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만나고 나서 "10년 전에 만났어야 하는데"라는 혼잣말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좋은 사람이다. "우리가 1년 전에만 만났어도"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나이가 좀 든 축에 속할 테고, 후자의 '우리'는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일 것이다. 여기서 10년이나 1년은 큰 의미가 없다. 늦었지만 서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런 인연을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전과 이후를 선명하게 구분 짓는 사건.
주은경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꼭 그랬다. 3년 전, '60+기후행동(기후 문제 해결에 동참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은퇴자들의 모임)' 교육분과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사전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펴낸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를 접하고 '이런 선각이 있다니' 하며 무릎을 쳤다. 그리고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중장년이 시민 예술가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일러주는 책이 작가를 만나게 해준 가교였다.
같은 점이 많지 않지만 다른 점이 더 많은 것도 아니었다. 주은경 작가는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약하다가(그 시기 나는 시사주간지 기자였다) 대학에서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대학 사회는 내게 친절하지 않았고 50대로 접어드니 적응력도 태부족이었다. 2011년을 전후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교양교육 혁신이었다. 교양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기초학문과 시민교육을 통해 탁월하고 책임감 있는 공동체의 성원을 길러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지쳤다. 대학이란 거대 조직은 기획력은 남다르지만 실행력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느려터졌다. 교양에 대한 고정관념, 분과 학문 간 장벽, 그리고 '그놈의' 형평성과 전례(前例)가 발목을 잡곤 했다. 10년 가까이 '대학이 달라져야 미래가 달라진다'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대학은 달라지지 않았고 미래만 급격하게 달라졌다. 그러던 차에 노년 세대의 '인생 전환, 녹색 전환' 활동(60+기후행동)에 한 발 들여놓게 되었고 거기서 주은경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주 작가의 시민교육에 관한 접근법은 나와 크게 달랐다. 내가 너무 진지하고 엄숙한 반면, 그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시민에게 다가갔다. 내가 거대 담론, 이른바 '문명사적 전환'에 치우쳤다면 그는 시민이 함께하는 소모임을 통해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내가 시민 사회라는 커다란 틀을 우선했다면, 그는 시민 안에서 시민의 힘('시민력')을 북돋우고 있었다. 나 역시 모든 사람은 '시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외쳐왔으면서도 모든 사람을 시인(예술가)으로 만드는 구체적 노하우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주 작가는 자신이 시민 예술가로 거듭나는 동시에, 청 장년은 물론 노년까지 불러 모아 자기 안의 영성과 만 나게 하고 그것을 표출할 수 있도록 촉진해왔다. 춤, 그림, 연극, 글쓰기 등 다양한 장르를 가로지르며 소규모 모둠을 활성화하는 한편 시민을 기획자로 키워내는 데에도 열정을 쏟아왔다. 그가 말하는 '시민력'은, 나에게 시민이 스스로 자기를 성찰하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 역량으로 보였다. 시민의 예술은 시와 소설에 서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해당 분야에서 요구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이뤄내는 엘리트(고급 혹은 순수라고도 불리는) 예술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레테'라고 불리던, 즉 시민이 자신의 탁월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시민 예술이고, 그런 사람이 곧 시민 예술가다. 춤이나 시가 아니어도 좋다. 나는 빵이나 손수건을 만들 때 거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이야기'를 담아낸다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에 이어지는 『나의 오래된 순례, 마돈나하우스』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누구에게나 영성이 필요하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완전 탈진 상태'에서 다시 일어서는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면서 '영혼의 순례는 시간의 길 이가 아니고 경험의 깊이의 문제'라는 명제를 새삼 일깨운다. 작가 스스로 "깊은 순례"라고 밝히고 있거니와 캐나다 동부의 한 작은 마을 컴버미어에 있는 가톨릭 공동체 마돈나하우스는 작가의 이전 삶을 그 이후와 연결시킨 징검다리이다. 굳이 징검다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징검다리가 저쪽(과거)과 이쪽(현재/미래)을 잇기도 하고 끊기도 하는 이중성을 갖기 때문이다. 돌이 너무 멀면 건너기가 어렵고, 돌이 너무 촘촘하면 물길이 막힐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캐서린 도허티라는 영적 지도자를 알게 된 것도 반갑기 그지없지만, 내게 더 깊이 각인된 것은 뿌스띠니아라는 수행 장소다. 러시아정교회가 오래 간직해온 기도 공간. 뿌스띠니아는 러시아어로 사막을 뜻한다는데 작가는 한겨울 캐나다 동부의 오지에서 '마음의 사막'과 마주한다. 난방을 비롯한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뿌스띠니아에서 작가는 "영혼에 맑은 물을 부어주는 시간"을 만끽한다. 도시적 삶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완벽한 혼자의 공간에서 작가는 "소리 없음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내는지"를 깨닫는다. 이 각성을 우리 도시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도시의 그 많고 큰 소음이란 얼마나 큰 '소리 없음'인가.
채 두 달이 안 되는 짧은 체류였지만 작가는 여러 '다른 인생'을 만난다. 우선 마돈나하우스 설립자 도허티. 그의 영적·실천적 삶은 "가난을 자신의 여인이라 불렀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한다"라거나 "친절이 하느님의 마음",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다"와 같은 기도문과 어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청빈, 순명, 순결"로 압축되는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체화하는 수행자들에게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나 자신이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다", "단점과 약점은 같지 않다", "정치와 사회복지 제도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와 같은 아포리즘을 받아 든다. 그리고 '스스로 풀어내야 할 화두'도 가슴에 품는다. "이곳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뿌스띠니아뿐 아니라 단순하고도 규칙적인 생활에서 얻는 깨달음도 곳곳에서 빛난다. 바느질을 하면서 "나의 손이 예술가의 손"이라는 발견을 하는가 하면, 작가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 게스트 때문에 힘들어하는 마음, '직업병'을 되살려 스태프와 수련생을 인터뷰한 내용,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인근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 공동체 구성원들 앞에서 한국 전통무용을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는 장면, 마돈나하우스는 국가나 외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농사와 봉사활동, 보통 사람들의 기부를 통해 자급자족한다는 이야기 등등. 짧지만 깊은 순례 는 독자로 하여금 잠시 읽기를 멈추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해보라고 권하는 듯하다.
작가는 마돈나하우스를 떠나며 "고독과 영성, 단순한 삶과 공동체를 나의 삶에 어떻게 초대할 것인가. 이 질문 하나만은 꼭 잡고 가자"라고 다짐하며 눈물을 쏟는다. 내게 이 눈물은, 배웅과 마중의 눈물로 보였다. 작가의 눈물은 새 출발의 증거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대학과 시민단체, 지역사회에 시민 예술을 뿌리내리기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시민을 초대했다. 마돈나하우스 같은 영성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만큼 서로의 성장을 돕는 즐겁고 친절한 관계망을 만드는 삶"을 구현하고자 새로운 시간을 열어젖힌 것이다.

나는 주은경 작가의 '시민력'을 '소모임력' 또는 '의례 (리추얼)력'과 나란히 놓고 싶다. 시민의 힘은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 함께할 때 배가되고, 소모임에 의례가 녹아들 때 작은 공동체는 영성을 공유하게 된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신학자 정경일 선생이 어느 칼럼에서 말했듯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종교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 종교적 영성이 추구하는 사랑, 자비, 긍휼, 공감, 연민, 연대 등의 보편 가치를 '나'와 이웃 사이에서 추구하자는 것, 즉 사회적(무종교 혹은 생태) 영성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즐겁고 친절한 관계망"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영성은 종교를 종교답게 하고 사회를 사회답게 하는 순결하고도 강력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시민의 일상적 삶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시민력은 국민이나 주민, 소비자 차원에 머물러 있는 보통 사람을 주권자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과 직결된다. 나는 바츨라프 하벨이 주창한 "힘없는 자들의 힘"이 곧 시민력이라고 이해한다. 시민 예술이 자기 성찰과 표현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면, 그 성찰과 표현에는 '나'와 사회 및 국가(들), 나아가 지구 생태계와의 관계를 재발견하는 감각과 사유가 반드시 포함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와 국가, 인간과 인류, 인류와 과학기술, 인류와 천지자연과의 관계를 재정의하지 않는 성찰과 표현은 사회적 영성과 연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글이 길어졌다. 한마디만 덧붙이고 줄여야겠다. 최근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인용하는 글귀가 있다. "인생 최고의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류시화 시인이 자신의 산문집에 쓴 것인데 곱씹을수록 새삼스럽다. 나는 주은경 작가가 마돈나하우스에서 만난 '다른 인생'이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 기대한다.
선물을 받기만 한다면 좋은 시민이 아니다. 선물을 받은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려면 서로 "큰 만남"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주은경 작가가 책 말미에 밝힌 "너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내가 이해받고 싶은 마음보다 큰 만남" 말이다. 이런 만남이 우리를 예술가로 거듭나게 하고, 이런 만남이 우리의 예술을 시민력으로 바꿔낼 것이다.

(책에 발문으로 실린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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