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릅뜬 눈, 무언가 경계하는 듯한 움직임. 이내 배우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지하 1층 연습실을 울렸다. 독일 나치 정권에 대항한 목사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왔다(First they came)'를 각색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
지난 3월 25일 오후, 팔짱을 끼고 연습 장면을 지켜보던 예술감독 임진택 씨는 눈을 감았다. 그는 과거 유신 시절 '민청학련-2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후일 이 사건이 조작으로 판명 나자 파장은 엄청났다. 언론과 교과서에 이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 사건, 국가 폭력 사건으로 소개됐다. 피해의 상처가 모두 씻기진 않았지만, 알아주는 이들이 있기에 아주 섧지 않았다. 올해는 민청학련 사건이 정확히 40년 되는 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국가 조작 사건이 40년을 맞는다.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3주 전인 1974년 3월 15일, 중앙정보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 사건을 발표했다. 울릉도와 경상북도 주민들 그리고 전북대 교수 등 무려 47명이 연루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다. 그중 세 명은 사형당했다.
명백한 사법 살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동시대에 비슷한 사건으로 고통받았던 임 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 씨의 가슴이 무거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40년이나 지난 이 사건을 지난해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개소식에서 처음 전해 들었다. 이후 최창남 목사가 쓴 책 <울릉도 1974>를 찾아 읽고,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무대 위로 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연극의 컨셉은 서사를 통한 '치유'다. 피해자들의 상처를 씻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국가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단지 과거의 일일까. 간첩 조작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 조작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뒤이어 터진 간첩 사건 또한 조작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토록 여전히 사회는 엄혹하다. 치유보다 더 적극적인 고발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넌지시 물었다.
"피해자분들이 올해 1~2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40년 만에 그렇게 바라던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도 피해자들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습니다. 무죄는 받았지만, 인생을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을 치유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치유되지 않습니다. 결국 사회 정의가 실현돼야만 비로소 진정한 치유가 된다는 점을 연극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유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적극적인 고발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식 입장에서 어린 시절, 제일 부모 손이 필요할 때 아버지가 없었거든요. 한참 후 성인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왔는데 서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서로 말 한마디 못하고 다가갈 방법을 모르는 거죠. 이게 바로 인간파괴 아닌가요. 그 피해는 상상도 못 합니다."
"울릉도 사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과 마찬가지"
임 씨는 이번 연극의 연출 파트너로, 재일교포 연출가 김수진 씨 손을 잡아끌었다. 김 씨는 재일교포와 일본인 합동 극단인 신주쿠양산박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재일교포로서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이다. 전후 돈벌이에 전념하느라 재일교포 문화를 남기지 않은 1세대와 달리, 그는 재일교포 2세대로서 일본 내에서도 존경받을만한 마이너리티(소수자)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학에서 우연히 본 연극이 김지하 시인이 쓴 농촌계몽연극이자, 임 씨가 연출한 국내 최초의 마당극 '진오귀'였다. 당시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자재일교포들이 구명 활동 차원에서 이 연극을 일본 대학 무대에 올렸다.
"운동만 하던 제가 이 연극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연극을 찾아보기 시작했죠. 이후 황석영 선생님이 대본을 쓴 '통일굿'을 임진택 선생님의 <마당극 연출론> 번역본을 보고 공부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서사치유연극 '상처꽃-울릉도 1974'기간 : 2014. 4. 3 ~ 2014. 5. 31장소 : 눈빛극장(대학로)가격 : R석 3만 원, S석 2만 원, A석(현장판매) 1만 원관람 등급 : 만 13세 이상문의 : 극단 길라잡이(070-8158-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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