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가 성평등가족부로 확대됐다. "구조적 차별은 없다"던 대선후보가 '여성부 폐지'를 1번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이다. 역진(逆進)의 대통령 윤석열은 내란이라는 최악의 경험을 국민에게 선사한 뒤 허망하게 퇴장했고, 그 대통령과 함께 '여성부 폐지'를 정치적 불쏘시개로 활용하던 국민의힘의 구호도 힘을 잃었다. 존폐의 위기에 놓였던 여성부가 '성평등'을 명시한 채 확대·개편된 것은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대한민국 정상화'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다만 진전된 일보가 이보, 삼보로의 전진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합당한 이력과 신념을 갖춘 원민경 성평등부 장관 인선이 시민사회와 전문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지만, 원 장관 취임 전까지 이어진 '강선우 인사 논란'은 성평등부 운영에 대한 정부·여당의 진정성에 의심을 가지게 하기 충분했다. '갑질' 의혹을 제쳐두고, 비동의강간죄·차별금지법 등 민감 사안에 대한 강 의원의 유보적 태도는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확장하는 일이 단순한 간판 바꾸기로 남을 수 있다는 불안을 남겼다.
성평등부 신설과 함께 이어지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의 일부 언행은 이 같은 불안을 더욱 자극한다. 대선 과정에서 '남성 역차별'을 강조해오던 이 대통령은 원 장관과 성평등부에 "남성들이 겪는 차별도 연구해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신설된 성평등부엔 남성 역차별을 담당하는 주무부서가 실제 마련되기도 했다. 원 장관은 청문회 과정에서 이미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소신을 밝혀왔지만, 국정운영의 기조를 정한다는 대통령의 '지시'는 그 정치적 무게감에서 장관 개인의 소신을 넘어선다.
이 대통령의 '역차별' 메시지는 돌발적이기보단 맥락적이고, 그래서 위험하다. '여성이 당하는' 구조적 차별과 '남성이 당하는' 역차별을 동시에 챙기겠다는 그의 말은 말 그대로 '구조'의 문제인 젠더 문제를 단순·수치화된 '고통 따지기'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했지만, 진보와 보수, 여성과 남성, 노동자와 기업을 따지지 않고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대선 슬로건과 맞물려 형식적 당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다시 말하면 우선순위를 정하는 정치의 영역에서, 여성이라는 '일부'의 문제는 '당위적으로' 후순위로 밀려났다.
6월 대선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민주당의 젠더 회피 전략이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20대 대선 당시 윤석열과 국민의힘의 노골적인 혐오정치에 대응해 여성 인권을 강조해온 이 대통령은, 지난 21대 대선에선 젠더 문제를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어진 "청춘남녀의 싸움"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20대 대선의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젠더를 아예 배제하는 방식으로 특정 계층에 호소했다면, 21대 대선의 이 대통령과 민주당은 '모두를 챙기겠다'는 당위 아래 젠더를 '뒤로 미루는' 전략을 취했다.
국민의힘이 주도한 백레시가 불평등 문제인 젠더 '차별'을 가치중립적 의미의 젠더 '갈등'으로 전유했다면, 그 백레시를 반영해 수정·보완한 민주당의 새로운 젠더 전략은 이를 애초부터 사소한 '젊은 애들 다툼' 정도로 다시 격하시켰다. 비동의강간죄·차별금지법·낙태죄 대체 입법 등 민감한 젠더 사안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민생과 경제가 먼저"라는 딱지가 붙어 국정과제에서 탈락했다.
이 대통령은 '모두의 파이를 늘린다'는 큰 차원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모두' 아래 가려지는 '일부'의 모습이 바로 '구조적 차별'의 작동 방식이다. 애초부터 이것은 파이의 성장이 아닌 권력의 분배 문제다.
이 대통령은 '구조'를 겨냥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가 문제의 해법이라는 점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그가 취임 직후부터 강조해온 산업재해 문제는 '모두의 이윤'이라는 대의 아래 작동해온 노동자 착취 구조에 대한 지적이었다. 노란봉투법 등의 제도 개혁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될 때, 대통령이 직접 "사람 목숨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느냐"고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할 때,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이 희생돼선 안 된다'는 사회적 방향성이 세워질 때,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내는 일종의 적극 조치가 실현될 수 있다.
왜 노동문제만큼 신경쓰지 않느냐고, 민생문제만큼 여성문제도 중요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정치는 소위 우선순위의 예술이니 유치해 보일진 몰라도 합당한 질문이다. 그러나 질문의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 여성문제는 노동문제가 아니냐고, 여성문제는 민생문제가 아니냐고 묻는 방식이다. 국민의 반이 겪는 노동과 경제와 폭력과 다른 많은 문제가 여성문제다. 그 문제가 민생(民生)이 아닐 이유가 없다. 모든 문제에 대한 성평등 관점의 확보. '성평등 추진체계', '성 주류화' 등의 이름으로 해외에서 이미 제도화된 사례가 있다.
신설된 성평등가족부가 성평등 전담부처를 넘어 성평등 추진체계를 세울 수 있을까. 강선우 사태와 역차별 메시지를 거치면서, 시민사회에선 성평등부로의 간판 변경이 오히려 전담부처 내 '여성'의 의미 약화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부처 지위가 격상되고 규모도 확대된 게 사실이지만, 정부를 가리지 않고 '초미니 부처' 하나로 여성문제를 외주화해온 오랜 역사를 돌이켜보면 또한 현실적인 걱정이다. 정부·여당이 유력 정치인의 성폭력 문제를 빌미로 그 성폭력 전담부처인 여성가족부를 폐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 게 불과 3년 전이다.
이 대통령의 반복적인 '역차별' 메시지가 자극하는 건 단순히 '지금 역차별이 문제냐'라는 식의 감각적 불편함이 아니다. '모두의 대통령'을 천명한 이 대통령이 성평등 전담부처에 던지는 이 메시지는, 누군가에겐 '모두를 명분으로 언제든 이 문제를 주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암시처럼 보인다. 사소한 문제를 하청 주듯 처리하는 태도론 이 대통령 본인이 "분명히 있다"고 명시한 그 '구조적 차별'을 해결할 수 없다. 정반대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강력한 메시지, 여성부가 탄생하기 전부터 현장의 여성들이 외쳐온 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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