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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MZ·말벌 동지의 시작점, '남태령'의 핵심은 존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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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연대하는 MZ·말벌 동지의 시작점, '남태령'의 핵심은 존중이었다

[X세대가 만난 광장의 MZ] ① ‘남태령 대첩’ 겪고 ‘벼락 활동가’ 된 향연 김후주 씨

'X세대가 만난 광장의 MZ' 연재를 시작하며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이 한 문장이 광장에 울려퍼진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하늘과 땅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린 꽃들은 유달리 싱싱하게 빛을 발했고, 늘 찬바람 불고 추웠던 그곳이 더 이상 춥지 않았다. 광장에 봄이 온 것이다.

이 한 문장을 듣기 위해 4개월을 광장에서 보낸 이들이 있다. 때론 빛나는 응원봉으로, 때론 형형색색의 깃발로, 때론 무지개 머리띠나 빨간 노조 조끼로 상징되었던 이들. 그러다 어느 북풍한설 몰아치는 찬 새벽엔 그것이 아스팔트 위 은박담요나 간이텐트나 침낭이 되었던 이들의 대다수는 20, 30대 청년이었다.

의문이 생겼다. 대체 왜 이들이?

극심한 양극화와 불안정한 노동, 소위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불리는 기회의 박탈. 앞선 세대가 만들어 놓은 '이런' 세상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는 이들로선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의 제 앞가림이 우선일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X세대다. 80년대의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뜨거운 광장도, 2000년대의 개인 존중 문화도 경험해보지 못한 딱 '낀 세대'다. 해서 앞뒤로 고개가 숙여지기 일쑤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지켜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선배들에겐 존경을 표하느라, 살인적인 생존경쟁 속에 싸우고 있는 청년 세대에겐 세상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데 한몫 한 기성 세대로서 미안해서.

고리타분한데다 아무 자격도 없는 X세대 아줌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이 몹시도 궁금했다. 12월 초 여의도에서 형형색색의 응원봉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온갖 깃발로 광장에 축제와도 같은 활기를 불어넣고, 동짓날 남태령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내고는, 이후 말벌 동지로 '진화'해 외롭게 싸우는 이들에 연대해 동지가 되고 친구가 된 사람들.

MZ는 개인주의적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지난 겨울 광장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이들이었다. 이들은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아니며, 이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장은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장을 통해 세상에 눈 뜬 청년들은 장애인, 노동자, 농민, 참사 유가족 등 확장된 '자신들'과 연대하러 오늘도 집을 나선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일지 모르는 작년 동짓날의 '남태령 대첩'. 전봉준 투쟁단 소식을 실시간으로 X(구 트위터)에 올려 사실상 '남태령 대첩'을 이끌어낸 주역인 김후주 씨 인터뷰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지난해 12월 21일, 과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남태령에 전국에서 올라온 수십 대의 트랙터가 모였다. 내란 수괴 윤석열 구속을 촉구하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등이 결성한 '전봉준 투쟁단'이었다. 투쟁단은 이곳에서 광화문 촛불집회 장소까지 행진하겠다고 신고했으나, 경찰은 10중의 차벽으로 막아섰다.

트랙터 유리문을 부수어 운전자를 끌어내리고 농민을 때리고 밀치는 등, 농민 집회에서 으레 발생하던 폭력이 또다시 벌어졌다. 투쟁단 총대장인 하원오 전농 의장이 광화문 집회에 참석해 상황을 알렸고, X(옛 트위터)에 현장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이날 저녁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어 밤새 남태령을 지켰다. 유튜브로 라이브 방송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보낸 후원물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밤새 현장 상황을 시청하며 안타까워하던 이들이었다. 결국 경찰은 이날 오후 차벽을 열었고, 트랙터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까지 행진했다. 1박 2일 대치 끝의 승리. 농민의 트랙터 투쟁이 최초로 서울 입성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남태령 대첩'이라고 불린 이날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한 것은 X에 현장 상황을 계속 올려 시민들에 알린 김후주 씨다. "남태령이라는 불벼락을 맞고 난 후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이후 '남태령' 세 글자가 쓰인 깃발을 들고 매일 광장으로 나갔다. 겨울부터 봄까지, 광장은 그의 일터이자 활동무대였고 집이었다.

후주 씨의 본업은 충남 아산에 있는 유기농 배 과수원 '주원 농원' 대표다. 농장을 비운 동안의 일은 어머니가 도와주셨지만, 농사철엔 제 밭을 돌보는 그는 엄연히 청년 농부다. 하얀 배꽃을 머금은 꽃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봄날의 과수원에서 그를 만났다.

▲이번 '윤석열 파면 촉구' 광장의 집회 현장에서 후주 씨가 내내 들고 다녔던 '남태령' 깃발과 함께 한 모습. ⓒ김후주

"제가 전농 회원이거나 이전에 농민운동에 관여했던 건 아니에요. 국회 청년농업인 정책 자문위원이나 민주당 전국농어민위원회 등 농업 정책 관련 활동을 했고, 청년농업인으로서 한국 농업의 문제점을 X에 꾸준히 올리면서 알리려고 노력했죠.

12월 10일을 전후해서 한참 국민의힘과 윤석열 장례식, 근조 화환 보내는 퍼포먼스 등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민주당 농어민위원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전농 관계자분께 건의를 한번 해봤어요. 지금 사람들이 이 광장에 너무 관심이 많은데 농업 쪽도 이슈를 좀 알려야 되지 않을까요. 전농에서 상여 투쟁을 한번 해주시면 진짜 좋을 것 같다고. 그게 시작이었어요."

전농 후원 계좌를 올리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깜짝 놀란 전농에서 후원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해올 정도였다. 전농에서는 이미 트랙터 시위를 준비 중이었고, 상여 투쟁으로 후원을 받아놓고 정작 상여가 못 올라가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다.

게시물을 지우고 상황을 설명한 다음 '죄송하다. 대신 트랙터가 온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더니 사람들은 '트랙터가 오면 더 좋다'며 후원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후주 씨의 X 계정은 전봉준 투쟁단의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전달하는 홍보처가 되었다.

"X, 이번 광장에서 청년 세대의 가장 빠른 소식통"

"이번 광장에서는 X의 역할이 너무나 컸어요. 페이스북 같은 경우 글을 길게 쓸 수 있고 깊은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전파력은 X와 비교할 수가 없어요. X는 유속이 엄청나게 빠르고 리트윗 기능 덕분에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정보 전달이 되니까, 한번 이슈가 되면 조회수가 바로 몇백만 회로 튀어버리는 그런 매체에요.

뉴스도 청년 세대는 TV가 아니라 X로 보는 게 익숙하거든요. X 유저 중에 우리한테 꼭 필요한 뉴스만 추려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레거시 미디어는 현장성을 제대로, 아니 거의 전달하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광장의 스펙터클을 공영방송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MBC 빼고."

20, 30대에서 40대까지 MZ 세대의 청년층. X의 주요 유저가 이들이고, 이번 내란 시기 X를 통해 광장의 소식을 가장 빠르게 퍼 나른 것도 이들이다. 이들이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장 빨리 받아보기 위해 이용한 매체가 X이고, 후주 씨는 그중에 전봉준 투쟁단을 마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X 안에서 뉴스 전달자들 간의 일종의 역할 분담이기도 했다.

12월 16일에 경남 진주와 전남 무안에서 각각 동군, 서군으로 나뉘어 출발한 트랙터 행진은 21일 정오께 남태령에 도착했다. 행진은 사방에서 경찰에 포위되었고 강압적으로 저지당했다. 후주 씨의 X 계정은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했고, 저녁 8시경부터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날 오셨던 시민들 중에는 계엄 날 현장에 못 가셨던 분들도 많았어요. '내가 그날은 못 갔는데 오늘은 가야겠다', '농민들이 맞고 있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죄책감이나 부채감으로 오신 분들이죠. 전혀 기획되지 않은 현장이었고, 어떤 홍보도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긴급하게 사람들이 달려온 비상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절박함과 진정성이 다른 곳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무릎 높이의 작은 트랙터 로더(앞면에 흙 등을 퍼올리기 위한 날이 달린 통을 붙인 트랙터)를 무대 삼아 일종의 문화제가 시작됐다. 유튜브 '전농TV' 라이브 방송을 밤새 수만 명이 시청했다. 하필 한 해 중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이었고 체감온도가 영하 십몇 도로 떨어진 밤이었다. 현장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의 후원 물품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난방 버스라는 것이 처음 시작된 것도 남태령이었다.

"핫팩, 보조배터리, 먹을거리, 마실거리, 휴지, 담요, 옷 등 온갖 물품이 쌓인 남태령역 여자화장실 앞은 마트를 방불케 했어요. 전봉준 투쟁단 농민들은 계속 긴급 회의하고 경찰들 움직임에 대응하고 국회의원, 변호사들이랑 소통하느라 여력이 없었고, 그 물품을 전달받아서 정리하고 나눠주는 일은 전부 다……"

"자봉(자원봉사자)들이 하신 거죠?"

내가 끼어들자 후주 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봉이 아니었어요. 그냥 거기 왔던 사람들이 이거 내가 해야겠다, 해서 자발적 자봉화가 된 거죠. '이거 도와주실 분!', 누가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같이 해요' 이러면서 달려왔어요. 전봉준 투쟁단에서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여기, 여기, 이렇게 스팟이 생겨서 물품별로 착착 정리가 됐고 아무 부족함 없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갔어요. 그 물건들을 다 나눠주고도 남은 것들이 버스에 꽉 찰 정도였죠."

넘쳐나는 후원품, '난방 버스' 처음 시작된 남태령

첫 난방 버스 연락도 후주 씨가 받았다. '지금 라이브를 보니까 몇몇 분이 저체온증 증상을 보이는 것 같은데, 그분들은 빨리 따뜻한 곳으로 가야 하니까 난방을 켠 버스를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분은 의료인이었을 것으로 후주 씨는 추정한다. 버스 기사 연락처가 전달됐고,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열의 뒤쪽, 과천 방향도 경찰에 의해 막혀 있다는 것을. 남태령 시민들은 완전히 고립 상태였다.

"그 바로 전에 경찰 기동대가 진압하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때 심정은 분노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와, 우리를 다 얼어 죽으라고 여기다 가둬버렸구나. 약자들 앞에 가장 포악해지는 것이 국가 폭력이고, 이에 대응하려면 결국 차를 빼고 이기는 방법 말고는 없겠구나. 집행부가 경찰을 찾아가 따지고 싸워서 간신히 버스가 들어왔고, 그 후에 푸드트럭들도 들어오게 됐죠."

"배달 음식도 그렇게 들어온 건가요?"

"아, 배달 음식은 좀 다른데 그건 배달원분들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어요. 오토바이니까 그냥 골목길로 막 들어오신 거예요. 경찰이 도로만 막았지 마을로 통하는 작은 길까지 다 막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냥 역 앞에다 툭 던져놓고 갈 수도 있었는데 그걸 굳이 들고 와서 이거 어디다 놔야 되냐, 어떻게 나눠드려야 되냐 물어보신 분들도 있었어요. 택시 기사분들도 '여기 다 가는 길이 있다'면서 요령껏 사람들을 데려다 내려주시기도 하고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후주 씨의 말투에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열기가 묻어 있었다.

"남태령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셨잖아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고요. 남태령이 그렇게 특별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남태령이 특별했던 건 저만의 느낌이 아니에요. 그날 밤 남태령은 진정한 대화의 장, 민주주의 학교였어요. 농민과 비농민 시민들이 서로의 얘기를 하면 상대편은 그걸 온 마음으로, 진심으로 들어줬어요. 학교나 책에서 이론으로 배웠던 것들 있잖아요. 민주주의는 대화가 중요하다, 다수결이 원칙이지만 소수 의견도 듣고 존중해야 한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머리로만 알던 지식에서 벗어나 몸으로 경험한 거죠."

새내기 기자 시절, 한동안 농민 취재를 담당한 적이 있다. 덕분에 익히 봐온 장면들이 있다. 정권이 농민 시위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맞고, 피 흘리고, 죽고. 농민 시위는 순순히 허용되지 않았고, 농민의 목소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의 남태령은 그렇게 늘 폭력적으로 진압되던 농민 시위가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날이었다. 그것은 그 매서운 겨울밤, 오로지 그들을 지키겠다고 달려온 시민들 덕분이었다. 서로의 가슴이 열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작 저는 당시에 상황을 전달하고 안내하느라 정신없었는데, 그곳에 계셨던 분들은 그날 그렇게 추웠는데 오히려 여의도 시위 때보다 더 따뜻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오래된 친구나 가족을 만난 듯 편안해서 다른 데서는 못할 말 여기서는 할 수 있을 것 같고, 얘기하다 북받쳐서 울면 듣는 사람들도 같이 울고, 안아주고. 뒤풀이 집담회에서 그날 현장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겪은 것보다 더 큰 남태령의 의미가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지켜주겠다' 달려온 시민들, 울어버린 농민들

이날 남태령에서는 '자기소개'라는 새로운 전통이 탄생하기도 했다. 자기가 겪고 있는 약자성, 소수자성을 밝히면서, 자신이 왜 여기에 와서 농민들과 연대하고 있는지, 자기가 어떤 폭력을 겪은 사람인지 말하는 것이다. 국가 폭력, 가정폭력, 전세 사기 피해, 성폭력, 성 소수자 차별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자기가 받았던 상처와 농민의 고통이 다르지 않고, 이것은 같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너무도 강한 연대 의식이 서로를 감싸는 현장이었다고 후주 씨는 기억했다. 함께 울었다가 웃었다가 화도 냈다가, 마지막 구호는 항상 '차 빼라'로 끝났다. 그게 반복되면서 연대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러므로 인상이 깊은 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진실의힘'이라고 내란 기간 집회들에서 나온 시민 발언을 기록하시는 팀이 있어요. 그중에 팀장 역할을 하시는 담당자님이 '남태령 시민 발언은 다른 곳의 발언이랑 완전히 다르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살이 떨린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이런 발언이 가능했을까. 저는 오히려 그곳이 열악했기 때문에, 비상이었고 우발적이었고 위험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을 거라고 봐요."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투쟁!' 이번 내란 기간 집회에 나갔던 사람이라면 익숙하게 들은 말일 것이다. 이것도 남태령에서 시작한 것이다. 발언을 마칠 때 구호를 세 번 복창한 다음 '투쟁'으로 끝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윤석열은 퇴진하라! 퇴진하라! 퇴진하라! 투쟁!' 이런 것들. 다 그날 밤 남태령에서 전봉준 투쟁단 농민들이 현장의 시민들에게 가르쳐준 것이라고 한다. 청년들이 서로를 '동지'라고 호칭하는 문화도 거기서 시작됐다.

"농민들이 설명을 해주시는 거죠. 동지는 나이나 직업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같은 뜻을 가지고 투쟁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서로 민주적으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고 차별하지 않는 호칭이라는 것을요. 그 후로 말벌 시민들이 다들 서로를 동지라고 불러요. 저도 제 친구들한테는 야, 야, 이러는데 그 친구들한테는 우리 투쟁 동지, 당근 동지, 이렇게 부르죠."

가장 기억나는 일화를 묻자, 후주 씨는 '알아두겠다'를 꼽았다. X 유저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어떤 농민이 젊은 여성으로 보이는 시민에게 "우리 딸들 너무 수고했어, 감사해요"라고 인사했을 때 생긴 일.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왠지 모르지만 솔직한 대답을 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근데 죄송하지만 저는 딸이 아니에요"라고.

그러면서 갖고 온 깃발을 쫙 펼쳤는데 거기에는 '논바이너리 진짜 계심'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농민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저는 그게 그날 남태령의 핵심이 뭐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논바이너리 분이 '내가 이런 말을 다른 데서는 안 했을 것'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말을 하면 보통 반응이 '겉보기에 여잔데 왜 여자가 아니야, 왜 딸이 아니야' 이런 거니까요. 그런데 나이 지긋하신 그 어르신이, 설사 그게 뭔지 몰랐더라도, 그 친구가 '저는 딸이 아니에요'라고 하니까 더 질문하거나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존중을 한 거예요."

▲ '3.8 세계 여성의날'을 맞아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여성 1만인 선언에 동참한 후주 씨. ⓒ김후주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남태령을 겪고 삶이 바뀐 것은 후주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태령은 많은 이들에게 긴 후유증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말벌 동지들이다.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 지회), 세종 호텔, 구미 한국옵티칼 농성장, 지혜복 교사 농성장 등 올해 초부터 갑자기 온갖 투쟁 현장에 나타나 연대하는 청년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분들 중에는 지난 12월 전까지는 시위라는 것에 나와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남태령을 겪고 나서 무슨 벼락 맞은 것처럼, 지금 제가 벼락 활동가가 된 것처럼 그분들도 갑자기 말벌 동지가 돼버린 거죠."

'말벌'은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왔던 유명한 '말벌 아저씨' 일화에서 따온 용어다. 말벌 아저씨는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하다가도 꿀벌을 괴롭히는 말벌이 나타나면 어디든 뛰어나간다. 그러니까 만사 제쳐두고 현장에 연대하러 간다는 의미로 처음에는 '말벌 아저씨 시민 연대'라고 했다가 줄어서 '말벌'만 남은 것이다.

남태령 직후인 12월 24일 서울 안국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가 열렸다. 평소에는 서너 명이 버티다 쫓겨나곤 했던 전장연 시위에 그날은 200여 명의 시민이 몰려왔다. 이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것은 '남태령'이었다. 평소와 다른 시위 규모에 경찰은 연행을 포기했고, 전장연 관계자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동안 겪은 문제가 너무 화가 나고 답답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들이 남태령에서 조금 배운 거죠. 아, 그냥 가서 연대하면 되는 거구나. 그럼 가지 않을 이유가 뭐지? 그런 분들이 안국으로 갔다가 거통고 조선소로 갔다가 세종 호텔도 가고 무안 공항에도 갔어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런 열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그런 판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거예요."

말벌 동지들 중에 유명한 사례가 있다. 남태령의 추운 밤,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화제가 됐던 채연 씨다. 남태령 밤샘 집회가 끝나고 귀가한 그는 잠도 못 잔 상태에서 그날 저녁 바로 한강진 집회현장에 나갔다. 제주항공 참사가 일어난 무안 공항에서는 3박 4일간 자원봉사를 했다. 다시 서울에 올라온 후엔 꾸준히 광화문 시위 현장을 찾았다. 채연 씨 역시 그전까지는 시위에 거의 나가본 적이 없던 사람이다.

1차 남태령 이후에 향린교회에서 뒤풀이 형식의 집담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채연 씨가 '남태령에서 소고기죽과 팥죽을 맛있게 먹었다. 죽 보내주신 분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자, 그 옆에 앉은 사람이 입을 턱 막더란다. 그가 죽을 보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 이날 모임을 '남태령 향우회'라고 부르는 이들의 인연은 그 후 현장에서의 만남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당시는 대학이 방학이었으니까 대학생들 중에도 자유롭게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급속 말벌화'된 친구들이 많아요. 심지어 이번에 금속노조 거통고 지회에 청년들이 노조원으로 많이 가입했어요. 다들 조선소 입구도 밟아보지 않은, 노조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죠."

노동자가 아니어도 노조원이 될 수 있나. 원칙대로라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면 조직도 변해야 한다. 이번 광장에서 민주노총은 업종, 연령, 지역,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나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누구나노조지회'를 만들었다. 민주노총 조끼와 빨간 머리띠를 맨 청년들이 광장을 누볐다.

'남태령 벼락' 맞고 삶이 바뀐 사람들

남태령은 물론 말벌 동지들이 연대한 투쟁 사업장들, 그리고 여의도, 한강진, 광화문…. 이번 내란 사태 전반에서 단연 눈에 띈 것은 2030 여성이었다. 성별 갈라치기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했다. 이유가 뭐였을까. 후주 씨에게 물어봤다.

"저도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는데, 일단 여성들의 의지가 강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죠.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싸워야 한다는 의식이 굉장히 높아져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투표율도 여성들이 더 높잖아요. 투표 성향도 훨씬 진보적이고요. 그동안 겪어온 사회적 차별이나 폭력에 진절머리가 난 거죠."

윤석열 정권은 대선 때부터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걸었고, 취임 이후 그 기조대로 사회적으로 여성 혐오가 더 극심해졌다는 점을 그는 지적했다. 그러니 이 정권을 끝내지 않으면 방법이 없겠다, 하는 공감대가 여성들 사이에 형성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청년 여성들은 사실 늘 광장에 있었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해 사건 때부터 '촛불 소녀'로 상징되는, 광장에 선 여성들을 우리는 언제나 봐 왔다. 그러나 그들을 그저 기특하게 여기거나 이미지를 소비하는 정도를 넘어, 그들의 문제의식이 무엇이며 그들이 받는 차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가 얼마나 귀를 기울였던가.

"저는 서부지법 폭동사태가 별로 놀랍지 않았어요. 언젠간 터질 줄 알았어, 이런 느낌이었달까요. 청년 세대의 심각한 극우화와 파시즘을 우리는 늘 감지하고 있었거든요.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고 살해당하고 딥페이크나 버닝썬 같은 사건이 벌어지는데, 국가와 시스템이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그것의 백래시로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대통령이 이준석으로 상징되는 청년 남성들의 지지를 얻어서 당선됐잖아요."

지난 몇 년간 이 정권에서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여성들이 이번 광장의 주역이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사회 구조적인 폭력에 피해를 당한 것은 여·남이 다르지 않은데, 여성들이 이쪽 광장에 있는 동안 서부지법을 때려 부수는 그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물론 모든 청년 남성들이 다 극우인 것은 아닐 테다. '친구 농사 재도전 향우회 - 2030 남성 지회'라는, 광장에 나부끼던 깃발처럼.

"남태령을 잘 보존해 기록으로 남길 것"

윤석열 파면과 함께 광장의 큰 싸움은 정리됐지만 아직 남은 일이 많다. 당장 눈앞의 대선과 내란 잔당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면, 차차 광장의 목소리를 상시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구나 법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관련된 움직임에 참여하는 한편, 후주 씨는 이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남태령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3회 정도의 심포지엄을 기획했고, 그 첫 행사가 3월 15일에 한국외대 캠퍼스에서 열렸다. 첫 심포지엄은 남태령에 대한 기록을 모으는 아카이빙 작업에 초점을 맞췄다. 다음 심포지엄에서는 이렇게 모인 기록을 바탕으로 남태령에 대한 질적인 해석 작업을 시도하고, 남태령의 또 다른 주인공인 농민들의 증언과 기록도 모아볼 생각이다.

"남태령 이후 시간이 지나고 이 일을 돌아볼수록, 남태령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기대와 상징성이 굉장히 크다는 걸 알았어요. 이것을 하나의 시민 운동의 역사로서 잘 보존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제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최대한 많은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려고 해요. 이번 내란 기간 동안 절망만이 아니라 남태령과 같은 희망의 장면도 있었다는 것을 역사에 꼭 남기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친 저녁, 후주 씨는 짐을 싸서 다시 서울로 올라갈 준비로 분주했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그는 삶의 변화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사회 운동 경험이 전무했던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눈, 비 내리는 광장에서 밤을 새는 것을 보며, 내 안의 무엇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 사회가 주는 온갖 혜택을 독식하고도 가진 것을 잃을까 양심 따윈 저버린 듯한 기득권층과 정치란 것에 대한 염증, 나 하나 힘 보탠다고 무엇이 바뀔까 싶던 냉소주의. 내 안의 얼음이 광장의 청년들로 인해 조금 녹아내린 것일까. 그 온기, 어쩌면 열기를 찾아 다음 말벌 동지 인터뷰로 이야기를 이어 가 보려 한다.

▲ 지난 3월 15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린 '남태령 아카이빙 심포지엄'을 마치고 기념 촬영. ⓒ김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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