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부족의 생활상을 담은 다큐에는 늘 식량을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세계 어느 지역의 부족도 사냥한 식량을 나누는 데 보이는 신중함은 거의 비슷하다. 부족원들 모두가 불만을 갖지 않도록 애를 쓰며, 때로는 그 능력이 족장의 지위를 결정짓기도 한다. 식량 배분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이유는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일상적으로 식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래서 이들 부족사회는 식량 자체가 아니라 이를 나눔으로써 생겨나는 인간관계에 더 집중했다. 지금 같은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식량을 오래도록 보관하기 힘든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그렇게 해야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감시의 존재가 필요했다. 식량을 더 많이 가지거나 잘못 나누는 걸 감시하는 부족원들의 눈길이 공평한 나눔을 실현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누군가 계속해서 공정한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나눔이 성립하지 못하고, 이는 바로 부족의 해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냥에 큰 공을 세운 사냥꾼이라 하더라도 추켜세우기보다 겸손하게끔 만드는 문화적 힘 역시 수렵채집 사회에서 나타난 감시의 한 모습이었다.
뇌의 크기는 상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숫자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긴팔원숭이는 약 15마리, 고릴라는 34마리, 오랑우탄은 65마리 정도를 인식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인식할 수 있는 집단의 크기는 대략 150명가량이다. 세계 각지의 수렵채집민을 조사하고 그 평균적인 집단의 크기를 조사한 결과 그 평균수는 153명으로, 이 수치를 뒷받침한다. 단지 수렵채집 사회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에도 잘 맞는 수다. 기원전 로마군의 보병중대는 120~130명, 근대 군대의 최소 독립부대가 되는 중대의 인원수는 130~150명, 학술 연구에서 연구자들끼리 서로 주목하는 영역은 100~200명의 연구자가 있는 범위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조차 마찬가지다. 페이스북 이용자 대부분은 친구가 200명 이하다. 뇌의 크기로만 보면 인간은 150~200명 정도의 네트워크가 상한선인 셈이다.
▲ 네이버 '사회적 네트워크' 검색 이미지. ⓒ네이버
뇌의 한계를 뛰어넘은 네트워크의 탄생
현재 인류 사회는 1500명이 아니라 1000만 명, 1억 명을 넘어서는 단위로도 국가나 조직을 운영하거나 유지하고 있다. 그 사이 뇌의 용량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이 수치를 초월하는 현상이 발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지인 호프웰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호프웰 유적지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가장자리에 토성을 쌓고 안쪽으로 '해자'가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다. 해자는 성벽 바깥에 땅을 움 푹 파고 물을 채워 성으로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방어 시설이다. 중세 성에서 다리를 내려서 물을 건널 수 있게 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물이 있는 공간이 바로 해자다. 그런데 호프웰 유적지의 해자는 신기하게도 성 바깥이 아니라 성 안쪽으로 설치되어 있다. 바깥의 적이 아니라 성 안쪽의 사람들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유적지는 성 안쪽에 사람을 가두고 감시하는 감옥이었을까? 조사 결과 호프웰 유적은 주변 집단이 계절마다 모여 물물교환이나 정보 교환, 종교 의례를 하거나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한 집회장이었다고 여기고 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수십 명 단위의 집단 여럿이 모여 정보를 나누는 교류의 장이였던 셈이다.
그런데 만약 이 유적지에 천 명의 사람이 모여 교류를 하다가 소수의 도둑이나 범죄자가 활개를 치면 어떻게 될까? 공정한 거래나 나눔이 이뤄지지 못하면 무너지는 수렵채집 사회처럼, 이 유적지의 역할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을 테고 인간 교류의 네트워크도 더는 늘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을 서로 인식할 만한 작은 단위에서는 구성원들의 눈이 감시 역 할을 했지만 뇌의 인식률을 넘어가는 큰 단위에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럴 때 바로 해자가 감시하는 눈의 역할을 대신했다. 해자뿐만 아니라 성 위에는 창 같은 무기를 던지는 투척구를 지닌 경비병도 존재했다. 총을 지닌 채 근무를 서는 현대 경찰관의 원형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해자나 경비병의 존재는 일정 공간 안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의 장치가 되었다. 이런 것들이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감시의 흔적이다.
진화는 한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감시 자체가 나눔을 강제하거나 인간 사회의 규모를 확대해 온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다만 인류와 가장 가깝다는 유인원에게서조차 거래라는 관념을 찾기 힘들다는 연구 결과를 유념하자. 자기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들고 있는 유인원에게 아주 좋아하는 음식을 내밀고 바꾸자고 해도 거래에 응하지 않는다는 연구가 있다. 자신의 손에 든 것과 다른 누군가가 지닌 것을 간단하게 바꿀 수 있다는 신뢰를 갖고 있지 못해서다.
그러나 인간은 거래를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물건을, 또 지금 당장이 아니라 미래 어느 시점을 상정한 채로도 거래를 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신뢰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신뢰를 쌓아오기까지에는 호모사피엔스의 선한 연대나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의 압박도 존재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와 보지 않을 때 다른 양상을 보이는 심리 실험에서 드러나듯, 감시가 우리에게 기여한 긍정적인 의미도 분명히 존재한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과 조지 오웰의 <1984>를 보면 감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사회의 감시 체제는 날개를 단 듯 확대되고 있다.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미디어는 위험을 확대재생산하고, 이는 다시 감시의 확대로 이어진다. 느슨하고 포근하게 감시하는 사람들과 주변 이웃들의 역할은 사라지고, 불안정한 주거 현실에 맞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서로를 불신하고 감시하는 역할로 타락하고 있다. 골목의 CCTV는 아이 방에까지 들어가고, 스마트폰 앱, 차량 블랙박스 등 감시의 기제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신용카드 사용내역은 물론 디지털 발자국까지. 이제 감시당하지 않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연 인류가 성장 하던 시기에 신뢰를 쌓는데 도움을 주었던 감시가 지금도 유효할까? 이 감시가 과연 우리 사회의 불안을 덜어주기는 하는 걸까?
대다수의 인문학자, 심리학자, 과학자 등은 인간이 살아오며 만들어 낸 신체의 진화, 마음의 진화, 도구의 진화가 좋은 쪽이나 나쁜 쪽 어느 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직립보행은 인간에게 손의 자유는 주었으나 척추 질환을, 내 가족을 챙기는 마음은 소속 집단의 안녕에는 유효했으나 나와 다른 집단에겐 차별을, 무기의 발달은 더 큰 규모의 네트워크 확립에는 기여했으나 이젠 드론처럼 게임을 하듯 사람을 거리낌 없이 죽이는 현상을 낳았다. 이처럼 진화 자체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잡아가기 나름에 달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시의 방향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 지난해 9월 방송된 중 한 장면. ⓒSBS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사회를 뒤흔들고 힘들게 만드는 큰 사건 사고들은 대개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특히 사회 시스템이나 안전망의 부재로 발생하는 사건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문제를 가진 구조나 시스템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을 감시의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다. 설령 이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그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사회나 구조에 대한 감시는 매우 더디기만 하다.
최근에 문제가 된 카카오톡 사찰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가나 공권력은 개개인을 사찰하지만, 사찰한 정보의 수위나 방법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감시가 일방적이고 투명하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메신저로의 망명을 감행할 만큼 불신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게다가 지금의 기술이라면 방사능 먹거리의 수출입 통제와 감시, 원전 내부 시설의 비상 상황판 공개 등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투명성'이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정보 공개 활동이나, 소비자 보호 활동, 자본과 권력 감시로 형태나 범위를 넓혀 가는 일도 가능하다.
이처럼 감시를 우리에게 유의미한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자기 검열을 강조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를 넘어 공공성을 강화 하는 감시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수렵채집 사회의 감시와 오웰의 동물 농장 감시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감시의 주체가 공공적인지 아닌지, 감시한 정보를 누군가가 독점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회의 모습은 극적으로 바뀐다. 감시와 감시로 획득한 정보는 독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아야 하며 그 자체가 사회의 공공자산이 되어야 한다. 감시의 본래 목적과 결과는 불안과 불신이 아니라 신뢰의 회복이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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