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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뚫고 '핵 빗장' 푼 이재명, 이제 '새로운 게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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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뚫고 '핵 빗장' 푼 이재명, 이제 '새로운 게임'이 시작됐다

[박세열 칼럼] '핵 빗장' 푼 이재명의 실용주의, '비핵화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혼돈의 세상이다. 현실과 환상이 충돌하고, 말은 의미를 잃고 의미는 말을 잃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세상이다. 트럼프의 등장은 기존 질서의 균열을 상징한다. 한반도에서도 그렇다. '비핵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트럼프는 북한을 "일종의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 핵무력 세력)로 규정했다. 부연설명도 했다. "그들(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질문한다면), 그들은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핵 보유국이라고 규정하는 건 유보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는 말이다.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북한에 적용되는 '비핵화'라는 용어 자체가 모든 의미를 잃었다"고 못을 박았다. 중국은 김정은을 시진핑, 푸틴과 함께 망루에 세웠다. 핵무기 보유국을 무언으로 승인한 것이다.

지금 북한에 있어 '핵 보유'는 과거 '주체 사상' 급의 위상을 갖고 있다. 최고 존엄 급이다. 지난 9월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은 유엔 연설에서 "우리에게 비핵화를 하라는 것은 곧 주권을 포기하고 생존권을 포기하며 헌법을 어기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이중 의미'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핵보유국은 아니지만 핵은 보유하는 국가를 상대해야 한다. 이 언어의 헤게모니 다툼과 혼란은 고스란히 국내의 '자주파', '동맹파' 논쟁으로 흘러들어왔다. '동맹파'니 '자주파'니 하는 말들도 전통적(?)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평화'를 중시하는 '자주파'는 북한이 주창한 '적대적 두국가론'에 맥을 대면서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모순된 주장을 내놓는다. '동맹파'는 그 이름에 등장하는 핵심 '동맹'이 북한의 핵 보유를 의심할여지 없이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동맹파, 자주파의 공히 인정되는 유일한 접점은 '한반도 비핵화'였지만, '가치'이자 '목표'였던 이 말도 의미의 힘을 잃고 표류하는 처지가 됐다. 특히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핵화'는 상상 속의 유니콘같은 존재다.

이 '이중 의미'의 세계에서 보수 세력이 지난 정권에서 짜낸 아이디어는 윤석열의 '핵공유'라는 판타지였다. '자체 핵무장'의 숙원을 우회하는 아이디어였지만, 사실 '북핵 불용'과 '핵보유 불가능성'이라는 보수의 좌절을 감추고 '제재 만능론'의 실패를 부인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이 '시행착오'로 우리는 3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그 사이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를 이용해 제재를 뚫고 전력을 고도화하면서 '적대적 두국가론'을 완성했다.

'핵공유'가 망상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도 보수 세력은 여전히 북한의 '핵 포기'가 강력한 제재로 가능할 거라는 도그마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실 지금 표출되고 있는 무용한 북한 혐오, 중국 혐오는 갈 길 잃은 보수 세력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증상일지 모른다. 과거 방식에 사로잡혀 북핵 문제 해결 비전이 사라지니, 내부의 분노가 표층을 뚫고 병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른바 '자주파'는 그나마 현실 인식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제시하는 해법은 여전히 모호하거나 나이브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론이 더 문제다. 특히 보수 언론은 세상의 변화와 그에 적응하는 과정 속 발생하는 혼란을 과거의 '동맹파 vs. 자주파'의 틀에 욱여넣고 지루한 관전평만 내놓고 있다. 이미 낡아빠진 '제재론'에 대한 대안이 없고 '진영'을 우선시하니 논리가 매몰되고 경직된다.

트럼프는 이번 방한을 계기로 두 가지 중요한 조치를 했다.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를 '승인'(승인이라는 표현이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걸맞다)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공표하고,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불발 직후 국방부(전쟁부)에 "핵무기 실험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누가 봐도 김정은을 겨냥했다. (핵추진 잠수함과 중국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자) 김정은과 회담이 불발되자 트럼프 특유의 '신경질'이 나온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공식 환영식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운용한다는 것은 '비핵화'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 아이디어가 이재명 대통령에게서 나왔다는 것도 파격적이다.

과거 문재인 정부가 2017년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추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건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약속한 합의와 어긋난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재야 '자주파'들은 핵추진 잠수함 추진과 비핵화가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 지적은 꽤 호응을 얻어 문재인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는 '비핵화'가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2019년 2월 김정은과 트럼프의 '하노이 빅딜'이 '노딜'로 귀결되면서 '비핵화'는 결국 운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정신이 없을 때 북핵 문제는 방치되고 유기됐다. 윤석열-바이든 콤비가 '핵공유'라는 판타지를 쫓아 다낼때, 김정은은 불가역적 '핵국가'를 선언했다.

트럼프가 '미치광이 협상가'라고 하더라도, 그가 미국 민주당 '샌님'들보다 지독히 현실적이란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으로 '비핵화'는 사실상 공식 사망선고를 받았다. '한반도 비핵화'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걸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좋든 싫든 한반도는 이제 '핵 경쟁' 국면으로 돌입했다는 걸 지적하는 것이다.

핵추진 잠수함은 북핵 억지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북한이 추진하는 SLBM(잠수함 탄도미사일)의 활동을 제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핵실험"을 지시함으로서 지난 2018년의 '더 크고 아름다운 핵버튼'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돌아갔다. 핵을 보유한 북한을 상대로 '핵 무력 시위'를 천명한 셈이다. 참고로 북한도 2021년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천명했다. 그리고 북한과 러시아의 '위험한 거래'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우린 알 수 없다.

핵추진 잠수함을 말하며 '안보 숙원 해결'을 축하하기 전에, 우리는 이제 '자체 핵무장'의 판타지와 '비핵화'라는 판타지 사이 어디 쯤에 놓여버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중 의미'의 시대에서 '사실상(de facto)'의 시대로 이행하는 이 흐름을 멈출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건 이재명 대통령의 새로운 시도다. '자체 핵무장'의 판타지에서 해메고 있는 국민의힘과 '비핵화'의 사망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전통적 민주당의 낡은 전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읽어보려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어쩌면 '동맹파'보다는 '자주파'의 뜻대로 흘러갈 수 있을 거란 예고편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최근 주장하고 있는 구상에 주목해 본다. 그는 지난 10월 1일 베를린에서 "북한이 스스로 전략 국가라고 말하는데 전략적 위치가 달라졌다"며 "7년 전 위치와는 다르다. 일단 그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대적 두국가'를 '평화적 두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트럼프와 이재명 정부는 '핵 역량 강화'를 끌어들였다. 그 과정에서 '동맹'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을 인정하고 파격적인 한국의 자체 핵역량 강화 결정을 내린 것은, 이제 '게임이 시작됐다'고 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전히 중요한 건 '우리가 핵추진 잠수함을 따냈다'는 게 아니라 '트럼프는 왜 이번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배경과 의도를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몇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 굳이, 비교적 긍정적 시나리오를 떠올려 보자면 우리 스스로 '핵의 빗장'을 풀어가며 '사실상 핵국가'인 북한과 대등한 교류 협력의 길을 뚫어내는 걸 생각해볼 수 있다. 핵추진 잠수함 보유까지 많은 절차와 시간이 필요한만큼, 이를 전략적 카드로서 활용할 수 있다. (물론 트럼프의 변심이나 미국 내부 사정으로 불발될 가능성도 있다.) 핵추진 잠수함 이슈 다음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한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카드도 있다. 당연하게도 이건 트럼프의 '일관성'을 믿을 때 가능하다. '하노이 노딜'에서 봤듯, 트럼프는 여전히 우리에게 '기회'이자 심각한 '리스크'라는 점을 상기하자.

이재명 정부는 지금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보수의 전략을 일부 차용하고, 진보의 전략을 버리지 않는 방식이다. 불확실성의 시대, '핵 빗장'을 풀어 '북핵 문제'를 다루려는 이재명의 '실용주의'는 과연 통할 수 있을까.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굿즈 전시품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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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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