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말은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을 우리는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국정감사장이 강성 지지자용 쇼츠 촬영장으로 전락한 극단적 진영정치의 시대에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발전적 공론장을 만드는 정치인의 말을 만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뜻있는 정치인들이 나선다면 얼마든지 좋은 공론장을 만들 수 있다. 생각이 달라도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고 사실에 기초해 서로의 주장을 힘껏 겨뤄보는 정치토론은 의제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합의의 공간을 확장한다. 바로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나는 이틀 전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주제는 '택배 새벽배송 금지 정책'이다.
시작은 10월 28일 밤 11시경 한동훈 전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민노총과 민주당 정권의 '새벽 배송 전면 금지' 추진은 많은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막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한 전 대표는 "민노총 주장대로 새벽 배송이 금지되면 '늦게 퇴근하는 맞벌이 부부를 비롯해 이제는 새벽 장보기가 필수가 된 2000만 국민들의 일상생활'과, '생산자와 소상공인들, 그리고 새벽 배송으로 돈을 벌고 있는 택배 기사들의 삶'이 모두 망가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노동환경 개선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없애버리자'고 하면 오히려 노동자도 피해봅니다"라고도 했다.
한 전 대표가 말하는 '새벽 배송 전면 금지' 추진은 지난 10월 22일에 열린 '3차 택배 사회적 대화기구 1차 회의'에서 논의된 '심야 배송 및 주 7일 배송 개선 방안'을 말한다. 해당 회의에서 택배노조는 초심야시간(0시~5시) 배송을 중단하고 5시부터 자정까지 2교대제 운영을 제안했고, 각 택배사는 이를 검토해 10월 31일에 의견을 제시하기로 했다. 고용노동부는 심야배송이 택배노동자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의학적 기준 마련을 위해 연구용역을 의뢰하기로 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택배 노동이 급증한 2020년, 택배 과로사 문제가 심각해지자 2021년에 국회와 택배업체, 택배노조, 택배대리점협회, 사회단체, 소비자단체 등이 참여한 1, 2차 사회적 대화기구의 '택배 과로방지 대책'의 연장선상에 있는 합리적 논의다. 무엇보다 이미 2021년의 1차 합의문은 '택배기사의 적정 작업조건'으로 "특별히 불가피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9시 이후 심야배송은 제한하기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제시했고 불가피한 경우도 심야 배송은 10시까지로 규정했다. 말하자면 이번 회의는 기존 합의가 택배사와 정부에 의해 제대로 이행되고 감시되지 않았기에 열린 셈이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한 전 대표의 글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택배 과로방지 대책'이라는 협력적 사안을 '새벽배송 금지 세력 대 다수 국민의 일상'의 대결로 갈라치고 있었다. 둘째, '새벽 장보기'를 선택이 아닌 '필수'로 규정하고 있었다. 끝으로 택배 야간 및 새벽 배송으로 연이어 발생하는 과로사 문제라는 핵심 현안 해결을 위한 구체적 대안 없이 무조건적 반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노동환경 개선은 계속되어야 하지만'이라는 한 구절로 축약되기에 택배 노동자들의 연이은 과로사는 심각한 사회 문제다. '저녁이 있는 삶'은 고사하고 새벽 장보기를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주장해야 하는 과로사회는 지키고 장려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고질적 사회 문제다. 심야 및 새벽배송 택배기사들의 과로사와 새벽 장보기가 필수로 느껴지는 삶은 노동자 생명과 시민의 삶의 질보다 이윤과 성장을 중시하는 과로사회의 연결된 풍경일 뿐이다. 무엇보다 택배 노동자 안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깡그리 무시한 채 택배 노동자들에게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요구하는 새벽배송을 운영하며 이윤을 착취하는 기업을 방치하는 관행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사회 문제다. 이 모든 문제의 해결에 여야와 민관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정치인으로 나선 한 전 대표 역시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한 전 대표의 글은 문제해결은 커녕 오히려 문제를 더 풀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한 전 대표의 글을 공유하며 글을 쓴 이유다. "한동훈 전 대표는 장시간 노동과 야간노동이 당연한 상시적 과로사회에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있습니까? 모든 시민들의 저녁이 있는 삶, 같이 만들 책임이 한동훈 전 대표에겐 없습니까? 자기 정치 이익을 위해서 과로하느라 장 볼 시간도 없는 노동자와 야간노동하는 노동자 갈라치면 좋습니까?"
글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전 대표가 이에 관해 페이스북에 직접 글을 썼다고 해서 기대하며 보았다. 과로사회를 '저녁이 있는 삶'으로 만드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 이 난제에 대한 한 전 대표의 고민을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읽었으나 결과적으로 큰 실망을 맛보았다. 한 전 대표의 대답은 엉뚱했다. '이슈의 논점'은 택배 과로사 방지를 위한 0시~5시 새벽배송 금지 논의다. 그러나 한 전 대표는 "노량진 수산시장, 편의점의 24시간 개점, 야간 경비업무 등 다른 수많은 야간, 새벽 근무 업종도 못 하게 금지해야 한다는 말인지 묻고싶다"는 엉뚱한 말로 논점을 이탈했다. "장의원과 민노총, 민주당식 조악하고 감성적인 논리"로 "'모두가 새벽에 일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국민들 상대로 훈계"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 전 대표는 남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정치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싫어하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그런 행동을 일삼고 있어 놀랐다. 택배 과로사 방지를 위해 0시~5시 새벽배송을 금지하자는 것이 어떻게 '모두가 새벽에 일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훈계로 둔갑할 수 있나?
안타깝게도 한 전 대표의 이 글이 올라온 뒤 내 페이스북 댓글에는 일제히 편의점, 노량진 수산시장, 야간에 이 일도 저 일도 하지 말라는 거냐는 식의 인신공격과 비아냥이 난무하고 있다. 야간과 새벽 배송으로 인한 택배 과로사 문제의 해결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해야 하는 시점에 한 전 대표라는 국민의힘 주요 정치인의 말은 백해무익한 노동자-소비자 갈라치기 대결구도와 논점이탈을 낳고 있다.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말이 초래한 이 사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노동환경 개선은 대단히 중요한 임무입니다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연이은 택배 과로사 문제 해결에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해결에 대한 한 전 대표의 대답은 무엇인가? 0시~5시 사이의 새벽배송 금지가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어떤 해법을 갖고 있는가? 대안 없는 반대는 상황을 방치하자는 주장에 다름없지 않은가? 또한, 정말로 한 전 대표가 지향하는 사회는 '새벽 장보기가 필수인 사회'인가? '내가 오늘밤에 주문해서 내일 아침에 택배를 받아볼 권리'를 누리기 위해 누군가가 새벽배송을 하다 목숨을 잃는 사회를 방치하기를 대다수 국민이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논점들은 '다시 만난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핵심 질문들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에는 지난 12.3 내란을 극복하는 광장에서 누군가에게 받은 '주 7일 배송이 필요 없는 소비자모임' '천천히 받는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다. 이러한 시민들의 생각은 존중받고, 공론장에서 대변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한동훈 전 대표에게 다시 한번 '택배 새벽배송 금지'에 대한 진지한 공개토론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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