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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은 1세대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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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은 1세대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 입양인 2세 이야기] 여기도, 저기도 아닌 (Ni d’ici, ni d’ailleurs) ②

제 이름은 카밀(Camille)이고, 27살이며 파리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입양된 프랑스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어머니는 1978년, 두 살 때 프랑스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어머니가 입양인이라는 것에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게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었고,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사실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입양이 어머니뿐 아니라 제게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갖는지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한국과의 관계는 언제나 다소 '극단적'이었습니다. 저는 파리에서도 아시아인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자랐고, 십 대 때는 저의 '한국적인' 부분을 지워야 다른 아이들과 더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랫동안 저의 한국적인 배경을 오랫동안 거부하고 외면했습니다. 늘 제게 따라붙던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라는 고정된 시선을 피하려 머리를 염색하고 화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런 거부감은 곧 저의 정체성 탐구로 이어졌고, 이번에도 극단적으로 제가 상상한 '한국 소녀'의 이미지를 닮고 싶어 집착적으로 한국 콘텐츠를 소비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분명 제 어머니와 한국의 관계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자신의 뿌리를 거부하며 프랑스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일상 속에 한국 문화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묘한 자부심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아마도 저는 제가 입양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어머니의 트라우마와 한국에 대한 모순된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흡수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한국에 간 것은 2018년, 그래픽 디자인 공부를 위해 일본에 살 때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애니메이션, 만화책 등 일본 문화에 매혹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일본은 제 주변에서 유일하게 널리 알려지고, 아시아 문화를 대표하던 국가이자 한국보다 훨씬 쉽게 접할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열정은 제 마음 속 한국을 향한 공백을 메우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 마음속에는 한국에 대한 일종의 '수치심'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게 한국은 결국 제 어머니를 버린 나라였으니까요. 아마 무의식적으로, 한국을 외면하고 일본을 향한 열정을 키운 것은 제게 한국이 불러일으키는 복잡한 감정을 외면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에 살며 한국과 가까워졌을 때, 제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유령 같은 유산'이 다시 깨어났습니다. 제 뿌리에 대한 호기심은 저는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찾도록 이끌었습니다.

난생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묘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나라이자, 저를 알지 못하는 나라. 그런데도 마치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처럼 낯선 친숙함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곧 겉모습은 그럭저럭 '한국인'과 비슷함에도,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제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엄습했습니다. 또 하나의 내 '모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한국과의 이질성을 날카롭게 일깨워주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인들의 외모는 사실 혼혈인 저와 다른 부분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한국인이 아니었던 걸까요? 어쩌면 제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제 이야기로 혼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결국 한국에서 태어나고, 입양된 아이는 어머니였지, 제가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한국에서 산 적도, 한국어를 배운 적도, 한국 문화에 속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저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질문, 해소되지 않고 묵은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짊어지고 살아왔습니다. 아마 마음 속으로 한국에 오면 어머니의 과거뿐 아니라 제 자신의 감정과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찾고,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에 서 있으면서, 낯설지만 낯익은 그 땅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가진 유산만으로는 소속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저는 제 정체성을 이분법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해체하고, 저만의 방식으로 소속감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공부와 DoKAD(Descendants of Korean Adoptees, 한국 입양인 2세) 공동체 덕분에, 이제 저는 혼자가 아님을, 제 안의 '한국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음을 이해합니다.

저는 프랑스의 라신 코레엔(Racines Coréennes)이라는 단체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 입양아의 2세들과 연결되었고, 이 단체는 지난 2년간 분기별로 입양아의 자녀들을 위한 모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입양 부모와 그 자녀 사이의 입양의 (비)전승이 어떻게 DoKAD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커뮤니티가 커져가는 시점에서, 더 크고 새로운 문제, 바로 DoKAD의 권리 문제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는 입양 기록에 접근할 권리가 입양아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그 자녀들에게도 주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입양은 1세대로 끝나지 않으며, 그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DoKAD로부터 이 정보를 빼앗는 것은 그들의 가족사의 한 부분을 영원히 지워버리는 것이고, 이는 곧 개인의 정체성 일부를 잃는 것입니다.

저는 제 한국 친척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예전에 그들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최근까지도 저는 제가 직접 그들을 찾으려고 한 적은 없었지만, 이 글을 쓰며 자연스럽게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나의 한국 뿌리를 찾기로 한다면? 놀랍게도,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도 나의 역사이며, 내가 원한다면 답을 구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는 제 행동에 크게 반가워하지도 않았고, 그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 가족은 늘, 그리고 앞으로도 어머니이기에, 아무리 허락을 받았다 하더라도 어머니가 불편해할 길을 감히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둘 다 괜찮다고 느낄 때까지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최근 일부 민간 입양 기관들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서, 입양에 대한 더 큰 투명성과 책임이 절실해졌습니다. 물론 그 답은 입양아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하지만, 그 후손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가족사, 수많은 물음표를 유산으로 떠안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입양인과 그 자녀들이 비로소 자기 뿌리를 이해할 수 있는 해답과 수단을 갖도록 하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쓴 카밀 몽타뇽 씨(오른쪽). 좌측 사진은 어린 시절의 필자와 어머니.ⓒ필자 제공

기획: 한국 입양인 2세(DoKADs) 마이테 마음 & 마릿 킴

번역:김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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