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 일산 동구청 근처 웨스턴돔 거리에 국민투표를 위한 기표소가 세워졌다. '박근혜 정부 노동정책, 개혁인가? 재앙인가?'를 시민들에게 직접 묻는 '을'들의 국민투표 현장. 학교 파하고 교복 차림으로 몰려나온 학생들이 제일 먼저 투표소 앞으로 모여들었다.
"최저임금 무조건 올려야 돼요. 아무리 알바를 해도 필요한 걸 살 수가 없어요."
바로 알바 하러 가야한다는 이유민(16) 양이 투표에 참여한 이유를 당차게 말했다. 알바비는 어쩌다 100~200원씩 오르는데 휴대전화값이며 옷값들은 한꺼번에 팍팍 올라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단다. 음식점에서 일을 한다기에 시급을 물어보니 정부가 고시한 2015년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친다.
학원가에서 전단 돌리는 일을 한다는 김동훈(16) 군도 '최저임금 1만 원'이 간절하다며 투표했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알바 가면 엄청 빡세게 일하는데 그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노동과 임금의 불균형 문제는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매일 억울하게 견뎌야 하는 눈앞의 현실이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채 큰 가방을 메고 가던 김주현(21) 씨도 투표하고 가겠다며 선뜻 걸음을 멈추었다. 하는 일을 묻자 미용실 인턴이라고 했다.
"한 달 내내 일해도 100만 원도 못 받아요. 공짜로 손기술 배우니까 그 값을 빼는 거래요. 이렇게 3년을 일해야 정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테스트를 받을 수 있어요. 그래도 저는 좀 나은 거예요. 청담동 쪽에서 일하는 애들은 인턴만 4년~5년 해야 해요."
올해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종범(19) 씨는 목소리가 한층 격앙됐다.
"고 3 때 현장실습 나간 얘기 하면 애들이 다 치를 떨어요. 두 달 동안 돈 한 푼 안 주고 진짜 노예처럼 부려 먹거든요. 배우는 것도 하나도 없고요. 근데 솔직히 저는 이런 거(국민투표) 해도 세상이 안 바뀔 거 같아요."
▲ 일산 동구청 근처 웨스톤돔 거리에서 김해원, 김은중 님이 설치한 동화작가들의 투표소. ⓒ'을'들의 국민투표 실행본부
"정규직도 언제든 비정규직이 될 수 있는 세상"
입시 전쟁만이 청소년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흔히 얘기하지만, 그 변방에는 아무 준비 없이 노동시장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편의점에서 담배를 팔고, 고깃집에서 반찬을 나르고, 길 위에서 전단을 뿌리며 값싼 생활노동의 한 축을 담당한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막 이십 대를 맞이한 청년들도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처음 맞닥뜨린 노동시장은 대부분 부당하고 비열했으며, 그로 인한 분노와 억울함은 시간이 갈수록 실망과 체념으로 바뀌는 듯했다.
박진환(39) 씨는 멀리서 투표소를 보고 성큼성큼 다가와 투표용지를 달라고 했다. 근처 IT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정규직이라고 했다. 정규직 입장에서 바라보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요즘 같아서는 정규직이라고 해서 더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정규직들도 언제든 비정규직이 될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서로 공생하는 길을 찾지 않으면 답이 없는 것 같아요."
하루 대휴를 냈다는 노수열(36) 씨는 잠든 아기를 안고 투표를 했다. 수열 씨 회사에서는 임금피크제가 이미 시행 중이다. 거기다 성과급제가 도입되고 해고요건까지 완화되면 근무환경은 더 나빠질 게 뻔하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윗사람들 눈치 볼 생각을 하면 벌써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임금피크제로 청년 일자리가 늘어날 거로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회사만 해도 내년 충원 인원을 늘리지 않았거든요. 결국, 기업만 좋은 일 하는 거죠. 나중에 개표해 보시면 알겠지만, 투표한 사람 중 98%는 현 정부의 노동정책에 반대했을 거예요."
"우리끼리 알바 자리 놓고 경쟁하는 상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자원봉사자들의 투표소. ⓒ'을'들의 국민투표 실행본부
예비군복을 입고 투표에 참여한 김세호(23) 씨는 제대 후 복학을 기다리며 알바를 하는 중이이다. 졸업한 선배들이나 동기들의 취업 여부를 물으니 정규직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끼리 알바 자리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돼 버린 거예요. 저만 해도 등록금 대려면 당장 알바를 해야 하는데, 졸업한 사람들까지 계속 알바 일을 찾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아버지들 임금을 줄이는 거로 청년 일자리를 해결하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되죠. 당장 집집이 생활에 큰 타격을 받을 텐데 그렇게 되길 바라는 청년들이 누가 있겠어요?"
투표소 앞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가가 투표를 독려하는 이들이 있다. 거리 투표소 설치를 처음 제안한 일산의 동화작가들이다. 오후 내내 투표소를 지킨 김해원, 김은중 작가는 본인들도 출판노동자로서 여전히 힘든 삶을 살고 있으며 노동정책이 바뀌지 않고서는 교육문화의 수준도 결코 나아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출판사와 기획사 틈바구니에서 최저 생계비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아요. 버티고 버티다 결국 못 버티면 다른 작가들로 바로 대체되고요. 우리 문화의 질을 높이려면 뭣보다 창작자들의 삶을 지켜내야죠. 우리 사회의 수준을 높이려면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내야 하는 것처럼요."
투표소는 총 3시간 동안 운영됐고,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 속에서도 거리를 지나던 100여 명의 시민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어린 학생들부터 주부, 직장인, 예비군까지 실제로 정책을 감당하고 책임질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분명히 한 것이다. 투표에 참여했던 일산 시민단체 회원들은 앞으로 일산 곳곳에 투표소를 더 설치하고 국민투표를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렇듯 지금도 '재앙' 수준인 노동 현장인데, 박근혜 정부는 '일반해고요건'을 완화하겠다고 하고, 취업규칙 변경의 자유를 기업가들에게 준다고 한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55세 이상 숙련노동자들을 무한정 비정규직으로 쓸 수 있게 하자고 한다. 제조업의 근간인 용접, 판금, 열처리, 도장 등 '뿌리산업'들에 파견노동자 사용을 합법화하자고 한다. '청년'들을 핑계로 국민의 눈과 귀와 머리를 속이고, 장년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한다.
이런 노동 개악을 하반기 정기국회 내에 입법화하겠다고 한다. 정작 그 법의 당사자들인 2000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발언의 기회도 없다. 이에 맞서는 국민들의 직접민주주의 주권운동의 일환인 '을'들의 국민투표는 11월 12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현재 전국의 생활 현장으로 들불처럼 투표소들이 번지고 있다. 노점상들이 노점에 투표소를 설치하겠다고 하고, 교회들이 나서고 있다. 농민들은 전국 시군 단위까지 투표함을 설치하겠다고 한다. 대학 교정들에 양심적인 교수들과 학생들에 의해 투표소가 설치되고 있고, 카페에, 한의원에, 변호사 사무실들까지 투표소가 설치되고 있다. 일가족이 나선 동네 앞 투표소가 서고, 샐러리맨들의 점심시간 투표소가 설치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생활공간에 투표함을 설치할 수 있으며, 투표소 설치를 원하는 경우 홈페이지(바로가기 ☞: 국민투표실행본부)에 신청할 수 있다. ‘국민투표 실행본부’에 연락해 1만 원의 실행기금을 내면 누구나 손쉽게 작은 박스 하나 분량의 조립식 투표소 물품을 받을 수 있다. 가까운 곳에 투표소가 없다면 온라인 투표 참여(바로가기 ☞ :'을'들의 국민투표온라인 투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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