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흐름이 미국 정치에 후행할까, 선행할까? 트럼프 전임인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일까? 문재인일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번째 임기에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한국은 문재인 정부 때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거대 양당과 대통령제라는 공통점에 기반해 이런 엉뚱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2019년 트럼프에 대한 첫번째 탄핵안이 하원에서 통과됐지만 상원에서 부결되면서 '대통령을 탄핵시킨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 언론에서 종종 등장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퍼트리고 끝끝내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의문은 사라졌다. 급기야 트럼프의 선거 불복이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폭동'으로 비화되면서 한국 정치의 상대적 안정성에 안도했다.
물론 이는 지난해 연말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으로 완전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은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를 침탈하는 폭동을 저질렀는데, 한국은 대통령이 직접 군대를 동원해 의회 침탈을 지시했다. 윤석열 지지자들은 법원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미국 1.6 의회 폭동의 우두머리는 동물의 탈을 쓴 음모론에 심취한 트럼프 맹신론자였다면, 한국의 12.3 내란 우두머리는 대통령 자신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절감했다. "트럼프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인종주의, 약탈적 자본주의, 극우 성향 기독교 등 미국 사회와 정치 저변엔 이미 극우 세력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트럼프라는 정치인은 이들을 결집시키고 활성화시켜서 자신의 정치 자산으로 삼았을 뿐이다.
코로나19 사망자가 100만 명을 훌쩍 넘어 세계 1위를 기록하는 등 실정 때문에 단임 대통령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트럼프가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해 재집권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극우 정치인을 불러낸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미 결집된, 권력의 단맛을 본, 극우의 힘은 흩어지지 않는다. 바이든 정부는 '반(反) 트럼프' 이외 다른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고, 트럼프가 아니라 바이든이 단임 대통령으로 끝을 맺었다.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는 제1기 때 '실패(?)'를 교훈으로 더 막장 정치인이 됐다.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미국 내에서는 '이민자들과 전쟁'을 빌미로 LA에 주방위군, 해병대까지 투입시켰다. LA가 위치한 캘리포니아는 대표적인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지지주)로 개빈 뉴섬 주지사는 민주당 차기 대선주자로 꼽힌다. 현재 트럼프의 모습은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떠오르게 한다. 미국에선 또 "대통령을 탄핵시킨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만든, 또 정반대에서 윤석열을 탄핵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정치적 힘들이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봐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힘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제2의 윤석열'이 5년 뒤에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미국처럼 말이다.
<광장 이후>(신진욱, 이재정, 양승훈, 이승윤 지음, 문학동네 펴냄)는 이런 숙고와 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한국 극우세력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신진욱 중앙대 교수), 광장의 청년들이 바라는 민주주의의 내용은 무엇인지(이재정 윤석열 퇴진을 위해 행동하는 청년들 대표), '2030 남성의 극우화'라는 담론에 대한 팩트 체크(양승훈 경남대 교수), 청년세대의 노동 불안정성이 정치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이승윤 중앙대 교수)에 대한 글이 실렸다.
신진욱 교수는 보수정당과 아스팔트 우파의 결합을 하나의 '소극'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앞으로 훨씬 거대한 '비극'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지금의 현실을 단순히 파시즘이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으로 보기보다는 '파시즘이 탄생해서 자라나는 전체 과정'을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파시즘 발전단계론'으로 보면, 12.3 내란 이후 한국은 6단계 '파시즘 체제' 직전인 5단계(파시스트들이 합법적 정치정당으로 진입)까지 갔다.
이승윤 교수가 제시한 "액화노동"이라는 개념도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액화노동'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노동의 경계가 녹아내려 기존의 법제도로 규정한 노동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로 인해 청년 세대내 불안정성이 커지고, 여기에 젠더 축을 더해 분석하면 청년 남녀 모두 양극화가 심화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청년 남성 가운데 '매우 불안정' 집단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또 노동 불안정성이 사회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관적 계층 인식'과 '사회 이동성 가능성에 대한 태도'를 살펴본 바, 청년 남녀 모두 객관적 불안정성이 클수록 계층 상승 가능성을 비관하는 패턴이 있지만 동일한 정도의 불안정 상태에서 유독 청년 남성들의 비관성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교수는 이런 분석 결과가 2030 남성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여러 담론과 현상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6.3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37.2%가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를 찍었다. 김문수 국힘 후보가 36.9%,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24.0%를 기록했다. 반면 20대 여성은 58.1%가 이재명 후보를 택했고,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도 5.9%나 얻었다. 이재정 대표와 양승훈 교수의 글은 이처럼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선택의 원인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양승훈 교수는 2030 남성들의 아직 유연하고 고정적이지 않은 정치 지향과 정당 지지 성향을 파악해, 이들을 설득해내고 정치 무대로 불러내는 것이 진보 정치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이재정 대표는 광장 청년들의 목소리를 통해 진보 정치가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야 하는지 보여준다.
다행히 6.3 대선을 통해 이재명 정부로 정권 교체가 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당시 윤석열 탄핵 광장을 지켰던 시민들의 힘을 '빛의 혁명'이라 말하며 이들을 위한 정치를 약속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이 바랐던 '압도적 승리'는 6월 3일 하룻밤에 결판이 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2의 윤석열'의 가능성을 뿌리 뽑는 5년이란 긴 여정을 통해 완성되는 게 아닐까. 2020년 미국 선거에서 불어닥친 '블루 웨이브'(민주당 물결)는 4년 만에 '레드 웨이브'로 바뀌었다. 한국 정치가 미국에 앞서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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