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연대' 대변인이었던 고(故) 권문석 3주기를 맞아 아르바이트 노동자 수기 공모전이 진행됐다. 우수상 2편과 장려상 2편이 선정됐다. <프레시안>이 이들 작품 가운데 일부를 독자에게 소개한다.
타지로 대학을 가지 않았던 나는 여전히 가정에 묶여 있었다. 집이 잘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가정은 내가 독립하는 것을 경계했다.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모든 예속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지만 가정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구하려는 시도를 보일 때 마다 그것을 막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런 규율을 따르며 살았는지 싶지만, 지금까지도 수많은 한국인들은 원치 않는 가정의 규율에 묶여있다.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의 규율을 따라야 하고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려는 시도는 가정의 규율에 의해 차단되는 순환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최대한 가정의 규율을 완화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이든 것은 독립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조금이라도 돈을 벌면 매일매일 마주하는 이 부당한 분노를 잠재울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보았다. 일하는 시간이 짧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끝에 나는 지역의 한겨레 신문 배급소로 찾아갔다. 신문 배급소는 만성적인 인력부족을 겪고 있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새벽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일을 시작했다.
새벽 2시 40분에 일어나서 3시까지 집근처의 신문 배급소로 가면 배급소 사장님이 신문들을 구역별로 나누고 계셨다. 한겨레신문 배급소라고 해서 한겨레만 취급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한겨레>가 많긴 했지만 그냥 특정 구역의 대부분 구독신문을 배달하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구역의 신문들을 수레에 넣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것들을 모두 배달해야 했다. 처음 일을 시작하기로 한 전날 오후에 내가 맡은 구역들을 돌아보며 노선을 미리 정해둔 다음 그것대로 배달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약 6시쯤 되었다.
일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역시 날씨였다. 여름이었기 때문에 소나기의 가능성이 늘 존재했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한 우비가 구비되어있었고 신문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포장하는 장치도 있었다. 비가 예보되어있을 경우 미리 신문들을 모두 포장해 놓아서 큰일이 없었지만 문제는 갑자기 오는 소나기였다. 신문이 포장되어있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신문으로 미리 여러 겹 쌓아놓고 그 위에 우비를 덮어놓아야 했다. 그런 비닐과 우비를 늘 휴대해서 갑자기 비가 오더라도 신문을 젖지 않도록 대비해야 했다.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 처음 3일은 재미있게 일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턴 역시 지루함이 생겨났다. 그래도 그 일을 계속해나갔던 동력은 아주 적당한 운동이 된다는 사실과 밤의 고독감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데서 비롯되는 모든 불쾌함을 마주할 필요가 없었다. 각종 진상 손님들을 마주해 분노를 억누를 필요도 없었고 상관과 기업에게 나의 영혼을 팔며 내가 얼마나 상품성 있는 인간인지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오직 신문들을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
더불어 신문배달을 하는 사람은 근면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편견은 약간의 자부심도 가지게 해주었다. 신문배달이 끝나면 내가 원하는 신문을 가져갈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한겨레>만을 보았다. 지금은 <한겨레>의 특정소수정치세력을 배제하는 태도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경향>을 더 읽는 편이지만 그땐 대선도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한겨레>에 대한 선호가 강하게 있었다.
다양한 신문들을 배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신문들의 1면을 비교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지만 그 때는 더 한국사회 언론의 왜곡과 기득권 친화적 태도가 아주 큰 사회적 해악으로 느꼈었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보며 끝없는 절망감에 일주일을 앓았던 한국 사회의 청년으로서 나는 <조선>, <중앙>, <동아> 세 언론사들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비교해보면 그렇게 크게 이상한 주장들로 가득 차 있진 않았다. 동의할 순 없지만 인정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이 발휘되는 시점은 특정한 정국이 왔을 때 나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주장들을 주요하게 다룰 때였다. <조선>이 그런 때가 더 잦았고 <중앙>과 <동아>는 가끔 그랬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 세 언론사보다 더 심한 것이 경제신문이라는 사실이었다. <매일경제>, <한국경제> 두 신문사는 매일매일 나로서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주장들을 1면에 내보냈다.
그렇게 매일매일의 신문배달에 익숙해졌을 때 쯤 나에게는 한가지의 압박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근로기준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왜 사람들이 근로기준 위반을 신고하지 않는지 의아했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이길 것이 뻔한 싸움을 왜 지레 포기하여 자신이 정당히 받아야 할 몫보다 적게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대략 2주일쯤 되던 날 나는 과연 어떻게 근로계약서를 받아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결코 내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강한 믿음에 의해 간신히 근로계약서를 써달라고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다. 사장님께서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으셨다. 전혀 모르시는 눈치였다. 나는 내가 결코 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는데, 학생의 성실성을 평가하는데 그런 서류가 필요하다는 거짓말로 둘러대었다. 사장님은 그러느냐면서 오후에 배급소 경리에게 찾아가 도장을 받으라고 했다. 그 때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노동자는 약자였다. 정당한 권리들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르바이트가 가족들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직업과는 질적으로 다르니 딱히 권리를 옹호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누구나 같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사람의 맥락에서는 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존재한다. 생활에 오는 타격은 다를 수 있지만 해고의 위협을 상시적으로 느끼는 것은 같다. 그리고 그 위협에 의해 자신의 마땅한 권리보다 사용주와의 원만한 관계에 더 신경 쓰게 되고 자연스럽게 근로기준법의 위반을 알고도 침묵하게 된다.

아르바이트생이 부딪히게 되는 대표적인 근로기준법 위반사안은 근로계약서 미작성과 최저임금일 것이다. 신문배달의 경우 자신이 배달하는 가구 수에 비례해서 임금을 받았다. 즉 자신이 일한 시간에 비례해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저임금 기준에는 못 미쳤다. 자신의 임금이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아르바이트생이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그 일의 좋은 점을 찾는 것이다. 이 일은 그래도 이런 점이 좋으니까 하면서 자신이 받는 적은 돈을 스스로 정당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일부러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나는 계산결과, 내 임금수준이 간신히 최저임금을 맞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들을 위주로 배달해 조금 더 임금이 높았던 탓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주휴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2시간 40분씩 일을 해 일주일에 15시간 이상 근무했기 때문에 나는 주휴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일이 끝나고 신고하면 당연히 나는 그동안 밀려있었던 주휴수당들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 때 당시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고 아마 굳이 신고해서 싸움을 만드는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몰랐다는 사실보단 싸움에 대한 부담이 더 컸을 것이다.
내가 마음을 먹고 내가 혹시 놓쳤을 권리를 찾겠다고 생각했다면 근로기준법을 더 꼼꼼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법을 어기고 있는 것은 사용주다. 법을 어기고 있다는 부담감과 불안함을 느껴야 하는 것은 사용주인데, 그 조차도 아르바이트생이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줄 법을 사용주보다 더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신문배달을 하는 사람은 다른 일을 하기 힘들었다. 3시에 일어나기 위해 나는 무조건 9시에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일을 마치고도 몇 시간 더 자야했다. 그 때문에 하루가 이틀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방학이 끝나면서 신문배달 일을 그만두었다. 확인한 것은 신문들에 대한 생각들과 왜 아르바이트는 근로기준법을 멀리하는지에 대한 이유, 나에게 주어진 약 65만 원가량의 임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돈을 좀 번다고 해서 가정에서 내가 평화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커다란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계속 가정의 질서 안에서 살았고 다음번 겨울방학에도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전단 배포, 현수막 내붙임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변화는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는데, 동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보다 훨씬 더 심한 압박 속에서 살았다. 내가 10시 전까지 집에 도착하지 않을 경우와 동생이 그렇지 않을 경우는 너무나 달랐다.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던 사실은 내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동생이 심판대에 설 때마다 가정의 기준이 옳다고 말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더 신경써야 한다”는 식의 소리에 마지못해 맞장구를 쳐야 했다. 어느 날 도저히 이 역겨움을 참지 못해서 나는 그날도 나에게 던져진 “그렇지 않냐”는 질문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가정은 우리를 불효자식으로 규정짓고 추방령을 내렸다. 나는 두 번 다시 고민하지 않고 독립을 결심했다.
정말 다행인 점은 내가 지방에서 대학을 다녔었기 때문에 자취방 원룸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분간 고시텔로 간 다음 학교를 휴학하고 동생과 함께 돈을 벌면 어렵지 않게 적당한 원룸을 구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약간의 행운이 더해지면 누군가 당장 집을 비워야 해서 보증금 없이 바로 들어가 약 2~3개월 지낼 수 있는 원룸을 구할 수 있다.
그 이후 나와 동생의 삶은 명백하게 더 나아졌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관계, 정치적 지향, 삶의 태도를 추구하는데 그 누구의 허락도 맡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는 우리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기 때문에 얼마 안 가 동생은 휴학을 했고 나는 자주 수업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결심하게 된 것은 취업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정의 기대를 충족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내 20대 시절을 10대 때처럼 또다시 속박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아무튼 생활은 유지될 만큼 벌 수 있었다. 아끼고 아껴서 월세, 공과금, 통신비를 내면 살 수는 있는 돈이었다. 물론 이 돈조차 대학을 다니면서 벌기란 힘들었다.
이런 삶의 기준이 대단히 사회경제적으로 강요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달관세대라는 표현에 분노하지만 아무튼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다.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는 게,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이나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인생보단 더 낫다고 느끼고 있다. 누구에게 변명할 필요 없이 내가 정말로 아끼는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의 기대를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할 필요도 없다.
진심으로 내가 이 사회를 위한 일이라고 느끼는 일을 하는 데에 다른 사람의 걱정을 내가 고려해야 할 필요도 없다. 예전부터 알바노조의 존재를 알았고 이들의 주장에 찬성해왔지만 조합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 이런 것이었다. 물론 모든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들은 단순히 개인적 이유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장하는 방향이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더 이득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내가 이렇게 활동을 하기까지의 이유는 무엇보다 자유를 위한 독립의 과정 때문이다.
최저임금 1만 원이라는 알바노조의 구호에는 다양한 근거가 있다. 최저임금 제도에 대한 사회경제적 힘의 대립에 대한 이해, 그것이 불러올 파급효과에 대한 검토와 가치판단 끝에 나온 주장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주장에 동감하고 적극적으로 외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오직 원치 않는 가정의 규율에 속박된 모든 청년, 청소년들의 자유 때문이다.
이들에게 소득이 보장되어서 그만큼 더 자유가 확대되었으면 한다. 전공인 경제학 수업을 들을 때 느끼는 실망감은 경제학이 이런 청년들의 상황에 전혀 공감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최저임금 제도가 아르바이트생의 일자리를 줄이고 이것은 더 낮은 임금에도 일하고 싶어 하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경제학 교수들의 시장체제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크나큰 배제를 느낀다.
약간의 준비과정을 거치면 조금 더 나은 직업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사정이 나을 뿐 본질적으로 대기업, 공무원처럼 안정적이고 임금이 높진 않을 것이다. 최저임금의 수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아르바이트라고 불릴만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사람으로부터 왜 그렇게 취업에 대해 비관하느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아직 나는 젊은데 왜 취업을 못할 것이라 생각하느냐면서 말이다. 이에 대해 내가 낙관하는 것은 취업의 가능성이 아니라 내가 알바노조 활동을 열심히 해서 모든 아르바이트생의 처지가 개선되어 아르바이트도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대답했다.
알바노조 활동을 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조합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생로서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한국 사회에 많았고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앞으로 한국사회에 아르바이트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의 삶이 결코 임시적인 것, 없어져야 할 것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이들도 살만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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