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현 씨를 기억하는 지인, 동료들은 그를 'FM', 즉 정석대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동료끼리 급하게 뭘 부탁해도 김 씨는 절차를 우선해 '고지식하다'는 핀잔도 들었다. 원청에서 구두지시가 급하게 떨어져도 김 씨는 반드시 절차에 따른 작업 문서를 남겼다. 사후에라도 지시자 서명을 꼭 받아 놨다.
그래서 김 씨의 산재 사고를 동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작업할 때 안전모, 보안경까지 늘 꼼꼼히 챙기던 그였다. 사고 후에야 그의 업무 기록을 제대로 보게 된 동료들은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까지 원청 지시로 해왔단 사실을 알게 됐다. 사고가 일어난 지난 2일, 김 씨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공개된 자료를 종합해 사고 당일 상황과 그의 업무 환경을 다시 돌아봤다.
원청 일 하다 사고... 카카오톡엔 원청 지시 가득
지난 2일 오전 8시 30분, 김 씨는 원청 한전KPS로부터 첫 작업을 받으며 일을 바로 시작했다. 태안 화력 3, 4호기에 필요한 밸브 4개 표면을 매끈히 다듬는 가공이었다.
"회전부 감김주의."
이날 TBM(작업 및 안전 검토 회의·Tool Box Meeting) 일지는 조금 달랐다. TBM은 작업 팀원이 모두 모여 그날 작업 내용과 위험 요소, 안전 사항 등을 확인하는 회의다. 혼자 일하는 김 씨는 스스로 내용을 적을 뿐, 회의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통은 비어 있는 'One Point 지적 확인' 란에 이날은 '감김주의' 안전 지적이 적혔다. 김 씨가 지난 한 달간 작성한 34개 TBM 일지 중 유일하다. 공사감독인 원청 지시자의 지적사항이다.


김 씨는 오후 1시 10분께 첫 작업을 마쳤다. 카카오톡으로 원청 지시자에게 결과물 사진과 함께 "다 됐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원청 직원은 "애썼네"라고 답했다.
곧이어 두 번째 작업을 시작했다. 태안화력 10호기에 필요한 특수 밸브 핸들(CVP Vent Valve Handle) 제작이었다. 하청업체의 업무가 아닌 원청의 일이었다. 김 씨는 원청이 주문한 형태의 핸들을 만들기 위해 유사한 부품을 깎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씨는 선반 기계 앞에 섰다. 선반은 공작물을 고속 회전시켜 표면을 깎아내는 설비다.
오후 2시 30분경, 김 씨는 780rpm(분당 회전수)을 설정하고 공작물을 설비에 끼워 고정했다. 이후 회전 가동을 시작하자마자 김 씨의 왼손부터 회전체로 빨려 들어가며 상체가 굽혀지고 안전모가 날아갔다. 김 씨는 당시 혼자 일했다. 끼워 넣은 공작물이 기계에 부딪혀 '끽끽'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다른 직원이 달려왔다. 김 씨는 기계에 엎드린 자세로 발견됐다.
김 씨는 양팔과 머리 손상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지난 13일 '다발성 골절에 의한 사망'이라는 구두 소견을 냈다. 충남경찰청과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한국서부발전, 한전KPS 등을 수사 중이다.

'38만 원' 안전덮개 있었다면
김 씨는 당시 작업복, 보안경, 안전모를 모두 착용한 상태였다. 사고 CCTV를 확인한 최진일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 상황실장은 27일 <프레시안>에 "선반 작업 때 (감길 위험이 있는) 면장갑을 착용하면 안 되는데, 작업 전 장갑을 벗어 놓는 장면까지 확인했다"고 밝혔다.
대책위에 따르면, 김 씨는 단면이 원형이 아닌 납작한 타원형의 공구를 선반 '척'에 끼워 넣었다. 척은 공작물을 고정하는 부속장치로, 3개가 동심원상에 있는 '연동척'과 4개가 직사각 형태로 놓인 '단동척'이 있다. 3개 연동척은 동심원으로 조이는 구조 탓에 원형, 정삼각형, 정육각형의 공작물을 고정할 때 주로 쓴다. 그 외 불규칙한 모양은 단단히 고정하기 어렵고, 이럴 땐 '4개 단동척'을 쓴다. 즉 타원형 단면 공구를 고정해야 했던 김 씨에겐 단동척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전KPS 기계공작실 선반엔 연동척밖에 없었다. 단동척은 창고에도 없었다. 최 실장은 "공작물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정하게 회전하면서 사고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제동 장치가 설치돼 있긴 하나, 회전체 근처에 있는 작업자가 바로 제동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비상 버튼은 작업자의 왼쪽에 팔을 뻗어야 할 거리에 있었다. 왼팔이 감겨 들어간 상태에서는 누를 수 없었다. 기계 가장 아래에 발로 누르는 '풋브레이크'가 있지만, 기계에 휘감긴 사람이 밟을 수 있지는 않았다.
감김과 끼임은 선반 작업에서 일어나는 대표적인 산재 유형 중 하나다. 작업복 외 다른 복장과 장갑 착용을 금지하는 이유다. 위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안전 덮개'가 국제적으로 권장된다. 아예 덮개로 작업자와 회전체 사이를 차단해 감길 위험을 낮추는 것이다. 안전 덮개는 시중가 38만 5000원으로 검색된다.
해당 설비엔 안전 덮개는 갖춰지지 않았다. 공구를 깎는 동안 떨어져 나가는 '칩'이 튀지 않게 방어하는 덮개만 설치돼있었다.

업무 몰라, 관리도 안해... 사실상 인력 파견업체?
'그는 왜 넓은 기계공작실에서 홀로 근무했나? 왜 고정장치가 미흡함에도 작업을 해야 했나? 그는 누구의 지시를 받았나? 왜 그의 안전을 관리하는 감독자는 아무도 없었나?'
대책위가 이번 사고를 조사하며 던진 질문이다. 대책위는 안전장치가 미흡하다는 직접적 원인뿐 아니라, 다단계 하청 구조에서 파생되는 관리적 원인과 구조적 원인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대책위는 김 씨가 무리하게 해당 부품을 깎으려 했던 데엔 공사 기간을 맞추려는 원청의 급한 지시가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사고 부품은 10호기 부품이었다. 당시 10호기는 가동을 멈추고 집중 정비를 하고 있었고, 6월 25일이 가동 재개 날짜였다. 그럼 6월 18일까지 정비가 완료돼야 시운전을 돌릴 수 있었다. 특수 공구를 시중에서 구하는 데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에, 김 씨에게 자체 제작을 의뢰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국파워O&M의 23명 직원 중 기계공작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김 씨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발전소 현장에서 일했다. 회사에서 기계 가공·제작 업무를 맡는 직원도 김 씨 혼자였다. 회사는 직제상 기계 1·2·3팀이 나뉘어 있고 김 씨는 1팀 소속이었지만, 중간관리자인 팀장과 현장소장 모두 정비에 능하지, 기계 가공은 문외한이었다.
최 상황실장은 "현장 조사 결과 팀장은 김 씨의 작업 전반에 대해 알지 못했고, 올라오는 서류에 사인만 할 뿐이었다"며 "관리소장도 '단동척'이란 말 자체를 처음 듣는 듯, 기계 가공 지식이 전혀 없었고 기계공작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잘 몰랐다"고 말했다.

김충현은 어느 회사 직원이었나
김 씨에게 업무를 지시한 건 한전KPS 원청 직원들이다. 기계부서, 전기부서 할 것 없이 모두 작업을 지시했다. 원칙대로면, '작업지시서 발행→TBM 회의 진행→승인 후 작업'의 순서를 지켜야 하지만 김 씨는 그렇지 않았다. 김 씨 휴대전화 등을 조사한 대책위는 "상당 부분이 전화, 문자 등으로 작업이 의뢰됐다"고 밝혔다.
김 씨 이전에 선반 기계공을 맡았던 전임 직원은 대책위에 “(작업의뢰서 가져오는 게) 1년에 서너 번? 5%도 안 돼요. (절차대로 진행되는 게) 1% 정도"라며 "(작업의뢰서를) 쓰라고, 쓰라고 해도 안 쓰더라고. 처음 입사해서 시스템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인수인계해 주는 사람도 없고 신경 안 쓰고 해버린 건데, 지금 생각하니 섬찟해요"라고 증언했다.
한 번은 부담을 느낀 김 씨가 작업을 의뢰한 원청 직원에게 '작업지시서를 (하청업체) 소장님께 드리면서 업무 협조를 지시해달라'는 취지로 카카오톡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다.
김 씨가 작성한 TBM 일지에도 원청 지시자의 서명이 확인된다. 원청 직원은 상단 '작업 내용'과 '공사감독' 부분에 자신의 지시 사항과 서명을 기록했다. 팀이 없는 김 씨는 '인원 1명'으로 TBM 일지를 혼자 기재했다. 그는 안전 감독을 스스로 해야 했다.
하청업체에 김 씨의 작업 사항을 알거나 안전을 관리한 사람은 없었다. 원청은 김 씨에게 작업을 지시했다. 김 씨는 과연 어느 업체의 직원이었을까.
지난 5월부터 6월 2일까지 김 씨가 남긴 TBM 34개 일지를 보면, 최소 18건이 김 씨의 업무 범위가 아니다. 한국파워O&M은 태안화력 1~4호기와 7~10호기 등 총 8호기에 대한 경상정비를 재하도급받았다. 18건은 이 범위 밖의 업무였다. 대책위는 "한전KPS가 김 씨를 비공식 인력으로 활용했다"고 비판했다.
회사에서 발견된 '2023년 선반을 사용한 공작물 가공작업 위험성 평가'에 따르면 김 씨의 사고인 회전체 말림 재해 위험도는 20점 만점에 3점이다. 3점은 '작은 위험'으로 '현재의 안전대책을 유지하면 된다'는 뜻이다. 2018년 고 김용균 씨 사망 후 십수 개에 달하는 안전관리 강화 대책이 마련됐으나, 가장 기본적인 위험성 평가 방식과 내용조차 바뀌지 않았다. 한국파워O&M 직원 A 씨는 "현장은 김용균 때와 지금 바뀐 게 하나도 없다"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서류 작업만 대폭 늘었다"고 지적했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는 2019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연속적인 발전 공정을 임의로 분리해 외주화하는 것에 대해 "노동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원-하청 간) 필요한 지시조차 불명확하거나 소극적으로 하게 돼 위험성을 높인다"며 "의사소통도 수평적 교류가 아니라 수직-하방적 구조로 바뀌면서 단절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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