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400kg 무대사고로 하반신마비된 20대 성악가, 그의 죽음이 말하는 것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400kg 무대사고로 하반신마비된 20대 성악가, 그의 죽음이 말하는 것은?

무대장치 깔린 후 하반신 마비, 재활 희망에도 안타깝게 숨져… "산재 의무 가입, 불안정 노동 개선"

"재활을 시작하면 얼마나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재활을 시작했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재활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살면서 잊고 지냈던 말씀을 듣기 시작했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찬양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주 조금이지만 기적과도 같이 몸이 점차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재활에 성공해서 제가 꼭 다시 일어나서 찬양하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21일 사망한 성악가 고(故) 안영재 씨가 지난해 남긴 말이다. 그는 2년 전 무대 리허설 도중 낙하한 중량물에 맞고 쓰러진 뒤 신체 마비 재해를 입었다. 그랬던 그는 지난해 8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 유튜브에 출연해 재활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밝혔다. 그로부터 1년여 뒤, 안 씨는 향년 29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장기간 척추 치료를 받던 중 나타난 약물 부작용으로 알려졌다.

안 씨는 2023년 3월 서울시 오페라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상연한 공연 <마술피리> 리허설 도중 부상을 당했다. 그는 당시 코러스 성악가로 참여했다. 무대 리허설을 끝내고 퇴장하는 도중, 천장에서 400kg(킬로그램)이 넘는 철제 무대장치가 안 씨를 덮쳤다. 안 씨는 "사고 당시 상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사지의 힘 빠짐과 어지러움, 구토 등의 증상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생전 기억했다.

그는 심한 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계속됐음에도 사고 이틀 뒤 첫 공연에도 올랐다. 그러나 계속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사지를 지탱할 수 없었고 구토 증세도 심해져 다음 날 다시 병원에 실려 갔다. 그는 병원에서 '외상에 의한 척수 손상' 진단을 받았다. 외상성 뇌출혈 및 경추 3번부터 6번까지 척수 신경이 손상됐고, 전신 마비 증상을 보였다.

그의 사건은 그가 사고를 당한 지 2년 3개월 뒤인 지난 6월, MBC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그는 해당 보도에서 신체 마비 증세가 계속돼 2년 넘게 휠체어에 앉아 생활했으며, 재활 훈련을 하고 있지만 호흡과 발성이 어려워 노래 한 소절을 부르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또 억대의 병원비를 모두 자신이 부담해야 했고, 산재보험 적용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안 씨와 구두계약을 했던 민간 합창단과 원청 격인 세종문화회관 모두 사고가 안 씨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세종문화회관은 당시 "무대에서 사고가 난 게 맞는지, 무대 사고로 안 씨의 증상이 생긴 게 맞는지 모두 불확실하다"며, "안 씨가 정해진 동선을 지키지 않고 퇴장했다"고 밝혔다.

▲2025년 6월 25일 MBC 뉴스데스크 갈무리. ⓒMBC

안 씨의 사고가 알려지면서, 곧 노동권 사각지대에 처한 공연예술인의 열악한 상황이 다시 공론화되기도 했다.

실제 공연예술인들이 산재 피해를 당했으나 노동법 제도의 사각지대에 처해 어떤 보호 제도도 적용받지 못한 사례는 반복해서 발생해왔다. 2011년 플루티스트 고 김환구 씨는 오케스트라 피트(무대와 객석 사이 구덩이 형태의 공간)가 내려간 것을 인지하지 못해 경기아트센터에서 추락사했다. 2018년엔 조연출 고 박송희 씨가 경북 김천시문화예술회관에서 무대 작업 중 추락사했다.

정부 '공연·예술산업 종사자 산재 현황'에 따르면, 2014~2020년간 공연장에서 발생해 정부에 기록된 산재는 48건에 불과하다. 고용보험 가입자에 한정된 것으로, 예술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리랜서 및 단기 계약 예술인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사망 직후인 지난 24일 오전, 중대재해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 전문가 네트워크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안 씨 사망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공연예술인 산재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들은 "최근 조사에서 예술인들의 고용보험 가입률이 23.5%에 불과하고, 실질 산재처리율은 11.5% 수준으로 매우 낮다는 점이 드러났다"며 "공연예술인의 산업재해보상보험 의무가입이 추진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문화체육부 '공연안전사고 사례집'에 따르면 출연자와 스태프의 추락(37%)과 무대장치 낙하 및 전도(18%)와 같은 재래형 사고가 전체 사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참담한 상황"이라며, 공연장 안전을 각종 법령으로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독일과 달리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과 공연법엔 사고 예방을 위한 통합적·체계적 관리 규정이 미비하다"고 밝혔다.

불안정한 고용구조도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됐다. 통상 오페라 공연의 합창단은 합창단 단장이 해당 공연을 기획하는 오페라단이나 제작자와 하청 계약을 맺은 뒤 공연을 할 수 있는 성악가를 모아 임의로 합창단을 구성한다. 대부분 프리랜서 등의 지위로 단기계약을 맺고, 구두계약만 이뤄지기도 한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망 밖에 놓이게 돼 고용 불안정은 물론, 4대 보험, 작업 안전 등의 안전망에서도 배제된다.

안 씨도 사고 당시 민간 합창단 단장과 구두계약을 맺은 터였다. 산재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 그는 사망 전까지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대재해 전문가 네트워크는 "이런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상시 인력과 장비, 안전관리 체계를 갖추고 공연을 직접 기획·제작하는 ‘제작극장(producing theatre)’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다"며 "외주·하청 중심의 단발성 시스템이 아닌, 예술가와 기술인력을 고정적으로 고용해 안정적 환경에서 공연을 제작·운영하는 형태로, 공연예술의 품질과 안전을 함께 보장하는 핵심 기반"이라고 요구했다.

유럽한국예술인협회 KANE 이사회도 지난 21일 성명을 내 "공공기관의 안전 관리 소홀과 제도적 미비가 초래한 비극"이라며 "서울시 오페라단, 세종문화회관, 그리고 서울시는 예술가의 생명을 지킬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사고 이후에도 책임 있는 사과, 재발 방지 대책, 또는 구조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사회는 이어 "한국 공연예술계는 오랫동안 불안정한 노동 환경과 안전장치 부족 문제를 외면해 왔다"며 "안영재 님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예술가의 안전과 존엄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돌아보게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 비극을 개인의 불운으로 넘길 수는 없다"며 "공연예술계는 예술가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으로 존중받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즉각 행동에 나서야 하며,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우리는 공연예술계의 각성과 유의미한 변화를 강하게 촉구한다"고 밝혔다.

▲중대재해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중대재해 학자 전문가 네트워크가 지난 10월 24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연예술인 산재 사망 추모와 예술인 산재 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중대재해전문가네트워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손가영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