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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에 취해…더 잃을 게 없는"

[의료와 사회] 휴 그랜트의 <선택>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천사가 되려는 자가 짐승이 된다."
-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팡세>(Pensées) 중

현재 한국 사회는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듯하지만, 영화에서는 2015년이 '먼 미래'로 그려지곤 했다.

1989년에 제작된 SF 코미디 영화 <백 투 더 퓨처2>(Back To The Future Part2)에서는 괴짜 과학자 '브라운 박사'와 고교생 '마티'가 타임머신을 타고, 1985년 현재에서 2015년 10월 21일 미래로 여행을 떠난다. 쓰레기 연료나 3D 영화, 영상 통화와 전자 안경과 같이 이미 현실화된 상상도 있고, 비행자동차나 자동으로 사이즈가 조절되는 옷처럼 아직 좀 더 먼 미래로 유예할 것도 있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연으로 나온 <6번째 날>(The 6th Day)의 2015년은 인간 복제가 이뤄지는 고도로 발달한 사회다. 1995년에 첫 방영된 기념비적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Neon Genesis Evangelion)에서는 2015년 마지막 날 '서드 임팩트(the third impact)'가 발생해 사실상 세계가 멸망한다.

▲ 휴 그랜트의 <선택>(Extreme Measures, 1996년) 포스터. 마이클 앱티드가 감독하고, 휴 그랜트와 진 해크만, 사라 제시커 파커가 출연했다.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미래를 상상하는 작업은 예로부터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반대로, 미래를 상상했던 과거의 창작물에서 '지금' 꺼내 현재의 의미를 호출하는 것 또한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 있다. 휴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 <선택>은 물론 먼 미래를 상상한 것은 아니다. 영화의 시점 자체는 '현재'이긴 하나, 중추신경재생으로 불치병을 치료한다는 소위 '미래'의 의학기술을 둘러싼 갈등이 플롯의 근간이다. 영화의 배경은 근(近) 미래 정도가 아닐까 싶다.

뉴욕의 한 시립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영국인 의사 '가이'(휴 그랜트 역)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환자를 담당하게 된다. 그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증상을 보이다 이름과 몇 가지 단서만을 말한 채 사망한다. 이후 가이는 환자의 시신은 물론 의료기록까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추적한다. 여러 위험을 겪으며 추적한 끝에, 가이는 유명 신경과 의사인 '마이릭'(진 핵크만 역) 박사가 주축이 돼 노숙자를 납치, (아마도 줄기세포를 이용한) 중추신경재생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줄기세포는 2004~2005년경 인간의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는 논문을 <사이언스>지에 발표했다가 추후에 거짓으로 판명된 '황우석 사건'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당시에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복제와 그에 따른 난치성 질병의 치료라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기술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기대로 많은 사람들이 황 전 교수에게 열광했다.

2005년 당시 일부 네티즌들은 황 교수에 대해 취재와 검증을 요구하며, MBC <피디수첩>의 광고주들을 압박했다. 결국 <피디수첩>은 광고 없이 방송했다. 이 사례만으로도, 황 교수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소재로 한 영화 <제보자>가 2014년 개봉했다.


또 2003년 인간 게놈 지도가 완성된 후, 유전자 정보를 기반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치료인 유전자 치료에 대한 연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고소득 계층의 부(富)도 상대적으로 증가한데다, 새로운 질병 및 난치성 질병에 대한 늘어난 관심은 기술혁신을 뒷받침하면서 바이오의약품(사람이나 다른 생물체에서 유래된 단백질, 유전자, 세포 등을 원료 또는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의약품)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알츠하이머병, 유방암, 간질, 당뇨병, 만성골수성 백혈병 등 여러 난치병의 원인이 유전자 돌연변이에 있음을 밝혀내는 등의 중요한 성과도 있었다.

인간 게놈 초기지도를 완성한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 현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원장은 "게놈 지도를 이용하면 2020년까지 유전자 조작 인간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도 이런 성과를 어느 정도는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10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개개인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어렵다"며 말을 바꿨다(2011년 2월 11일 자 <동아일보>, '인간게놈 지도 발표 10년… 유전자치료-진단 어디까지 왔나').

▲ <백 투 더 퓨처2>, 네이버 영화 '포토 예고편' 중.

사람들이 1985년 <백 투 더 퓨쳐2>를 보며 2015년을 상상했듯, 2015년 현재 사람들도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의 의료가 퇴행성 질환과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희망에 부푼 기대보다는 그 방향성에 있어서 우려할 부분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영화 <선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치병을 가진 환자의 가족들은 "집도 없고, 춥고, 마약에 취한…더 잃을 게 없는" 피실험자들의 사망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범죄에 동참하고 진실을 은폐하는데 일조한다. 마이릭 박사는 몇몇 희생으로 수백만 명이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공리주의 명제를 통해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줄기세포 치료의 현실을 보자. 2001년 희귀병에 걸린 이스라엘 소년이 러시아에서 몇 차례에 걸쳐 타인의 태반에서 유래한 신경줄기세포 주사를 뇌와 척수에 맞았지만, 오히려 암이 발병했다. 2010년 한국의 모 바이오 기업의 성체줄기세포를 투여 받은 한국인 환자 두 명은 법망을 피해 일본에서 시술받은 뒤, 사망했다. 2013년에는 모 대학병원 세포치료센터에서 임상시험과정의 줄기세포 치료제를 투여받은 환자가 증상이 악화돼 숨지기도 했다.

유전자 치료도 마찬가지다. 1990년에 처음 연구를 시작했지만, 임상적으로 성공한 전례가 거의 없다. 1999년 미국에서는 유전자 결함으로 병에 걸린 제시 겔싱어(Jesse Gelsinger)라는 18살 소년이 유전자 치료를 받다 나흘 만에 다수의 장기가 마비되면서 숨졌다. 2000년 프랑스에서도 '버블보이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중증면역결핍증(SCID)을 치료하기 위한 유전자 치료 임상시험 과정에서 환자 9명 중 4명이 백혈병에 걸렸고, 이 중 1명이 사망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유전자 치료를 받은 유아 한 명이 백혈병에 걸린 사실이 2008년 확인됐다(2014년 8월 25일 자 <프레시안>, '줄기세포 치료'받은 그 소년은 왜 암에 걸렸나?).

물론 <선택>에 나온 '극단적 조치'(영화의 원제는 'Extreme Measures'이다)와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방법은 생명과 윤리에 대한 문제인 만큼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미 사고를 겪은 미국과 유럽은 유전자 치료가 환자에게 미칠 잠재적 이익이 잠재적 위험을 웃도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임상 적용을 승인한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아직까지 인간 유전자 치료 제품 판매를 허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히려 유전자 치료제와 줄기세포 치료제에 대한 임상시험 기준을 완화하는 추세다. 전 세계에서 품목 허가가 난 줄기세포 치료제 6종 중 4종은 국내에서도 허가를 받았다. 한국은 이렇게 산업적 측면에서 자본의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맞춰 한 경제신문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을 하루빨리 개정해 바이오치료제 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라고 주문했다(2015년 8월 25일 자 <한국경제신문> '바이오기업 내쫓는 꽉 막힌 생명윤리법').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의료기술이 이윤추구라는 시장원리 아래서 새로운 자본주의 시장화, 신(新) 성장 동력을 추진력으로 삼을 때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실험대상이 되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선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목적이 수단을 잠식했을 때, 그 맹목성이 가져올 위험이다. 외형적으로는 선의의 모습을 띠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자본의 자기 욕망에만 몰두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여담 하나. 이 영화는 영국인 의사가 미국의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설정인 만큼 영국과 미국 의료 체계의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약 처방이나 병원비와 관련한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영화를 직접 보면서 깨알 같은 재미도 느껴보기 바란다.

화면 갈무리. ⓒgoogle.com ">
▲ 병원에서 누군가 계속 "No! No!"라고 소리를 지르자, 레지던트(오른쪽)는 가이(왼쪽)에게 "이건 무슨 소리죠?"라고 묻는다. 가이는 "모르지, 아마 자기 진료비 계산서를 봤나 보지"라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의 의료체계가 다르다'는 의미의 블랙 유머다. 영화 <선택> 화면 갈무리. ⓒgoogle.com


참고문헌

- KDB 산업은행 기술평가부, '바이오의약품 기술 및 산업동향', 2015
- 건강권실현을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6차 투자활성화대책 중 보건의료분야 대책의 분석과 문제점', 2014
- 국가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 '바이오의약품 기술개발 동향', 2010
-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줄기세포치료제 개발 및 규제 동향 2014', 2015
- 오일환, '줄기세포치료제 동향 및 전망',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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