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단연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두 거대양당의 후보가 아닌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였다. 무수한 보도들 안에서 이준석은 '2030남성 극우화'의 아이콘처럼 등장했다. '기득권이 아닌 새로운 정치', '소외받는 남성들'이라는 두 축의 이미지 위에 구성한 그의 가치는 '보수의 젊은 피', '청년 정치인'으로 정당 정치판에 '데뷔'한 경력의 연장선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청년 정책과 젠더 정책으로 드러났다. 청년을 위한 연금 개혁과 여성가족부 폐지. 이준석이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는 '이미 존재하는 성차별을 없애는 새로운 시대'가 아닌, '성차별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논할 가치가 없는 새로운 시대'를 전제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그의 '새로운 정치'는 전혀 새롭지 않다. 그는 변화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삶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청년들, 특히 남성들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희망고문을 재개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가족'을 매개로 유지되는 안티페미니즘이 있다.

"서울의 끝자락 지하철 4호선 종점 상계역에서 신혼을 시작한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회의 중심에 다가가고자 덜 입고 덜 쓰면서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아이는 국비 유학생이 되었고 거대 정당의 대표까지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공정한 대한민국을 신뢰하며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희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어야 합니다.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애틋한 마음, 그것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탱한 정신입니다.
이준석은 이 전통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자녀 세대의 미래를 빚으로 당겨서 가불해 쓰자고 얘기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 이준석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건전한 정책으로 기회의 사다리를 지켜 다음에는 여러분의 자녀와 손주들이 이 자리에 서는 꿈을 지켜내겠습니다."
지난 5월 18일,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경제 분야에 관한 후보자들의 토론회였다. '성장'과 '생산성', '규제 완화' 등 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과 작은 정부론에서 흔히 등장하는 수사들을 특히 강조하던 이준석 후보는 토론회의 마지막에서 '가족'을 꺼낸다. 서울에는 살지만 다소 변두리에서 생활하던 부부가 사회의 주류로 가고자 선택한 것은 절약과 교육이었다. 그 아이는 '국비 유학생'과 '거대 정당의 대표'로 표현되고 있는 '엘리트'가 되어 “공정한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으며, 이것이 “저희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여기서 등장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탱한 정신"인 "애틋한 마음"이다. 더 나은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자 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세대는 "여러분의 자녀와 손주들"이라는 혈연 가족으로만 이어질 수 있다. 즉, 이준석이 단호하게 자신이 이어가고 싶다고 말한 "전통"이란 아이의 교육에 자원을 모두 투입하여 자신의 아이가 '개천 출신 엘리트'로 세상에 나서는 "꿈"이다. 이준석은 이러한 발언을 통해 자신을 대한민국의 '적자'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흔히 이준석에 대한 비판은 '능력주의'와 '여성혐오'로 압축되지만, 이 두 가지가 '가족'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짚어야 하며, 바로 이것이 이준석이 가장 오래 밀고 온 '세대론'을 통해 능력주의와 여성혐오를 통합하는 방식이다.
이준석의 말 안에서 기성 세대는 자녀 세대, 즉 청년들의 몫을 "빚으로 당겨서 가불"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실업이나 주거 불안정 등에서 비롯되는 지금 시대 청년들의 불안을 금융 상품과 세제 혜택 정도로 퉁친 뒤 '연금'의 문제로 압축하면서 세대 갈등을 부추길 때, 청년의 고통은 노인 빈곤과 중년 남성의 높은 자살률 등을 간단히 감춰 버리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가 기성 세대를 청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이기적으로 빼앗아 가는 기생적 존재로 그려낼 때, 특권층이거나 특권층이 될 수 있는 이들만이 각 세대의 얼굴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기성 세대뿐 아니라 청년 세대의 대다수도 그의 안중에 없다. 엘리트와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이들만이 세대 갈등의 무대에 설 수 있을 때, 세대론의 기저에 능력주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청년의 불안을 경제적 문제로 압축하는 것은 성차별을 삭제하는 방식이다. 청년이 '기성 세대가 가진 것을 가져야 했으나 가지지 못한 존재'로 구성될 때, 이들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런 것을 누렸을 이들로 등장하게 된다. 이준석이 막 박근혜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한 2010년대 초반에 청년 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였고, 이들이 살아가는 한국은 '헬조선', 즉 지옥이었다. 하지만 당시 여성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거부'한 것이고, 경제적 불안정이나 취업 시장이 아니라 성폭력, 교제폭력과 경력단절이라는 위협 안에서 연애, 결혼, 출산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또 거부하기를 선택한 맥락이 있었다. 청년의 지옥을 이야기할 때 경제적인 것만을 다룬다면, 그것은 성적, 신체적 위협도 포함하고 있는 청년 여성들의 지옥을 포착하지 못한다.
연금제도 개혁 등을 통해 정치의 핵심을 기성 세대와 청년 세대 간 경제적 갈등으로 환원할 때, 세대론은 여성들이 경험하고 있는 폭력을 부정함으로써 여성혐오를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
결정적으로 '가족'은 이러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봉합한다. 여기서 가족은 미래를 만드는 유일하거나 적어도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고, 무엇보다도 자식을 엘리트로 만드는 수단이다. 문제는 가족의 투자와 개인의 노력으로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엘리트주의적 낡은 꿈으로의 유턴이 '공정한 기회'에 접근하기 위해 가족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준석은 기성세대와 자녀 세대의 갈등 해결을 연금 개혁으로 갈음함으로써 자산의 상속이라는 분배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빚을 내서 결혼하고, 빚을 내서 집을 사고, 거기서 비롯되는 세금 정도에서 혜택을 주는 것이 당연한 그의 세계관에 불평등은 없다. 따라서 청년 세대 안의 경제적 불평등도, 성차별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트가 되지 못한 남성들,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남성들,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남성들도 없다.
아파트를 상속받은 청년과 반지하 월세에서 살아가는 청년 사이의 격차 같은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여지는 없다. 가족을 꾸릴 수 없는 이들이 가족을 꾸릴 수 있게 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가족을 꾸릴 수 있는 이들이 좀 더 편하게 가족을 꾸릴 수 있게 하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다. 불평등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채 남아 '기득권'의 지위는 안전하게 보존된다.
기성 세대를 비판할지언정, 특권과 기득권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2025년 대선에서 그가 호출한 '가족'이라는 이미지는 세대를 매개로 능력주의와 여성혐오를 통합한다. 이것이 안티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자에 대한 증오선동으로 '청년 정치'를 작동시키는 이준석의 회로다.
경제적 불안정과 생애기획의 실패 안에서 이준석은 엘리트주의적 욕망을 "애틋한 마음", "대한민국을 지탱한 정신", "전통", "꿈"과 같은 단어들로 표현하며 가족에 대한 오래된 애착을 상기하고, 이것으로 자신의 정치를 정당화한다. 그가 동원하는 것은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과 정상가족에 대한 낡은 이미지이다.
정상가족은 엘리트의 꿈, 계급 이동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결혼해서 아이를 가진다고 끝나지 않는 꿈이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천에서 살아도 괜찮은 세상과 같은 새로운 생애기획에 대한 구체적 상상이자 그것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가족이 자식 교육에 모든 걸 걸어서 아이를 엘리트로 만드는 '전통' 혹은 '좋은 삶'에서 출발하여 그리로 유턴하는 구태로는 달성될 수 없다.
이준석의 '새로운 정치'는 박정희 정부 때부터 체계적으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유령을 소환한다. 강령술을 멈춰야 한다. 정말 눈앞에서 살아가는 이들, '세대 갈등'의 무대 위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가로막힌 이들을 마주해야 한다. 모두가 뼛속까지 경험하고 있는 불평등을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감내하고 외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희망고문을 재개하는 이는 청년 정치인도, 새로운 비전도 아닌 마흔의 구태일 뿐이다.
안희제 / 문화비평가, 인류학 연구자. <시사IN>, <문화일보> 등에서 칼럼을 연재했다. <증명과 변명>, <난치의 상상력>, <망설이는 사랑>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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