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꼴찌 나의 딸
수학적 개념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를 가늠하는 최초의 관문, 분수에서 내 딸, 지원이의 답이다. 초등학교 3학년 수학. 분수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다. 나는 아이를 앉혀놓고 피자 나누기를 예로 들며 열심히 분수의 개념을 설명한다. 그러나 아이는 나눌수록 점점 작아지는 분수 개념의 첫걸음조차 이해를 못한다. 지원이는 마침내 '왜 자꾸 피자 얘기만 해?'라며 짜증을 낸다. 평소 분노 조절의 강자라고 자만하던 나였지만 정말 아이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기가 힘들다.
"이걸 알아야 분수 개념을 알 수 있어."
눈치 빠른 아이는 내 목소리에 깃든 억눌린 떨림을 감지한다."엄마, 지금 화났지?"
"아냐."
나는 최대한 표정을 감추며 말한다.
"화난 거 맞네."
그래. 화난 게 맞았다. 결국 그날의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후로도 '엄마와 수학 공부하기'는 시도로만 끝났고 아이는 '수학을 못하는 사람'의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 못하는 것이 수학뿐이라면 좋았겠지만 전 과목에 걸쳐 아이는 교과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 분명했다. 받아오는 시험지에서 동그라미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며 그 공부 못함은 성적과 석차라는 수치로 더 명확히 드러났다. 영어와 몇몇 예체능 과목을 제외하고는 전 과목이 꼴찌 부근에서 맴돌았다.
한번은 정말 궁금한 마음 반, 슬쩍 비꼬고 싶은 마음 반으로 아이에게 물어봤다.
"네 친구들은 네가 이렇게 공부 못하는 거 아니?"
그러자 아이는 별 이상한 질문도 다 들어본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르지."
지원이의 성적은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친 첫 시험에서 마침내 전교 꼴찌를 찍는다. 일시적인 방황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예정된 일이었다. 애초 지원이의 성적으로는 자신이 원했던 디자인 특성화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원이는 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희망자 특별전형으로 응시하여 취업서약서를 쓰고 면접을 봐서 합격했다. 한마디로 열정 하나로 턱걸이해서 입학한 학교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나와 지원이에게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나직이 묻는다.
"아이가 꼴찌여도 괜찮아요?"
그리고는 덧붙인다.
"나도 아이가 '공부 못 해도 된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막상 아이가 학교에 가니까 절대 그렇게 안 되던데."
사람들은 끝없이 묻는다. 아이가 공부를 못해도, 성적을 못 받아와도, 대학을 못 가도 괜찮으냐고. 나는 괜찮다고 답한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백 번을 생각해도 "정말 괜찮"다. 아이가 전교 꼴찌여도 괜찮다. 아이가 대학을 가지 않고 고졸자로 취업을 해도 괜찮다. 설령 편의점,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도 괜찮다. 아이가 자신이 하는 일에서 만족을 느끼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생기를 나눠주고, 자신의 일터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이면 된다.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다.
"괜찮으세요? 아이가 남들과 비교당하며 만성질환으로 패배감을 앓아도? 아이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몰라도? 정말 괜찮으세요? 아이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저당 잡혀도?"
우리 집은 '모자원'
지원이의 기억이 닿는 가장 오래된 우리 집은 '모자원'이다. 모자원. 지원이는 이 이름을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다. 모자처럼 생긴 집은 아니었지만 건물이 들어선 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모자 모양으로 봐 줄 만했다. 모자원은 한 지붕 아래에 45명의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어린이집 차가 모자원 현관에 아이들을 내려주면 지원이는 종종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친구 집에서 놀고는 해서 저녁 먹을 시간이면 나는 아이를 찾아 문을 두드리며 다니고는 했다.
주말이면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며 친구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산으로 올챙이, 달팽이를 잡으러 가기도 했다. 모자원이 위치한 산은 등산객들이 찾을 정도의 꽤 큰 산이었다. 그 곳에는 언제나 놀 거리가 많았다. 아이들은 유격대를 만들어 숲을 탐험했다. 크리스마스 때면 파티가 열렸다. 지원이는 아이들과 함께 연습한 공연을 했고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선물을 듬뿍 안겨주었다.
한번은 샐쭉한 표정으로 지원이가 말했다.
"엄마, 아이들이 나보고 안성탕면이라고 놀려."
"왜?"
"성이 안 씨라고. 진수민은 진라면이고, 신예지는 신라면이야."
또래였던 '라면 3자매'는 그렇게 모자원이란 공간과 3년이란 시간을 공유했다.
그리고 지원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이름도 아름다운 경남 산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버스는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다. 겹겹이 펼쳐진 능선이 치마폭처럼 우리를 감쌌다. 거대한 산이 서서히 닫히는 문처럼 길을 좁혀왔고 그 사이로 버스가 위태롭게 달렸다. 버스가 '덕산'이라는 바위 문을 통과하는 순간 거짓말같이 산들이 열리며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가장자리로 강이 보를 형성하며 흘렀고 사방 360도가 산이었다. 정면으로 천왕봉이 보였다. 눈앞에 우뚝 솟은 지리산은 차라리 거대한 산맥이었다.
지금까지의 공동체 생활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지원이에게 주어졌다. 친구 집에 가려면 아이 걸음으로 한참을 가야 하는 인구밀도 희박한 지리산 산골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면사무소와 지원이의 초등학교는 지척에 있었다. 지원이는 학교를 마치면 내가 근무하는 곳에 와서 가방을 휙 던져놓고는 산으로 들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퇴근 무렵이면 난 모자원에서처럼 아이를 수소문하여 찾아서는 함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고는 했다. 천왕봉을 등지고 덕천강변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에는 넓은 공원부지에 덩그렇게 놓인 무대가 있었다. 그곳이 맘에 들었는지 종종 지원이는 그 무대에서 혼자 춤을 추고는 했다. 산을 배경 삼아 진지한 표정 연기를 하며 춤을 추는 아이를 바라보며 가슴이 벅찼다.
산청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길가의 엉겅퀴조차 장엄하게 피어났다. 비가 올 때면 너른 지면에 고르게 닿는 빗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창으로는 사시사철 모습을 달리하는 천왕봉이 보였다. 우리는 휴일이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놀았다. 소나무 두 그루가 만들어낸 틈을 마법의 세계로 인도하는 문 삼아 요술공주 놀이도 했다.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이면 계곡에 가서 무서운 기세로 휩쓸려 내려가는 물살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대나무 숲에서 죽순도 캤고 농가 일손 돕기도 했다. 한번은 직장 동료들과 양파 뽑기 농가지원 활동을 나갔다. 휴일이었기에 난 아이를 데리고 갔다. 뿌리를 내린 양파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뽑아 망에 담는 작업은 힘겨운 노동이었다. 동료들은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양파를 뽑는 아이를 보며 지원 나간 농가의 손녀인 줄 알았다고 했다.
공부 빼고 다 잘하는 아이
그 시절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아이에게 다양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관심만 두면 어디에 사는가 하는 것은 문화생활을 누리는데 별반 장애가 되지 않았다. 주말이면 인근의 진주에 나가 영화를 보았고 방학 때면 서울에서 뮤지컬 공연을 보거나 전시회를 보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는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를 스스로 알아갔다.
아이는 발레공연에 가면 매번 졸았고 고전 미술작품 전시회에도 별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주에는 어린이도서관이 있어 자주 갔지만 애석하게도 아이는 거의 독서 중독 수준인 엄마와는 달리 책에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초등학생 3학년 때 분수를 가르치며 진작 알았다.
그런 지원이에게 가장 뛰어난 것은 사람을 끄는 재능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운영한 아이돌 그룹 팬 블로그를 통해 4만 명의 방문자를 모았다. 어느 캠프에 가든지 지원이가 속한 조는 우승을 자주 했고 선물을 휩쓸었다. 교회에서 청소년부 찬양을 인도했던 지원이가 이사를 이유로 빠지자 출석하던 아이들이 줄었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아이의 또 다른 재능은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자기 일주일 용돈을 구걸하는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주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맛있는 것을 사주는데도 인색함이 없었다. 이러한 재능 덕에 지원이는 세 번의 전학으로 시골과 중소도시와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새 친구를 잘 사귀었고 예전 친구들과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챙기며 인간관계를 확장해 갔다.
지원이의 재능이 활짝 꽃핀 것은 특성화 고등학교 3년 때였다. 공연밴드에 들어가 전교생 앞에서 공연을 했고 사람 끄는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응원단장을 했다. 경상도 사투리조차 학교에서는 인기요인이었다. 지원이는 학교 축제 사회를 맡으며 진한 사투리를 구사하여 웃음을 이끌었다. 그뿐 아니었다. 애초에 디자인을 하고 싶다며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간 학교였다. 첫 시험은 전교 꼴찌였지만 취업을 하려면 중간 정도의 성적은 받아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 알아서 성적 관리란 것을 시작하더니, 1학년 마지막 시험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내며 우수상보다 더 값진 노력상을 받았다.
부모 내공 키우기
19살, 고등학교 3학년인 나의 딸 지원이는 2학기 개강과 함께 취업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수시나 수능과는 상관없는 고3 엄마가 되었고 딸은 10대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본격적인 첫걸음을 디딘 사람이 되었다. 끼 많은 나의 딸이 그 재능을 살려 즐겁고 신 나게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분명 엄마로서 큰 기쁨이다.
모든 것을 잘하는 아이가 못하는 단 한 가지가 공부여도 그 공부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한국의 교육 현실임을 나도 안다. 공부를 잘해서 인(in)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가고, 스펙을 쌓아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한 방향으로 줄서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제 갈 길을 선택하여 가는 아이와 그 부모들은 아슬아슬함을 맛본다. 사실 대학 대신 사회생활을 선택한 지원이도, 그것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나도, 어마어마한 용기와 내공을 필요로 했다.
이런 용기 있는 세계관을 얻는 방법은 따로 스승을 내 집에 모시고 살지 않는 이상 독서밖에 없었다. 활자중독증 증상이 있는 나는 눈에 들어오는 문자를 모조리 읽어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나도 어려운 철학책을 읽을 때는 인내가 필요했다. 그렇게 읽어둔 철학, 인문학 책들이 결국 내 안의 어딘가에서 내공으로 쌓여갔다. 또 하나의 방법은 현실 체험이다. 세상을 한해라도 더 살아낸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인생 공부를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독서와 현실 체험으로 쌓아온 부모로서의 내공이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어릴 적 강낭콩을 심어 자라는 모습을 관찰일기로 쓴 적이 있다. 물을 주고 볕이 잘 들도록 주변 잡초를 뽑아주고 일주일마다 한 번씩 자란 모습을 그림과 글로 기록하는 사이 난 강낭콩에 정이 들었다. 콩이 싹을 틔울 때, 넝쿨손이 지지대를 찾아 부지런히 손을 뻗을 때, 연두 잎이 점점 초록으로 짙어져 갈 때, 장미보다 어여쁜 연보라색 꽃이 필 때, 작은 씨방이 자라나 점점 콩깍지로 여물어가는 순간 모두가 감동이었다. 아이도 그렇게 자라는 것 같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타고난 성향을 잘 살려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믿고 지켜봐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
아이들이 지닌 무수한 가능성에 비하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정말 작은 부분이다. 설령 전교 꼴찌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예민하다. '전교 꼴찌여도 괜찮다'는 부모의 생각이 마음고생 끝에 '그래, 공부를 못 하니 다른 거라도 시키자'라는 포기의 심정에서 나온 것인지, 자유로운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지 아이들은 귀신같이 안다. 믿음을 갖고 줄서기를 멈추는 순간, 모든 아이는 각자의 타고난 방향으로 마음껏 성장해갈 것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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