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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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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위대한 유산

[세상을 바꾸는 힘, 나눔] 청년농장 일터를 기부한 장춘순 여사

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 푸르메소셜팜 부지를 기부한 이상훈·장춘순 부부. ⓒ푸르메재단

"살면서 가장 큰 축복은 우리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아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푸르메소셜팜'이 장애인 가족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까 조마조마했다. 농장 부지를 기부한 장춘순 여사가 인사말을 마치고 내려오자 남편 이상훈 회장이 다가가 부인 손을 잡았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유리온실을 짓기 위해 불도저로 밀어낸 벌판에 흙먼지가 일었다. 2020년 10월 여주시 오학동 47번지, 발달장애 청년의 일터를 짓기 위한 여주농장 '푸르메소셜팜' 착공식 현장에서였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이 있다. 겉으로 평탄해 보여도 실제로 그렇지 않은 집이 많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 덕희 씨로 인해 부부의 삶은 뒤틀렸다. "백일이 되면 다른 아이처럼 몸을 뒤집고 옹알이를 해야 하는데 미동이 없었어요. 조금 늦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돌이 되도록 아이가 눈도 안 맞추고 떼도 안 쓰고…. 그때 비로소 '아! 내 아들이 장애를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생의 가장 큰 축복

30년 전만 해도 발달장애라는 개념조차 낯설 때였다. 아이가 커갈수록 부부 간의 갈등도 커졌다. 처음에는 남편이 원망스럽다가 세상이 미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편이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회사에 다니고 있어 경제적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아이의 미래를 고민하던 순간 여주 땅이 생각났다. 건설회사의 임원이던 시아버지가 젊은 시절 차근차근 마련하신 곳이었다. 60년 전 다방커피 한 잔 값이면 경기도 여주에 땅 한 평을 살 수 있었다. 시아버지는 용돈을 줄이고 생활비를 절약해 여주시 오학동에 2만 평이 넘는 땅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부부는 아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결론은 농사였다. 몸은 힘들지만 정성을 다해 작물 키우는 농사는 정직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못한다. 하지만 부부는 남달랐다.

장춘순 여사에게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강한 아들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먼저 강한 부모, 강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아들의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 늦깎이로 재활학과에 진학했다. 선진국 부모들은 장애아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장애인에게 농사가 좋은지, 농사를 짓는다면 어떤 농작물을 재배하는지 유럽의 장애인 작업장과 농장을 찾아다녔다. 유럽의 한 작업장에서 만난 청년은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아들도 이렇게 행복하게 농사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이상훈·장춘순 부부가 운영하던 우영농원 모습. ⓒ푸르메재단

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 위에 열다섯 동의 비닐하우스를 세웠다. 살림집도 컨테이너로 지었다. 남편이 발전소와 대형 선박에 들어가는 정밀계량기 제조회사를 세운 직후였다. 남편은 이른 새벽 서울로 출근했다가 서둘러 퇴근해 농사일을 거들었다. 부부는 전국을 돌며 질 좋은 춘양목을 구해 표고버섯을 키웠다. 수익성 좋다는 인삼의 수경재배도 시도했다. 하지만 농사는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밤늦도록 농업 관련 서적을 읽고 농업대학까지 다녔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농사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4000평 규모의 농장을 가족 세 사람이 운영하는 것은 점점 힘에 부쳤다.

"하루는 수확한 버섯과 인삼 납품을 위해 대형마트에 갔어요. 주차장에 짐을 내리는데 어린 직원이 달려와 '차 빼라!'고 고함을 치는 거예요. 마트에 납품할 농산물이라고 여러 번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농산물을 납품한다고 무시하는구나.' 화가 나고 서러워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 아이가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됐습니다."

판로를 찾지 못한 인삼은 속이 타들어 가듯 조금씩 뿌리부터 썩기 시작했다. 유머를 잃지 않고 묵묵히 버텨주던 남편도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우리의 농장'에서 '모두의 농장'으로

어느 날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푸르메재단에서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해 스마트농장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푸르메재단이 어떤 곳인지 수소문했다.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부도 외면한 어린이재활병원을 시민의 힘을 모아 건립했다고 들었어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요. 이곳에 농장 터를 기부하면 누구보다 잘 지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부부는 푸르메재단을 찾았다. 남편 이상훈 회장이 말했다. "부친이 틈날 때마다 정성껏 나무를 심고 가족의 손때가 묻은 곳입니다. 우리 아이 같은 친구들을 위해 좋은 일터를 만들어 주세요."

▲ 여주시에 건립된 푸르메소셜팜·무이숲 전경. ⓒ푸르메재단

유리온실과 부속건물을 지으려면 큰 기금이 필요했다. 푸르메재단은 함께할 파트너를 찾다가 여주와 이웃한 이천에 자리한 세계적인 반도체회사 SK하이닉스가 떠올랐다. 당시 SK는 최태원 회장의 주도로 환경 및 사회문제 해결, 투명 경영을 기치로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발달장애인의 평생 일터인 농장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ESG가 어디 있을까.

때마침 SK하이닉스 사회공헌 담당자는 김동섭 사장과 박용근 부사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장애인에 애정이 많았다. SK하이닉스가 농장 건립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0억 원을 흔쾌히 지원하면서 장애청년을 위한 일터사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장애인 표준사업장 사업에 여주시와 한국지역난방공사도 동참했다. 부부의 감동적인 사연이 알려지면서 후원하는 시민도 늘어났다.

푸르메소셜팜의 탄생

푸르메재단이 구상한 농장은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의 위험에서 벗어나 온도와 습도, 햇볕을 자동 조절하는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접목한 첨단 스마트팜이었다. 노지(路地)에서 일하는 어려움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생산성이 높았다. 청년들이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치유농장, 즉 케어팜이 결합된 형태였다.

이상훈·장춘순 부부는 농장이 큰 방향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줬다. 처음에는 재배 작물로 딸기를 구상했지만 부부의 의견은 달랐다. 장 여사는 "딸기는 수익성이 높지만, 소근육과 손 신경이 예민하지 못한 발달장애 청년들이 따다가 짓무르기 쉽고 운송·보관도 어렵습니다. 수확과 보관이 쉬운 품종을 선택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그 결과 쉽게 짓무르지 않고 당도가 높고, 식감이 좋으면서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방울토마토가 생산 품종으로 결정됐다. 이상훈 회장은 "아들과 농사지으며 체득한 교훈은 농장이 발달장애인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하고 조언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판로 확보'였다. 값이 오르내리는 농산물시장에 매일 방울토마토를 출하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SK하이닉스가 큰 결단을 내려줬다. 생산된 방울토마토를 이천 및 청주 공장의 직원 간식용으로 구매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남은 물량은 슈퍼마켓과 편의점을 운영하는 GS리테일에서 구매를 약속했다. 안정적인 판로가 확보됐으니 농산물을 잘 생산하는 일만 남았다.

▲ 농장에서 방울토마토를 수확하는 청년들. ⓒ푸르메재단

▲ 카페에서 쿠키를 만드는 청년들. ⓒ푸르메재단

부부로부터 농장 부지를 기부받은 지 2년 만에 어려움을 뚫고 유리온실이 지어졌다. 여주와 양평 뿐 아니라 구미와 평택 등 지방에서도 청년들이 지원하기 시작했다. 입사시험은 면접과 실기로 진행됐는데 경쟁률이 3대 1을 넘었다. "버스를 놓쳐서 늦었습니다. 화장실 갔다 와도 됩니까"와 같이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구두시험과 500g의 토마토를 저울에 다는 실기시험이었다. 양평의 특수학교에서는 재학생이 합격하자 축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농장 안에 북카페 '무이(無異)숲'이 완공됐다. 인간과 자연, 장애와 비장애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바리스타와 제빵사 교육을 받을 청년들도 선발됐다. 이렇게 푸르메소셜팜과 무이숲에서 일할 청년 55명이 채용됐다.

이 중 10명은 여주의 생활시설에 살던 청년들이었다. 일자리를 갖게 되자 여주시에서는 이들에게 두 명에 한 채씩 체험홈(2년간 거주하며 자립 훈련을 하는 지원주택) 아파트를 제공했다. 일터를 찾자 생활시설을 떠나 자립으로 이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집에서 돈 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어느 날 재단으로 소포 하나가 배달됐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해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갈한 손 글씨로 성경을 필사한 세 권의 노트였다. 맨 앞장에는 푸르메재단이 손자와 친구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줘 고맙다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 왼쪽부터 이상훈 회장, 윤여영 할머니, 덕희 씨, 장춘순 여사. ⓒ푸르메재단

이상훈·장춘순 부부의 어머니인 97세 윤여영 할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는 손자 덕희 씨가 일할 수 있는 농장이 세워지자 매일 두 시간씩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성경을 옮겨적으셨다고 한다. 100세의 할머니가 정성을 들여 글씨를 쓰시는 모습이 상상돼 감동이 밀려왔다.

덕희 씨도 입사시험을 잘 치르고 어엿한 직원이 됐다. 다른 직원처럼 명함과 임명장을 받고 기뻐했다. 장 여사는 아들이 첫 출근을 하는 날 체크카드를 하나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장 여사의 휴대전화에는 카드결제 알림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퇴근한 아들에게 "너! 오늘도 물건 많이 샀지? 돈을 물 쓰듯 해서 어떡할래?" 하고 야단쳤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번 돈이니 내가 알아서 쓸 거예요!" 하고 덕희 씨가 소리쳤다고 한다. 장 여사는 이 말을 듣고 "지금까지 살아온 그 어느 순간보다 행복했습니다"하고 말했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덕희 씨 할머니인 윤여영 여사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성경을 필사해 보냈다. ⓒ푸르메재단


처음에는 눈도 맞추지 못했던 청년들이 이젠 출근길에 서로 안부를 묻고 농담을 한다. 어머니께 용돈을 드린다고 자랑하고 월급날이면 서로 떡볶이를 쏘겠다고 다툰다. 일과 동료 간 교류를 통해 사회성이 빠르게 늘고 월급을 받게 되자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

농장에서 나눠준 토마토를 들고 퇴근한 덕희 씨는 "이 집에서 돈 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유세한다. 이 모습을 보며 장춘순 여사는 행복하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하다.

▲ 푸르메소셜팜 전경. ⓒ푸르메재단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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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메재단

지난 2005년 설립된 푸르메재단은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비영리단체다. 2016년 서울 마포구에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 장애어린이의 치료와 재활을 돕고 있다. 현재는 어린이재활병원에 이은 2기 사업으로, 학업과 재활치료를 잘 마치고도 일자리가 없어 고통받는 발달장애 청년들을 위한 일터 ‘푸르메소셜팜’을 완공해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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