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참혹한 사건 사고 뉴스가 끊이지 않고 안방을 파고들어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날 정도이다. 매일 같이 흉악 범죄의 연속이며 패륜적 범죄 또한 줄을 잇고 있다. 마약밀수 사건과 마약투약 사건도 하루가 멀다 하며 보도되고 있다.
여기에다 정치뉴스도 상호비방전으로 치달아 국민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듯하다. 주권자인 국민의 신성한 대리인이어야 할 정치인들이 막말로 파문을 일으키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고요한 명상 속에서 인간성과 순수이성, 참다운 사랑의 길을 깨달아 타고르의 예언처럼 ‘동방의 등불’이 될 수는 없는가?
먼저 뉴스는 인간성의 정립, 순수이성의 회복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뉴스는 여러 단위의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정보를 유통시키는 공론의 장이다.
사건 사고의 보도에 있어서 수단과 과정의 참혹성을 배제하도록 해야 한다. 사건 사고는 극단적 일탈 사례이다. 일탈 사례를 중계방송하듯이 보도하니 우리 사회에서 인간성이 상실되고 더 심한 사건 사고를 유발하는 경향이다. 사건 사고를 보도하되 보도가 주는 여파를 신중하게 고민하자는 것이다.
사건 사고의 원인을 심층적으로 진단하고 공동체가 함께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것은 인간성의 정립이며, 공동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회복이다.
인간성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어릴 적부터 배우고 몸과 마음을 닦으며 세상을 진화시키도록 체화(embodied)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혼자 있을 때에도 광장에 있는 것처럼 삼가고 작은 마음을 누르기를 자동차를 움직이듯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밥상머리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밥상머리 대화는 진지하고 즐겁고 가족들을 격려하며 배려하는 대화이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원리 습득에 주력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 교육은 입시와 취업에만 매몰돼 근본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역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근본이다.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항상 우리의 나침판이다. 사단(四端)은 맹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말한다. 이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이다. 칠정(七情)이란 『예기』와 『중용』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가리킨다.
퇴계는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했다.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했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이제 칸트의 순수이성(純粹理性, pure reason)을 살펴보자. 칸트는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할 경우의 인간의 능력을 순수이성이라 했다. 칸트는 우리의 경험이라든가 올바른 지식(인식)은 외부에서 우리의 감각기관에 주어지는 모든 자극을 우리의 능력(인식능력)이 정리하고 질서있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칸트의 순수이성은 이 같은 인식능력(이론이성), 본능·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도덕법칙을 정하는 순수이성(순수실천이성)과 인식하는 이론이성을 합친 순수이성, 이론이성(직관하는 힘―감성, 생각하는 힘―오성(悟性), 생각된 것을 소수의 원리로 통일해 나아가는 힘―이성) 가운데에서 오성과 이성을 가리키는 것 그리고 가장 좁은 뜻에서의 모든 지(知)를 소수 원리로 정리해 나아가는 힘으로서의 이성(理性으로 나눴다.
여러 고전과 퇴계, 칸트 등을 소환하는 취지는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근본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하는 데 있다.
결국 홍수처럼 쏟아지는 일탈 사례에 흔들리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잡고 더불어 함께 살자는 것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축복처럼 순수이성을 회복하고 동방의 등불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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