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남녘 섬진강가에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 화가의 일손이 바빠졌다. 봄은 겨울 가지 끝에 매달린 꽃망울뿐 아니라 캔버스를 수놓는 화가의 손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민정기 화백을 만났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작업실 입구까지 마중 나온 선생님의 머리에도, 내 머리에도 어느덧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볕이 너무 좋지요. 나이 들수록 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처음엔 설레다가 나중엔 아프기도 합니다. 계엄과 산불 등 속상한 일이 많았지만 새봄의 자태를 어떻게 화폭에 잘 담을지 걱정입니다." 노(老)화가도 숨죽여 봄을 기다려왔나 보다. 차를 내어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이 진달래처럼 붉다.
민정기 화백은 2017년 경기도 양수리 두물머리의 안자락인 부용리에 새 작업실을 마련했다. 1987년 양수리의 산속 농가에 정착한 선생님은 2000년대 중반 경기도 장흥과 고양시로 옮겨 창작활동을 하다 다시 양수리로 돌아왔다.
"전문적인 작업실은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많았습니다. 냉난방에 신경 쓸 것도 없고 주위 환경이 좋아서 산책하거나 생활하기 좋았어요. 무엇보다 창작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익숙해지니 창작 의욕이 떨어져서 서둘러 양수리에 새 작업실을 마련한 것이지요."

문인들이 작품 구상을 위해 여행을 하고 환경이 낯선 곳을 찾아 집필하듯 화가에게도 늘 새로운 자극과 환경이 필요하다. 민정기 선생님이 쉬지 않고 답사를 다니고 작업실을 옮기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일 것 같다.
양수리 작업실에는 봄빛 가득한 캔버스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봄처럼 화사한 캔버스를 보면서 '미소는 미소를 부르고, 슬픔은 슬픔에 답한다'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격언이 생각났다. 민정기 선생님은 예전에는 주로 자연에 초점을 맞춰 그렸는데 요즘에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 살아가는 모습을 주로 그리고 있다고 한다. 말씀을 듣고 보니 30여 년 전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 작품은 눈부신 산과 그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강, 휘어진 소나무와 활짝 핀 진달래가 주요 소재였는데 어느 순간 자연을 경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들이 빼곡히 캔버스를 차지하고 있다.
민 선생님께 화가가 되신 동기를 물었다. "저는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졸업한 서울시청 앞 초등학교에 다녔지요. 2학년 때 남산에서 열린 미술대회에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운동장에 홀로 서 있는 큰 느티나무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저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미술반에 들어갈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제가 다녔던 서울중학교는 고등학교와 미술반이 통합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미술가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이지요."
1972년 대학을 졸업한 뒤 숙명여고와 선화예고 미술교사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정치적 탄압과 경제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당시 미술계에 1970년대 후반부터 '민중미술'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손장섭, 오윤, 민정기, 강요배, 안규철 등 신진 작가들과 젊은 미술평론가들로 구성된 동인 그룹 '현실과 발언'이 결성됐다. 특히 선화예고 동료 교사였던 오윤과의 만남은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들, 동네 이발소에 걸릴 듯한 투박하고 통속적인 민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민정기 선생님의 <포옹>, <세수>, <과일장사> 등이 대표적인 그림이다. 민 선생님은 1984년 제5회 '현실과 발언'의 '6.25전(展)'에 황석영의 소설 <한씨연대기>에 나오는 에칭(etching·금속의 표면을 부식시켜 원판을 만드는 판화 기법) 연작 13점을 출품했다. 그림일기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이 작품들은 남북분단이 몰고 온 정치적인 억압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고발한 내용으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하지만 민정기 선생님은 1987년 갑자기 서울을 등지고 양수리 농가에 터를 잡았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이 갑자기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며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고 선언했듯, 민 선생님도 오롯이 나만의 자연을 표현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양수리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신 곳으로 성묘를 오가면서 깊은 산과 뛰어난 풍광이 마음에 들었고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됐다. 주말이면 카메라와 이젤을 들고 양수리 주변의 고동산, 통방산, 팔봉산, 매화산 등을 답사하며 웅장한 자연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이때부터 민정기 선생님은 '산의 화가'로 불리게 됐다.


2000년 초반 그의 그림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형님처럼 모셨던 최종현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와 전국을 답사하면서 풍수지리에 눈뜨게 된 것이다. 단순하게 느껴졌던 자연에서 전통적인 자연관을 깨닫게 됐고 이를 그림에 적용하게 되었다. 이에 미술평론가 최민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민정기 화백의 작품세계를 '빛, 공간, 길'이라고 요약하면서 "그는 일반적인 풍경화라는 형식적 틀 속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담고자 시도하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14세기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천재 화가 '조토 디 본도네'에 대해 미술사가들이 '미술의 혀를 풀어주었다'라고 평가하듯 선생님의 화풍도 평면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마치 시인이 시를 낭송하듯 눈뿐 아니라 귀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연륜과 안목이 쌓여 민정기 선생님은 2006년 화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화가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2024년 양평 군립미술관에서는 '민정기 아카이브전-놓치지 못하는 풍경'이 열렸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의 삶을 고발한 초기 사실주의 작품에서부터 자연을 표현한 그림들, 그리고 도시의 품격과 잊혀진 장소에 대한 향수를 담은 다양한 작품이 전시됐다. 지난 4월에는 통영 앞바다에 펼쳐진 쑥섬과 당포항 등 통영의 풍광을 담은 전시회가 열렸다.
민정기 화백의 최근 작품에 대해 백지숙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본 것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민 화백은 보고 걷고 느끼는 모든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한다. 이런 노력이 40년을 훌쩍 넘기면서 1980년대와 2020년대의 급변한 풍경이 나란히 그림 속에 나타난다. 민 화백은 그림을 통해 자신이 본 것이 우리가 걸어온 시간의 경로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대표작 <북한산> 앞에 섰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악수를 나누는 남북화해의 상징이 된 작품이다. 판문점 남측지역인 자유의 집에 <북한산>을 설치한 것은 사상 처음 남쪽 땅을 밟는 북측 최고지도자를 서울의 명산인 북한산으로 초대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세계인이 주목한 것은 회담보다 이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민 선생님은 북한산을 골골이 답사한 뒤 수많은 영봉 사이로 삼천사 다층석탑과 마애불, 사모바위까지 골골이 새겨 놓았다. 북한산의 굽이치는 연봉과 능선이 파란색 용들로 뒤엉켜 꿈틀대듯 웅장하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1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화단에서는 이 그림이 비록 서양화지만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의 전통을 이은 대표작으로 평가한다.
남북정상회담 때의 감동을 물었다. "작가로서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정말 보람을 느꼈지요.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남북 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너무 아쉽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백두산으로 달려가 통일을 준비하는 기록물로 웅장한 모습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민 선생님은 조근조근 말씀하시고 말없이 웃으셨다. 평소 조용한 성품이지만 술잔이 서너 배 돌고, 취기가 오르면 어디서 그런 흥이 나는지 술상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시곤 한다.
2006년 영화 <비단구두>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우연히 인사동을 지나다 여균동 감독을 만났습니다. 새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며 불쑥 출연을 요청했습니다. 대학 시절 추억이 생각나 덥석 승낙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영화 내용은 치매 노인이 고향인 가짜 개마고원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김정헌 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으로부터 "민정기 화백이 서울대 재학시절 미대 연극반 배우로 활약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아들 성욱 씨가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평소 낯가림이 심한 선생님에게 연극 무대는 또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양평만 해도 답사 다닌 곳도 많고 사진과 관련 책자, 고지도 등 여러 자료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많이 변한 것과 아직 변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옛 모습을 좀 더 유기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작업실 한쪽에 선생님이 쓰시는 붓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색의 연금술사인 선생님을 통해 새롭게 탄생할 작품들을 기대하면서 선생님과 푸르메재단의 인연을 되새겨 보았다. 2006년 9월. 민정기 선생님은 푸르메재단이 첫걸음을 뗄 무렵 <채송화>와 <연못> 등 당신의 판화 40점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비에 보태라고 기증해 주셨다. 2012년 푸르메센터를 세울 때에는 가평군 설악면의 봄 풍경인 <묵안리의 봄>(330x240cm)을 직접 그려 선물로 주셨다.

푸르메재단 건물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묵안리의 봄>이었다. 많은 분이 민정기 선생님의 대작이 푸르메센터 로비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이 작품은 2022년 여주 오학동에 발달장애 청년들의 일터인 '푸르메소셜팜'이 세워지면서 그 안에 있는 카페 '무이숲'으로 이전해 방문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재단 회의실에도 민정기 선생님의 다른 작품인 <오대산 비로봉>이 걸려 있다. 민 선생님은 '푸르메'가 순우리말로 푸른 산을 뜻하는 만큼 이 작품이 푸르메재단을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며 기증해 주셨다. 아들 성욱 씨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연출한 연극 <올모스트 메인(Almost, maine)>의 수익금 전액을 푸르메재단에 기부해 줬다. 푸르메재단과 민정기 화백 부자의 아름다운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기대한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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