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서울시교육청은 자율형사립고 지정 취소를 일 년간 미룬다고 발표했다. 법리적 논란이 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자사고가 일반고 위기의 주요 원인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사고 폐지가 늦어졌으니 일반고 살리기 정책은 그만큼 더 힘겨운 출발을 하게 됐다. 긴급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당분간 해열제 주사 처방이 내려진 셈이기 때문이다.
일반고의 어려운 현실은 고교 교사들이 자신들은 ‘탁아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심한 경우 기본적인 수업과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학습부진 학생들이 쏠려있는데다 생활지도 면에서도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일반고 교육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힘들어진 것인가? 그 이유는 고교평준화 해체, 대학입시제도의 결함과 압력, 교육의 후진성 등 세 가지인데 서로 밀접히 연결돼 있다.
평준화 폐지론자들의 논리는 평준화정책이 몰고 온 하향평준화 때문에 국제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특수 분야 인재로 기르겠다며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목고가 전국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어서 ‘신 명문고’로 재탄생한 자사고는 거의 침몰된 평준화 체제에 최종적인 타격을 가했다.
직업교육 기피 해결책으로 대학동일계진학 특별전형이 실시되자 특목고, 자사고에 진학 못한 중상위권 우수학생들이 대거 특성화고로 몰렸다. 일반고 위기는 2010년 인문계고가 ‘일반고’라는 정체 모를 궁색한 이름으로 바뀔 때 이미 불 보듯 빤했다. 법령에 따르면 일반고는 “특정분야가 아닌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일반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고등학교를 말하되 특목고, 특성화고, 자율형사립고, 자율형공립고가 아닌 학교”이다. 다양한 선발로 ‘차 떼이고 포 떼인’ 나름의 교육목표도 없는 학교로 전락한 것이다.
일반고 위기의 또 하나의 원인은 대학입시의 압력이다. 일반고를 포함한 모든 학교가 대학입시에 예속되어 경쟁, 문제풀이와 주입, 획일성의 근대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모든 공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창의성과 개성은 철저히 무시한 채 공장식으로 ‘규격 제품을 찍어 내고’ 있으니 공부를 포기하는 나이는 점점 어려지고 학업부진과 학교부적응을 이유로 학교를 중퇴하는 학생이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다. 대입경쟁에서 가장 취약한 일반고는 그 수도 가장 많다. 자사고, 특목고는 거의 모든 학생이 경쟁교육, 주입식 교육에 열중하는 한편 나름대로 입시제도 변화에도 대응하고 있어 학교이탈자가 적을 뿐이며, 특성화고 마저도 직업교육보다 입시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일반고 정상화가 성공하려면 세 가지 축의 개혁- 학교혁신을 통한 새로운 교육체계 성립 , 자사고 폐지를 비롯한 고교서열체제 개편, 대학입시제도 개혁 세 가지가 동시 추진돼야만 할 것이다.
일반고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새로운 교육체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협력과 기회 평등, 창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에 꼭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 21세기형 교육체계는 수업과 교육과정, 학교운영 시스템과 문화 등을 바꾸는 학교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혁신학교는 학교혁신과 새로운 공교육체계 수립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과 행복 두 가지 모두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누구든지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낄 때라야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학교는 성공 사례를 일반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델학교가 아니다.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초․중․고 500여 개에 달하는 혁신학교들이 적잖은 성공 사례를 남겼지만, 그 의의는 성공 사례 자체가 아니라 학교혁신의 길과 조건을 제시해 준 점에 있다. 학교혁신의 최선의 길은 교사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바탕이 되는 현장 중심 개혁이라는 것, 학교혁신이 성공하려면 학교민주화, 교육과정과 평가의 자율권, 업무간소화가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준 것이야말로 혁신학교의 성과이다.
혁신고등학교는 일반고 정상화로 향한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었고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중심으로 대학진학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최근 경기도 교육연구원이 일반고 위기 해법을 찾기 위해 실행한 혁신고와 일반고 비교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혁신고 학생들은 일반고 학생들에 비해 학교위기감이 낮으며 수업, 평가, 수업 외 활동, 학교 만족도 등 모든 면에서 만족도가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혁신고등학교는 혁신초중학교에 비해 수업과 교육과정 혁신에 상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입시경쟁을 피할 수 없는 데다 일반고 특성상 학습 부진 학생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혁신고 교사들은 지난 몇 년간의 경험에서 고교서열체제와 입시제도 변혁 없이 개별 학교들의 노력만으로 일반고를 살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자사고 폐지와 일반고 살리기는 지난 6월 4일 당선된 민주진보 교육감들의 공약이며, 박근혜 대통령도 개혁 의지를 갖고 있다. 일반고가 살아나려면 자사고 폐지를 비롯한 평준화 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자사고 폐지 연기가 자사고 폐지 무산으로 이어지면 안된다.
자사고 폐지 없는 일반고 살리기는 잘해봐야 절반의 성공에 그칠 뿐이다. 현재 일반고 살리기 대책으로 가장 많이 제시되고 있는 대안학급, 직업교육, 공립대안학교 확대 정책 등은 응급처방일 뿐 근본 대책이 아니다.
자사고 폐지는 자사고에게도 획일적인 입시편중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다. 일반고와 일반고로 전환된 자사고가 고교교육 정상화 노력을 함께 한다면 그 힘은 몇 배가 되고 공교육 정상화의 심장부가 되어 초중학교 정상화뿐 아니라 대학입시개혁까지 촉진시킬 것이다.
조희연 교육감이 천명한 ‘제2의 고교 평준화’가 실현돼 우리나라 교육개혁의 단단한 초석이 마련되길 바란다. 그 초석을 다지며 어떤 학교를 만들어갈지는 교사, 학생, 학부모 등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결정할 문제이다. 다양성과 창의성은 거기서 절로 살아나올 것이다.
대학입시제도와 대학서열구조는 고교정상화를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장벽이다. 대학입시제도가 지금대로라면 25명 학급과 학교민주화가 실현되고 자사고, 특목고가 없어져도 학교는 여전히 수능문제 풀이, 주입식 수업, 선다형 지필고사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대학입시는 학교정상화 성과를 반영하고, 나아가 공교육정상화를 선도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대학입시 병폐의 원천은 대학서열구조이니 일반고 위기가 극심한 지금이야말로 그 서열구조 폐지를 시작할 가장 절호의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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