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영국의 감옥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수감자들은 짚더미 위에서 굶주리고, 간수들은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게 일상이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한 방에 처박아두고, 술에 취한 수감자들이 도박을 벌이며 난동을 피우는 모습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퀘이커교도 여성 한 명이 런던에 있는 뉴게이트 감옥에 나타났다. 바로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 1780-1845)였다.
"아, 이래서 안 되겠네요"
프라이가 처음 뉴게이트 감옥을 본 순간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마치 청소를 한 달간 안 한 자취방에 들어간 어머니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 이래서 안 되겠네요." 그녀는 곧바로 팔을 걷어붙였다.
사실 프라이가 감옥 개혁에 나선 계기는 참으로 우연했다. 1813년, 미국 퀘이커교도 스티븐 구렐(Stephen Grellet, 1773-1855)이 뉴게이트 감옥의 참상을 그녀에게 전했다. "프라이님, 그곳은 정말 사람이 살 곳이 아닙니다." 구렐의 증언을 들은 프라이는 직접 감옥을 찾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300명의 여성 수감자가 두 개 방에 갇혀 있었다.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침대는 없고, 바닥에는 더러운 짚이 깔려 있었다. 수감자들은 술을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간수들은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형적인 공무원 마인드였다.
혁신적인 감옥 운영법
1817년, 그녀는 '뉴게이트 감옥 여성 수감자 개선 협회'를 만들었다. 이름부터가 진보적이다. 당시 '여성이 무슨 협회를 만들어?'라는 시선이 곳곳에서 날아왔지만, 프라이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남자들이 망쳐놓은 걸 여자가 고쳐야죠"라고 맞받아쳤을 것이다.
프라이의 개혁방식은 혁명적이었다. 수감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교육을 시키고, 성경을 읽게 했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특히 여성 수감자들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술 금지, 도박 금지, 욕설 금지, 깨끗한 옷 입기." 마치 기숙사 생활수칙 같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인간다운 대우의 시작이었다.
프라이는 수감자들을 12명씩 조를 나누고, 각 조에 조장을 뽑게 했다. 자치활동의 시작이었다. 또 바느질과 뜨개질을 가르쳐 수입을 얻게 하고, 그 돈으로 음식을 사먹을 수 있게 했다. 현대의 교정 프로그램이 이때 시작된 셈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아이들 교육이었다. 감옥에는 범죄자가 된 어머니를 따라 들어온 아이들이 많았다. 프라이는 이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다. "이 아이들이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였다. 빈곤의 대물림을 끊으려던 시도였다.
정치인들의 뒤통수와 언론 플레이
프라이의 활동이 알려지자 정치인들이 달려들었다. 로버트 필(Robert Peel, 1788-1850) 내무장관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아, 프라이 여사님께서 하시는 일이 참 훌륭하네요!"
하지만 입으로만 칭찬할 뿐, 정작 예산지원은 하지 않았다. 프라이는 자비로 개혁사업을 이어갔다. 전형적인 '감동 포르노'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정치인들은 프라이의 성과를 자신들의 공적인 양 포장했고, 정작 프라이는 돈 걱정에 시달렸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신문들은 프라이를 '감옥의 천사'라며 찬양했다. 하지만 정작 감옥시설 개선을 위한 세금인상에 대해서는 "국민부담이 너무 크다"며 반대했다. 전형적인 언론의 이중잣대였다.
1818년 하원에서 감옥개혁에 관한 증언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원들은 프라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예산안이 나오자 "재정부담이 크다"며 삭감했다. 프라이는 속으로 "말로만 개혁하면 세상이 바뀌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도 인정한 개혁가
프라이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졌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감옥시찰 요청이 들어왔다. 프라이는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감옥개혁 방법을 전파했다. 마치 21세기의 경영 컨설턴트 같았다.
빅토리아 여왕까지 그녀를 알현했다. 여왕이 "프라이 여사의 일이 참으로 고귀하오"라고 했을 때, 프라이는 속으로 "그럼 예산 좀 더 주세요"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라이의 영향력은 실제로 컸다. 1823년 감옥법이 제정되면서 남녀 분리수용, 수감자 분류제, 교육 프로그램 등이 법제화됐다. 물론 실행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단순한 감옥개혁을 넘어서
프라이는 단순히 감옥만 개혁한 게 아니다. 노숙자를 위한 쉼터를 만들고, 간호사 교육을 실시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보다 먼저 간호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구자였다.
특히 여성간호사 양성에 힘썼다. 당시 간병은 주로 수녀나 하층민 여성들이 담당했는데, 프라이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 간호사가 필요하다고 봤다. 1840년 '간호사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또 호주로 유배 가는 여성 수감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긴 항해 동안 교육을 받게 하고, 호주 도착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어차피 갈 거면 제대로 준비하고 가라"는 현실적 접근이었다.
현실은 시궁창, 이상은 하늘
프라이의 개혁은 분명 성과가 있었다. 뉴게이트 감옥의 사망률이 현저히 줄었고, 폭동도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구조적 문제는 여전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감옥에 들어갔고, 부자들은 법망을 피해갔다. 마치 오늘날과 똑같다.
19세기 영국사회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겉으로는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약자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은 부족했다. 프라이 같은 개인의 헌신에만 의존하는 전형적인 '시민사회 떠넘기기'였다.
더 웃긴 건 프라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점이다. 보수층에서는 "수감자들을 너무 편하게 해준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왜 교육까지 시켜주느냐?"는 논리였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들리는 소리다.
퀘이커교의 힘
프라이의 개혁정신은 퀘이커교 신앙에서 나왔다. 퀘이커교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신성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수감자라고 해서 인간성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게 프라이의 생각이었다.
이런 신념이 프라이를 다른 자선가들과 구별시켰다. 당시 대부분의 자선활동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시혜적 관점이었다. 하지만 프라이는 달랐다. "이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평등의식에서 출발했다.
퀘이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의 역할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달리 여성도 설교할 수 있었고, 교회 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이 프라이로 하여금 당당하게 사회개혁에 나설 수 있게 했다.
21세기에도 유효한 교훈
프라이가 던진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처벌보다 교화, 격리보다 재활."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회에서 감옥은 '응보'의 장소로 여겨진다.
특히 우리나라 교정행정을 보면, 프라이의 정신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한다. 출소자 재범률이 30%를 넘나드는 현실에서, 프라이의 '인간다운 대우를 통한 개선' 철학은 여전히 혁신적이다.
프라이의 접근법에서 주목할 점은 '일자리'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도덕교육만 시킨 게 아니라, 실질적인 기술을 가르쳐 경제적 자립능력을 키워줬다. 현대의 '사회적 기업'이나 '일자리 창출 사업'의 원조 격이다.
또한 아이들 교육에 신경 쓴 점도 인상적이다. 범죄의 대물림을 막으려면 어린 시절부터 개입해야 한다는 현대 범죄학의 관점을 200년 전에 이미 실천했다.
프라이가 남긴 유산
프라이가 죽은 후에도 그녀가 만든 제도는 계속됐다. '엘리자베스 프라이 협회'는 지금도 영국에서 여성 범죄자 재활을 돕고 있다. 200년 넘게 이어진 사회운동의 힘이다.
프라이의 영향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졌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그녀의 방식을 도입했다. 특히 여성교도소 개혁에서는 프라이의 모델이 표준이 됐다.
흥미롭게도 프라이는 여성참정권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정치보다는 실천"이라는 게 그녀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활동 자체가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한 명의 여성이 바꾼 세상
엘리자베스 프라이는 증명했다. 한 명의 신념 있는 개인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를. 물론 그 과정에서 정치인들의 립서비스와 사회의 무관심이라는 장벽을 뚫어야 했지만 말이다.
프라이의 성공비결은 단순했다. 현장에 직접 가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했다. 말만 앞세우지 않고 몸으로 부딪혔다. 전형적인 '현장형 활동가'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프라이 같은 실천가다.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이나 평론가가 아니라,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프라이가 뿌린 씨앗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다만, 물을 주는 사람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년 전 한 여성이 시작한 작은 변화가 오늘날 전 세계 교정행정의 기초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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