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시대 마지막을 장식한 후백제 역사는 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고려와 쟁패를 벌이다 패망한 후백제 역사 기록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등에 대부분 의존한다.
역사는 승자 중심으로 기록된다. 이 같은 한계를 전제로 남아 있는 기록과 유물, 유적 등을 통해 후백제사를 정립해나갈 수밖에 없다.
지난 5일 전주 후백제시민대학(학장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에서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가 ‘고려보다 강한 후백제의 국력과 군사력’을 주제로 강연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
이도학 교수의 강의를 간결하게 중계한다. 고대국가시대 종말기는 신라와 후백제, 고려가 쟁패를 벌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도학 교수는 신라가 통치권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전이 이어진 시대로 분석하고 있다.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전은 기본적으로 국력과 군사력 등을 바탕으로 한다. 군사력은 원래 인구와 경제력, 그리고 군사들의 사기와 숙련도로 결정된다. 후백제는 사비성 도읍기 백제 영역이나 주민 상황과 겹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동일한 시기 백제 인구는 고구려 말기 인구 69만 7천 호를 상회하는 76만 호였다. 게다가 경제력은 백제가 고구려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진훤대왕은 말년에 자신의 군사가 북군 곧 고려 군대보다 갑절이나 더 많았다고 회고했다.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시대 학자들의 백제 국력에 대한 평가와도 다르지 않았다.
국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후삼국 주도권 장악
진훤대왕은 “서남해로 부임하여 수자리를 지켰는데,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용기가 항상 사졸의 으뜸이 되도록 일하였기에 비장이 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889년 지금의 순천만 일원에서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거병했다. 거병 당시 진훤대왕은 해적 소탕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규군을 거느렸다.
그는 한 달만에 5천에 달하는 병력을 결집시켰다. 이들이 후백제 군단의 주축이 됐다. 이도학 교수는 진훤대왕이 파죽지세로 서남부 지역을 장악한 데는 잘 훈련된 관군 장악과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인구와 물산이 풍부한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후백제 강성 요인이었다.
진훤대왕은 강성한 국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후삼국시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도학 교수는 그 요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해적 소탕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규군 보유, 둘째 항구에 근무하면서 유학생이나 유학승들과 교류해 탄탄한 참모층 확보, 셋째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삼각 교역과 상인들을 통해 경제적 기반 구축, 넷째 빼어난 정치적 안목을 지녔기에 옛 백제 땅에서 ‘백제의 재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주변 세력들을 휘하에 빠르게 포용하면서 정치 세력화에 성공, 다섯째 인구와 물산이 풍부한 호남 지역 기반을 기반으로 한 점 등이 작용했다고 본다.
900년부터 936년까지 후삼국 전쟁 기간 후백제와 고려는 수십 차례 전투를 벌였다. 구체적으로 기록에 남은 주요 전투는 10여 차례 정도이다. 특히 927년 대구 공산 전투, 930년 고창(안동) 전투, 932년 예성강 전투, 936년 일리천 전투 등이 대표적이다.
△조물성 전투=후백제와 고려는 918년~924년까지 전쟁이 없었다. 궁예를 축출하고 집권한 왕건은 시급한 내정 문제에 급급했다. 왕건은 웅진(공주)과 운주(홍성) 등 10여 주현州縣을 후백제에 넘겨 주었다. 진훤대왕은 신라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924년 7월 진훤대왕은 왕자 수미강을 시켜 조물성(경북 의성 금성산성)을 공격했다.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장군 애선을 보냈지만 후백제군에게 살해됐다. 이듬해 925년 10월 진훤대왕이 3천 기병으로 내려오자 왕건 역시 정예 병력을 이끌고 몸소 내려와서 대적했다. 왕건이 패배했으며, 이후 양국은 격렬하게 격돌했다.
△공산 전투=927년 가을 진훤대왕은 신라 경애왕이 왕건과 내통해 사직을 넘기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경주를 급습하고 경애왕을 처단했다. 진훤대왕이 왕건에게 보낸 격서檄書에서도 신라의 종묘사직이 고려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주에 왔음을 밝혔다. 경애왕의 비극을 듣고 왕건은 5천 기병을 이끌고 내려왔다. 그는 후백제군의 귀환로인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군은 오히려 후백제군에게 역포위되고 말았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한결같이 “심급甚急”이라고 했다. 왕건은 몹시 위급한 상황에 놓였고,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몸으로써 막다가 모두 전몰하였다. 공산 대첩 이후 나주를 비롯한 숱한 세력들이 고려에서 이탈해 후백제에 붙었다.
△강주 점령=진훤대왕은 지금의 경남 진주에 치소를 둔 강주를 점령하려고 군사력을 쏟았다. 일진일퇴가 거듭됐다. 928년 1월 강주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고려군이 패하였다. 후백제군이 강주를 포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진훤대왕은 그해 5월 강주에서 지금의 경남 고성으로 양곡을 옮기려 떠난 틈을 타서 기습했다. 고려군은 급히 회군했지만 패했고, 강주장군 유문은 항복했다. 이후 진훤대왕의 둘째 아들 양검 왕자가 강주도독이 됐다. 진주 촉석루 의암 부근에서 출토된 오월국 연호 ‘보정寶正’(926~931) 명문 기와는 후백제 통치의 산물이었다.
△영남 북부 지역에서의 전투=928년 10월 진훤대왕은 부곡성(군위)을 함락했다. 진훤대왕은 11월 고려의 오어곡성(예천군 하리면)을 함락시켜 1천 명을 전사시키고 고려 장수 6명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 진훤대왕은 5천의 중무장한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의성부(경북 의성)를 공격해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다. 진훤대왕은 여세를 몰아 안동과 예천의 중간에 소재한 순주(안동시 풍산면)를 공격했다. 순주의 주민을 붙잡아 전주로 이주시켰다. 929년 12월 진훤대왕은 고창군(안동)에서 고려군 3천 명을 포위했다. 그러자 왕건이 직접 구하러 왔다.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8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섰다. 이후 안동과 청송을 비롯한 30여 개 군현과 동해변 110여 개 성이 고려에 항복했다.
△고려 왕궁 발성勃城 전투=932년 9월 후백제군 선단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접한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후백제 수군은 3일간 예성강에 머물면서 염주(황해도 연안)와 배주(황해도 배천)·정주(개성 풍덕) 등 세 고을의 선박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황해도 연안)의 목마 300필을 빼앗았다. 또한 고려 왕궁을 공격해 왕건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리게 했다. 왕건은 부하 장수의 분전에 힘입어 겨우 탈출했다. 고려 수도에서 한 시대를 진동시킨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해 10월 진훤대왕은 해군 장수 상애를 시켜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격했다. 후백제 수군은 압록강 하구까지 강타하였다.
△나주를 둘러싼 교전 상황=나주羅州는 영산강 유역의 군사·교통 요충지이자 곡창지대였다. 진훤대왕은 903년 나주를 점령, 후백제의 서남해 해상로와 물자 공급 기반을 확보했다. 910년경 고려가 나주 공략을 시도했으나 후백제에 패퇴했다. 그러나 910~930년대 사이 고려는 나주 세력을 잠식하며 차츰 기반을 확대했다. 나주는 후백제의 초기 번영을 가능하게 했지만, 고려가 점차 영남 세력을 흡수하면서 후백제는 서남부 지역에 갇히게 되고, 후삼국 통일의 동력을 잃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됐다.

마지막까지 웅강한 국가 후백제
후백제는 933년 제2차 경주 진공 작전을 펼쳐 신라를 다시금 공포에 몰아넣었다. 934년 9월 진훤대왕은, 중무장한 병력 5천을 이끌고 운주(홍성)에서 왕건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여파로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개 후백제 성들이 고려에 항복했다.
후백제와 고려의 마지막 전투는 936년 9월 일리천(선산‧구미)에서였다. 이 전투에서 진훤대왕은 고려군 진영에 있었다. 그랬기에 대통합이 이루어졌다. 후삼국 역사의 시작과 끝은 진훤 왕이었다.
후백제는 900년 전주 정도 이후 전주를 근거지로 전라도·충청도 남부를 확보했다. 920년대 전성기 때에는 전라도 전역, 청주 이남의 충청도 대부분, 상주와 대구 등 경상도 서부, 진주와 김해 등까지를 영역으로 했다. 당시 고려는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북부를 장악했으며, 신라는 경주 일대만 유지했다. 요컨대 후백제는 한강 이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최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후백제 왕국은 시종 웅강함을 잃지 않았다. 진훤대왕의 사위 박영규 장군이 자신의 아내에게 “대왕께서 근로한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했는데 하루 아침에 집안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에 가서 의탁하였소.”라고 했다. 멸망 시점까지도 여전히 후백제는 강성했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뜻한다. 현전하는 후백제 관련 기록의 왜곡을 반증한다.
연호를 정개正開라 하고 세상을 바르게 열어가고자 했던 후삼국시대의 영웅 진훤대왕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이 절실하다. 진훤대왕에게 씌워진 폄하와 왜곡의 굴레를 벗겨내는 게 시급하다.
오늘날 우리가 후백제역사문화권을 정비하고, 수도인 전주를 고도지구로 지정하고자 하는 뜻도 후백제역사 바르게 세우기에 있다고 하겠다. 역사를 잊어버리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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