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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제2의 '분서갱유' 꿈꾸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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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제2의 '분서갱유' 꿈꾸고 있나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박근혜 정부, 독재정권 북한 능가하는 '초북'적 집단

최근 여당이 정부가 지정하는 대로 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작업을 강행하고 있어 정치권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양 극단으로 갈리고 있다. '친일'과 '친북'이라는 이념대립으로 확대되고, 내년 총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여야는 이 문제에 당운을 걸고 있다.

친일 성향으로 교과서를 기술하는 것은 독립을 위해 피땀을 흘렸던 선현들의 노력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여론을 포괄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을 선별하려고 하는 행태도 큰 문제다.

이는 이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비장의 무기로 종종 활용하는 '북한 카드'보다도 훨씬 심하다. 이러한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줄기차게 야당을 '종북세력'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들은 이런 점에서 독재정권인 북한을 압도하는 '초(超)북세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재 이들의 위험한 행보는 과거 중국의 역사 속에서 발생한 '폭정', 그리고 '멸망'과 그 과정이 매우 비슷하다.

▲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3일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자라나도록 가르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배경을 설명했다. ⓒ연합뉴스

진(秦)의 통일과 모든 것을 법대로

진은 춘추전국(BC 770~BC 221)의 대혼란기에 종지부를 찍은 나라이었지만, 본래는 변방의 약소국이었다. 진이 본격적으로 강대국이 된 것은 상앙(商鞅, BC 395?~BC 338)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법가의 사상가였던 상앙은 일대 개혁을 통해 진을 변방의 소국에서 광대한 영토를 가진 강대국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법가의 효과를 톡톡히 본 진은 법가사상을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아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서 명실상부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의 일원이 됐다. 이후 영정(嬴政, BC 259~BC 210)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BC 221년 춘추전국시대 약 550년간의 대분열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영정은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나타내기에 '왕'(王)이라는 호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냈다. 또한 자신의 제국이 후손들에게 천세만세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처음 황제라는 의미의 '시황제'(始皇帝), 그 다음을 '이세(二世)·삼세(三世)...만세(萬世)'로 정했다.

진시황제는 영원토록 진의 천하를 이루기 위해 각종 통일정책을 실시했는데, 당연히 법가의 인정사정없이 '모든 것을 법대로'라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법가의 사상은 춘추전국의 혼란기에는 단기간에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어 많은 인기를 끌 수 있었지만, 통일 이후에는 강압적으로 백성들을 옥죄면서 수많은 역효과를 발생시켰다. 중국을 하나로 만들고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한 것은 매우 훌륭한 업적이지만, 위와 같은 강압때문에 진시황제를 폭군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책을 불사르고 유생(儒生)들을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짐의 말이 곧 진리다, 분서갱유

분서와 갱유는 두 가지 사건이다. 진은 통일정책 실시 과정에서 유생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진노한 진시황제가 법가 이외의 책들을 모두 불사른 사건이 바로 분서다. 갱유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학자들을 생매장한 것으로 분서 이후에 발생했던 사건이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며 그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가차 없이 응징했던 것이다.

분서갱유는 단순히 책과 학자들을 제거한 것이 아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심지어는 그 이전부터 쌓아온 수많은 현인들의 지식·문화·학문 등을 삽시간에 불사른 것이다. 역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 BC 145-?)은 당시 수많은 서적과 지식이 사라짐을 몹시 통탄하며, "육예(六藝)가 이로써 모자라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한 가지 예로 한자 자전의 원조로 추앙받고 <옥편>(玉篇)보다 약 400년 앞선 동한(東漢) 허신(許愼, 58?~147?)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분서갱유가 한창일 당시 책을 몰래 숨긴 자는 '멸족'(滅族)이라는 극형을 받게 되어 대부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책을 상납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후손들에게 선인(先人)들의 지혜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책을 벽 속에 숨겨뒀다.

허신이 활동하던 2세기경 분서갱유의 화를 피하기 위해 숨겨두었던 책들이 속속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였지만, 당시의 문자로 쓰여진 책들은 허신 시대의 사람들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문자로 된 책들을 읽기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설문해자>였다.

법가의 강압과 진의 멸망

이처럼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법대로 획일적인 것만 추구하던 진은 550여 년의 대분열기를 종식시켰지만, 위와 같은 강압으로 겨우 15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의 영화를 누리고 멸망했다. 진의 몰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흔히 진은 '법가로 일어나고 법가로 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진 멸망의 신호탄이 된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은 전형적인 법가의 강압에 의해 발발한 사건이다. BC 209년, 진시황제의 뒤를 이은 진이세(秦二世, BC 230-~BC 207, 본명 영호해·嬴胡亥)는 900명의 백성을 징발하여 어양(漁陽, 현 베이징 인근)의 수비를 명하였다. 평민이었던 진승과 오광은 이들 수비병 중 하나로 황제의 명을 받아 어양으로 향하였다. 7월경 대택향(大澤鄕, 현 안후이성 수저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려 길이 끊겨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 어양에 도착하는 기한을 넘기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인정사정없던 진의 법에 따르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기한을 어기면 무조건 사형이었던 것이다. 이때 진승과 오광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차라리 반란이나 한번 일으키고 죽자고 다짐하며, 결국 같이 갔던 900명의 백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진의 폭정에 대해 그간 쌓여있었던 민중들의 불만을 터뜨렸고, 이로써 발생한 작은 금이 결국 진이라는 거대한 댐을 붕괴시켰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재와 진

현재의 대한민국은 이명박 정부부터 급속하게 진을 닮아가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 주요 역사연구기관에 친일성향의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을 포진시켜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업을 착착 진행해가고 있는 것이다.

진의 법가와 마찬가지로 다른 이론들은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입맛에만 맞는 내용을 기술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세뇌하려고 한다. 누가 친일파 후손들이 아니랄까봐, 과거 일제가 실시했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우리 겨레의 정신부터 붕괴시키려 한다.

이들은 현재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독립투사'에 대한 '존경'과 '일제 앞잡이'에 대한 '멸시'라는 진리를 뒤집어, 자신들의 최대 약점인 '친일파 후손'이라는 점을 미화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진시황제와 같이 '이세·삼세...만세'까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한다. 550여 년의 대분열기를 종식했지만, 이러한 행위를 일삼다가 결국 15년 만에 붕괴된 진을 직시하라고 역사가 경고하고 있다.

(임상훈 교수는 현재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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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설립된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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