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창설 50주년을 맞았다. 미소냉전의 기운과 베트남전의 열기가 아시아를 짙게 휘감고 있던 1967년, 힘 없고 가난한 동남아 5개국이 결성한 아세안이 불과 반세기 만에 강대국들이 앞다퉈 구애하는 지역협력체로 우뚝 설 줄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세계 3대 시장을 앞세워 5대 경제권을 형성하고 중국, 남아시아와 더불어 최고 성장지역으로 각광 받는 아세안이 이룩한 경제적 성공은 매우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세안을 경제와 시장으로만 보는 시각은 아세안이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 일궈낸 눈부신 성과를 간과하고 있다.
아세안은 미국, 중국, 유럽 등 세계 강국들은 물론이고 일본, 인도, 호주, 한국 등 지역의 주요국까지도 다양한 형태의 협력 기제를 만들어 그 중심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협력관계에 있는 역외국가들이 이른바 '아세안중심성'을 수용함으로써, 아세안의 국제적 위상은 강대국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크게 높아졌다.
나아가 아세안은 수립 이래 단 한차례도 회원국들이 상호 전쟁을 벌인 적이 없다. 식민통치, 독립, 냉전, 내전의 시기를 거쳐오면서 수백만 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던 동남아에서 지난 반세기동안 전쟁이 사라졌다는 점은 경제적 성공보다 수천, 수만 배 값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태국과 캄보디아가 며칠동안 우발적으로 총격전을 벌인 것을 제외하면 사소한 무력 충돌조차 없었다.
혹자는 이것이 탈냉전의 효과라고 할지 모르지만, 모든 세계 종교가 혼재한 동남에서 '문명충돌'로 인한 회원국 간 전쟁도 일어나지 않은 것도 아세안 덕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지난 14일 아세안+3(APT·ASEAN Plus Three) 정상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 청와대
그렇다면 벌써 30년 가까이 제대로 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북핵 문제를 아세안에 대입하여 풀어 볼 수는 없을까? 만약 남북한이 아세안에 동시 가입할 수만 있다면 북핵 문제는 물론이고 70년 묵은 한반도의 전쟁 위협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남북한의 아세안 동시 가입은 무력에 호소하지 않은 평화적인 방식이며, 압박이나 강요에 의존하지 않은 자발적인 선택을 전제로 한다. 무엇보다도 폐기 직전에 놓인 6자회담, 미국이 거부해 온 북미 간 직접 타결,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 원유공급 중단 등, 지금까지 시도되거나 제안된 방안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보장과 유인책이 한국은 물론이고 북한에게도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회원국들이 핵무기를 개발, 제조, 거래, 보유, 사용하는 행위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1997년 발효된 동남아비핵지대(SEANWFZ) 협정과 2007년 선포된 아세안헌장에 명시되어 있으며, 매년 개최된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천명되고 거듭 확인되어 온 바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과 핵폭탄 실험을 하고 있는 북한조차 공식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아세안은 회원국의, 그리고 회원국들 상호 간,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의 하나로 삼고 있다. 1976년에 발효된 동남아우호협력조약(TAC)는 이 원칙을 아세안뿐만 아니라 아세안이 중심이 된 아세안+3(APT)이나 동아시아정상회의(EAS)의 가입조건으로도 내세우고 있으며, 아세안회원국 10개 국을 포함한 전세계 30개 국이 서명한 조약이기도 하다. 조약의 내용 중에는 내정불간섭을 포함하여 영토주권 존중, 평화적 분쟁 해결, 무력 사용 및 위협 금지 등도 명시되어 있다.
북한이 아세안 가입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은 핵무기 개발이요, 얻을 수 있는 것은 국가 생존과 체제 보장일 것이다. 만약 미국이 침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면 핵폭탄 개발을 중단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아세안 가입은 북한에게 미국으로부터 불가침 약속이나 보장을 받아내는 부담을 덜게 해 줄 수 있다. 아세안은 다자적 집단안보체제의 성격을 가질 뿐 아니라, 미국이 아세안을 쳐들어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세안이 주창한 TAC는 북한에게 지금의 개인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해 주고 체제 변화를 꾀할 시간을 벌게 해 줄 것이다.
아세안은 지구상에서 북한에 가장 덜 적대적인 지역으로서 회원국 10개국 모두가 북한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베트남이나 라오스는 유사한 공산국가이기도 하다.
남북한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여 한반도를 핵무기와 전쟁의 위협에서 구해낸다면,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한 공로는 아세안의 국제적 위신과 위상을 더욱 높여 줄 것이다.
아세안이 지역 개념의 외연을 확대하거나 회원국의 범위를 동남아 밖으로 넓히지 못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 아세안을 설득하는 과제는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과 정부의 인식 전환과 적극적인 아세안 외교 추진 의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제재와 대화, 미국과 중국, 4강 외교와 6자회담 사이를 오가며 수십 년을 낭비한 우리의 통일외교도 이제는 아세안 남북 동시 가입과 같은 전향적인 방안을 고려해 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영원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한이 함께 아세안의 문을 두드리자.
* 신윤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겸 동아연구소 소장은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및 사단법인 한국동남아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했다. <인도네시아의 정치경제>와 <동남아문화 산책> 등이 주요 저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