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귀농해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에 정착한 주민 최기철(50) 씨. 지난 3월 경북 산불로 4년 전 새로 지은 집을 잃었다. 작년부터 원금을 갚기 시작해 17년 남짓 상환기간을 남겨둔 터였다.
이밖에 20평 창고와 하우스 50평, 농업용 화물차와 농기계·기구 전체, 사과밭 1800평, 자두 1100평도 잃었다. 산술적인 피해액만 약 5억 9000만 원가량으로 추정된다. 사과나무는 10년은 키워야 안정적인 수확이 가능하기에, 다시 농사를 시작해도 소득을 바로 회복할 순 없다.
과거 기사를 찾아보면 희망보단 절망이 앞섰다. 일상과 농사를 회복하기는커녕, 빚의 굴레로 빠질 위험이 더 커 보였다. 정부 정책에 따른 직접 지원금은 전소 가구에 최대 3600만 원까지만 지원이 되는 주거비가 거의 다였다. 나머지는 모두 저이자 대출이었다. 1년 후 미상환 시 이자는 연 8%가 붙는다. 여기에 민간에서 지원되는 성금이 추가됐다.
최 씨가 공개석상에서 피해 사례를 증언하는 이유다. 지난달 19일 점곡면에서 만난 최 씨는 "피해를 반복해서 얘기하는 건 참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좀 더 나은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얘기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려는 경북산불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4개 지역에선 산불피해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의성은 아직 대책위가 꾸려지진 않았으나 문제의식을 느낀 주민들이 각자의 마을에서 초동모임을 꾸리고 방향을 모색 중이다. 지난 19일과 24일 의성군 단촌면, 점곡면에서 만난 주민 4인이 제안하는 대안을 종합해 봤다.
"국가 예산, 뭐라도 아껴서 지원금 늘리자"
익명을 요구한 단촌면 재난대책위원회 구성원 A(60대) 씨는 "단기적으론 제한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쓸 방법을 찾자"고 했다. 정부의 지출 총액을 늘려서 지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과제가 될 수 있기에 "당장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해보자"는 것이다.
현재 추가경정예산안을 심의하는 국회에 하는 주문이기도 하다. 각 부문에서 낭비성 예산을 줄여 지원금을 마련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림청 산불재난특수진화대 노조는 이번 산림청 추경 예산안의 일부 고가 장비 구매를 지목해 "쓸모없는 장비를 사지 말고, 예산을 아껴 피해 회복에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단체들은 임도 신설 및 긴급벌채 사업을 대폭 줄이고 이 예산을 피해자 지원에 전액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사촌1리의 박기(69) 이장은 "이재민 가슴에 못을 박은 나쁜 선례" 중 하나로 경북도청의 재난지원금 지급을 들었다. 경북도는 이번 산불 5개 피해 지역에 주소지를 둔 모든 주민에게 월 30만 원씩 지원금을 줬다. 피해 주민들에게 지원했다면 1인당 1000만 원가량은 지급할 수 있는 예산이었다. 박 이장은 "호미 하나 없는 농가는 작은 농기계라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라며 "이런 게 되풀이돼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수요 신속 조사해야... "읍·면·동 주민자치 기구 활용"
A 씨는 "현장이 다 공급자 중심으로 돌아가 주민들의 불편이 한둘이 아니"라며 "피해 당사자 중심으로 행정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임시주택만 해도 가구마다 가족 구성이 다른데, 8평 주택 하나를 일괄 책정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A 씨는 "이후 고쳐지긴 했으나, 대학생, 초등학생 자녀 둘과 함께 사는 4인 가구가 처음에 8평 주택 하나를 배정받은 사례가 있었다"며 "6평, 8평, 10평 등으로 다양화할 수도 있는 거고, 공급자 중심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씨는 "실질적인 금융지원"을 강조했다. 현재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대부분은 '1~2년 저이자 대출 후 원금 상환' 방식이다. 그러나 농민 상당수는 중장기적인 상환계획을 갖고 이미 빚을 내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단순히 무이자로 잠시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피해 규모에 따라 상환일과 이자율을 조정하는 맞춤형 금융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품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주민 간 갈등이 격해진 마을도 여러 군데다. 점곡면에서도 행정기관이 다량의 후원물품을 대피소에 쌓아만 두고 분배는 제대로 하지 않아, 주민들이 물품을 가져가는 과정에서 '누가 더 많이 가져갔다'는 식의 오해가 쌓여 싸움으로 번진 적도 있다.
구계리 주민 김아무개(60대) 씨는 또 "수건, 샴푸 이런 물품은 과도하게 들어와 쌓이고 실생활에 진짜 필요한 물건은 또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 등 후원되는 물품의 양 편차도 크다"며 "대부분 노인들인데 90 사이즈가 들어온다거나, 'XXXL' 사이즈가 들어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단촌면은 이를 주민자치 조직으로 일부분 해결했다. A 씨는 "면사무소가 피해 현황 조사를 한다고 업무가 마비돼, 초반엔 후원물품 배부가 제대로 안 됐다"며 "그때 이장협의회, 바르게살기 운동본부, 체육회, 의용소방대 등 주민 자치 조직이 나섰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단촌면 재난대책위원회를 꾸려 마을 단위로 피해 가구 현황과 수요를 파악해, 주민과 면사무소 사이에서 후원물품 분배와 자원봉사 배정을 조율했다.
A 씨는 "행정의 한계가 명확한 지점이 있다"며 "재난 대피도 그렇고 이후 대책과 회복 과정에서도 읍·면·동 단위 주민들의 적극적인 결합이 필요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피해 지원 특별법' 가장 바라지만... 기본소득 아이디어도
핵심은 주거 대책이다. 20평 집을 지으려 해도 최소 1억 5000만 원가량이 소요될 수 있는데, 현행 재난안전법대로면 10~20%밖에 지원이 되지 않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관심과 불만이 가장 집중된 쟁점이기도 하다.
김 씨는 "임시주택을 할 지, 안 할 지, 한다면 어떻게 할 지 등 선택권이 없이 그냥 주어진다"며 "선택권을 다양하게 주고, 임시주택에 7000~8000만 원 정도 소요된다 들었는데, 임시주택을 안 하는 사람에겐 그 금액을 지원금 형태로 도와주는 방안은 없을까"라고 의문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 영덕군 산불피해자대책위원회 등에선 '산불 피해 지원 특별법' 제정의 형태로 지원 규모를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김 씨는 "예산이 당장 획기적으로 늘어나는 게 어려워지면, 차라리 마을회관을 대폭 확충해서 짓는 건 어떨까"라고 말했다. "약값도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임시주택도 사지 못할 확률"이 높은데, 차라리 요양시설을 흉내 낸 형태로 마을회관을 증축해 독거노인들이 공동 주거를 할 수 있게 지원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다.
최 씨는 "노동자에게 최저임금과 실업급여 같은 안전망이 있듯, 농민에게도 기본 안전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해 농민들은 다시 농사를 시작해도 3~10년의 재배 기간이 필요하고, 제한된 농기계로 인해 농사 규모도 줄어 소득을 바로 회복하기도 어렵다. 근로기준법처럼, 경제기반을 상실한 농민을 보호하는 내용의 농민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안동 피해 주민의 가족인 김아름 씨는 지난 30일 <일다>에 글을 써 "농사를 짓기 위해선 농기계·기구, 모종, 비료 등 큰 비용이 필요하고 피해 농민들은 이 모든 것을 빚을 내서 시작해야 하며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로 수확을 장담하기도 어렵다"며 "실제 물가를 반영한 보상과 함께, 피해자에게 재난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일상 복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A 씨도 "산불 재난은 미래에도 계속 일어날 수 있는데 (지원 방식을) 기존대로 계속 유지하면 되는가"라 물으며 "장기적으로는 총액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A 씨는 정부, 국회 등을 향해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지금까지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이라며 "이 고리를 끊으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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