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디어 라이프>(앨리스 먼로, 박근영 옮김, 문학동네)
작가의 13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집과 제목이 같은 단편소설 '디어 라이프'는 "어린 시절 나는 길게 뻗은 길 끝에서 살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기억을 천착한다. 기억을 반추하며 연민 긍지 같은 자신의 감정적 형성을 떠올리고 재확인한다기보다 기억 자체의 불완전성을 더듬는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디어 라이프'는 그녀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이야기이로, 먼로에게 가장 자서전 같은 작품이다.
소설은 화자인 '나'가 고향인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마을을 인용문처럼 회상하며 시작한다. 담백한 시작이다. 대가들에서 예상할 법한 심오함 대신 진술의 평범함이 오히려 첫 문장부터 긴장시킨다. '나는 어린 시절 어디에 살았지?' 독자는 이런 상상과 함께 다음 문장으로 눈길을 옮기게 된다. 집, 강, 언덕, 나무 등 동네 모양과 학교생활을 술회한다. 학교 다닐 때 독일과 전쟁이 선포됐다. 소설의 이 회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헐벗은 캐나다 순상지의 농장을 떠나는 데 성공해" 교사가 되었다. 부모에게 꽤 괜찮은 농장을 물려받은 아버지를 만나 부부가 된 두 사람은, 나의 고향이 된 낯선 곳에서 모피를 얻기 위한 여우농장을 했다.
그러나 시기를 잘못 만났는지 사업은 망했고 아버지는 야간 경비 일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수입이 줄어든 것보다 더 큰 재앙은 40대인 어머니에게 파킨슨병이 발병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재혼했으며 나는 결혼해 밴쿠버로 옮아갔다.
어느 날 고향의 지역신문을 통해 같은 공간의 추억을 공유하는 어떤 이의 기고문을 읽는다. 그 일로 어머니가 생전에 들려준 네터필드 노부인의 방문 사건을 새로 해석하게 된다. 어머니는 노부인을 무섭고 폭력적인 사람으로 기억하며 내가 어렸을 때 집을 '습격'하다시피 방문해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안고 집안에 꼭꼭 숨어 노부인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어머니는 노부인을 무섭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고, 나에게도 같은 기억이 전달돼 남아있다.
기고자의 글을 읽고 이리저리 확인한 결과 그 노부인은 우리 가족이 살던 그 집의 최초 거주자였다. 아마도 그녀는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곳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친선방문했을 수 있다. 기고자는 노부인의 딸로, 원하면 나는 편지를 보내거나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즈음 내가 정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상대는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였다.
자라는 시기에 어머니에게 못마땅한 게 많았고 그래서 이른바 말대꾸를 많이 했지만, 크고 나서 고향을 떠난 뒤엔 "타운이 끝나고 탁 트인 땅이 시작되는 곳이자 일몰이 아름다운 곳인" 우리 집과 어머니가 그립다. 어머니의 임종과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그때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었다.
소설은 평범한 첫 문장에 호응해 모두에 제시한 평범한 듯 심오한 인용문으로 끝난다.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
앨리스 먼로(1931~2024년, 캐나다)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시골 마을 윙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에 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며 웨스턴온타리오대학 영문과 재학 중 단편 '그림자의 차원'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끝에 1968년에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냈고 이 작품으로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총독문학상을 받으며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총독문학상을 모두 세 차례 받았고, 200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을 때는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는 작품의 깊이와 지혜, 정확성을 매작품마다 성취해 냈다"는 극찬을 받았다.
평생 모두 13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다. 2012년 13번째 단편집 <디어 라이프> 출간 이후 절필을 선언하여 <디어 라이프>가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데, 캐나다인으로서 최초이자 단편소설을 주로 쓴 작가의 수상으로도 최초이다. 절필 선언 무렵부터 숨질 때까지 10여 년 치매를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시대의 체호프' 또는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불린다.
절제미 속에 던지는 깨달음
<디어 라이프>는 오랜 작가 경력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자 작가로서 능력이 최고로 발휘된 걸작이란 평을 듣는다. 먼로가 82살 때 생애 마지막으로 발표한 소설집이다.
<디어 라이프>에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쓴 표제작 '디어 라이프'를 비롯, 2012년 오헨리상 수상작 '코리', 언니의 익사 사고 후 평생을 그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여성을 그린 '자갈' 등 모두 14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작가는 마지막 네 단편('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을 '피날레'란 장으로 따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아놓았다.
"이 책의 마지막 네 작품은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작품들은 별도로 구성되었고,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자전적이지만 때때로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이 네 편이 내 삶에 대해 내가 이야기하는 최초이자 마지막ㅡ그리고 가장 내밀한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절필을 앞두고 마지막 소설을 펴내며 단편소설로 인생을 정리한 작가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전에 발표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디어 라이프>는 캐나다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그곳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작은 이야기를 그렸다.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서사의 힘이 강렬해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장편소설을 압축해놓은 듯한 깊이를 선사한다. "먼로의 작품을 읽으면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는 평이 뜻하는 바일 것이다. 평범하고 잔잔한 흐름 속에서 돌출하는 섬광의 요소를 예민한 독자라면 잡아낼 수 있다.
먼로는 "다른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일만큼 끌렸던 것은 없었고, 그러니 내 삶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글을 썼지만, 첫 번째 소설집을 37살에야 발간할 수 있었다.
먼로는 작품을 통해 직접 현실을 고발하려 들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하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작품에 녹여낸다. 작가는 자신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작품을 읽은 독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게 하여 이유를 찾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정제된 흐름을 이끌면서 절제미 속에서 정신의 뒷덜미에 내려친 번개 같은 흔적을 독자에게 남기는 작가이다.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파고들며 때로 어색하지 않지만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적절하게 구사한다. 2013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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