해를 본 가장 상징적인 존재인 동시에, 모두가 보살펴야 할 존재들입니다. 동버마, 카렌족이 많이 살고 있는 카렌주 등지의 지역에는, 버마 군이 카렌족을 위협하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지뢰를 설지하거나, 큰 도로에 지뢰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지뢰가 많이 묻혀있는 곳일 겁니다. 버마 군부는 보여지는 민주화를 서계 언론에 선전하기 전에, 지뢰 제거작업과 카렌족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카렌족 그 누구도 버마 정부를 믿지 않습니다"
러라이(40) 시설 주임의 말이다.
'버마의 봄'은 올까?
과연 버마에 봄은 올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가 버마에 대한 경제 제제를 완화하고,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동아시아 기업들 역시 버마로의 진출을 가속화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이방인이며, 경제적인 논리로 버마를 바라보는 입장에서의 '보여지고 있는' 민주화에 지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버마 정부의 '민주화, 평화, 개방'의 선전의 뒤에는 오늘도 타국 땅에서 꿈과 희망 없이 살아가는 십만여 난민들이 있다. 뻔히 보이는 선전보다는, 그 뒤에 숨겨둔 버마 정권의 지뢰와 폭력에 대한 해결, 분쟁 피해자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에서부터 진정한 버마의 봄이 시작 되는 게 아닐까.
※ 멜라 난민캠프 장애인 시설 관계자 연락처: Ler Lay Kler, lerlaykl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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