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건강정보가 무단 유출되는 상황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사회적 편견과 낙인이 큰 특정 질병을 앓(았)거나 시술을 받은 이력 등 감추고 싶은 내밀한 건강정보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될 경우 그 정신적 충격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이뿐 아니라 대인관계가 파탄날 수도 있고, 경제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자신의 '건강등급'에 따라 채용과 승진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당장에 보험사들은 내 건강위험도를 '예측'해 보험가입을 거부하거나 보험료를 인상하려 들 것이다. 따라서 건강정보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삶과 건강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 데이터베이스에는 모든 사람의 진료기록, 건강검진 정보와 더불어 가족관계, 직장이력, 소득, 재산 등 다양한 개인정보가 쌓여 있다. 갈수록 해킹 시도가 늘고 있는 점이 우려스럽지만, 그나마 우리가 건보 데이터에 대해 덜 불안해할 수 있는 까닭은 공적 가치에 부합하는 연구에 한해서만 엄격한 안전 기준과 절차에 따라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논평에서도 비판했듯(☞관련 글 바로가기) 관련 산업 육성에 혈안이 된 정부는 건보 데이터의 상업적 활용을 허용하도록 건보공단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지난 2020년 데이터3법 개정으로 공공의료데이터의 가명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자 보험사들은 줄기차게 건보공단에 자료 제공을 요구해 왔다. 이 데이터로 집단별 위험도를 보다 정확히 파악해서 보험의 보장성을 높이고 유병자·고령자를 위한 맞춤형 보험상품을 개발하겠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보험료 수입보다 보험금 지급이 많아지는 손해율을 어떻게든 최소화하는 것이 지상 최대 과제인 영리보험사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지금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거나 지연하는 행태를 일삼는 보험사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합리적 의심을 기우로 치부하려는 보험업계는 현행 법 체계상 사전 승인 이외의 목적으로 정보를 활용해 의무를 위반할 경우 징벌적 과징금이 부과되고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더 큰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러한 처벌도 불사하는 비윤리적 기업 경영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또 보험사들은 특정 개인을 식별하기 어려운 가명 처리된 정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가명 정보란 예컨대 "김ㅇㅇ(50대 서울 거주)"와 같이 몇가지 다른 개인정보와 결합되면 얼마든지 재식별이 가능해지는 것으로 보험사들이 건보 데이터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10년 전 사이언스지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영수증 세 장(또는 영수증 한 장과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는 인스타그램 사진 한 장, 그리고 방금 구매한 휴대폰에 관한 트윗)만 있어도 백만 명의 신용카드 기록 중에서 특정 개인을 식별할 확률이 90%가 넘는다고 한다(☞관련논문 바로가기).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익명 처리된 데이터셋이라 할지라도 15가지 인구학적 속성만 알면 99.98%의 개인을 정확하게 재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관련논문 바로가기). 즉, 익명화된 정보라 할지라도 익명성 보장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보험사는 이미 가입자의 다양한 개인정보를 수집해 놓은 상태다. 그러면서 영업기밀이라며 자신들의 데이터베이스는 공개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주요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가 비대면진료 플랫폼 업체와의 협력을 비롯해 앞다퉈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 형국이다. 겉으로는 고객을 묶어두는 '락인(Lock-in) 효과'나 건강증진과 질병예방을 통한 손해율 감소를 기대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양한 건강정보와 라이프로그 데이터를 확보하여 질병위험 예측에 활용하려는 속셈도 자리하고 있을테다.
이러한 사실을 정부 관계자라고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공공의료데이터를 영리 기업들에 개방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건강보장에 대한 국가 책임을 지금보다 더 강화할 생각이 없기 때문으로, 건강보험의 불충분한 보장성 문제를 지금처럼 각자 알아서 사보험을 통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뜻이다. 둘째는 경제성장에 일조할 수 있게끔 보건의료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으로, "AI 3대 강국" 도약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제시한 현 정부로서는 보건의료 분야의 AI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데이터 개방에 적극 나설 가능성이 높다. 양질의 데이터 확보가 AI 헬스케어 개발에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나라에 폐암과 유방암 진단 AI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는, 국내 대표적 의료 AI 기업 중 하나인 루닛의 행보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해 루닛은 유방암 검진 기업 볼파라 헬스케어를 인수했는데, 볼파라가 보유한 누적 1억장이 넘는 영상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AI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규모 의료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한국은 이 점에서 유리한 환경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이 90% 이상인데다 단일 보험자 기반의 건강보험제도 덕분에 빅데이터 확보에 용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정부는 글로벌 AI 의료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건보 데이터뿐 아니라 개별 병원이 보유한 전자의무기록 등도 AI 학습의 원료로 집어넣기 위해 몹시 분주하다. 지난달 복지부가 기존 진료정보교류 포털과 건강정보고속도로 포털을 통합한 "디지털의료정보교류시스템(가칭)"을 2029년까지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스템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병원 간 진료정보의 원활한 교류를 통해 환자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건강정보가 산업적 가치 창출에 더 쉽게 활용될 수 있는 인프라를 확충하는 시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정보 전송요구권'은 문제적이다. 언뜻 개인의 선택권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볼 때 실상 건강정보의 상업적 거래를 정당화하는 기만적 장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권으로서의 정보 자기결정권은 정보공유를 거부할 권리도 내포한 개념이지만, 이 용어는 우리를 그저 정보전송을 요구하는 주체로만 호명한다. 거부할 수 있지만 거부 시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유를 가장한 강요인 셈이다. 그리고 건강정보를 제공하면 경제적 보상을 받는 '앱테크'와 같이 국가와 자본은 사람들이 건강정보를 환금가치를 지닌 '자산'으로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이렇게 데이터 경제가 건강 영역을 장악하고 우리의 건강정보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흘러 다니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와 관련해 미국 사회학자 에벨링이 들려주는 경험담은 의미심장하다(☞관련자료 바로가기). 과거 난임치료 임상시험에 참여한 그녀는 임신 10주차에 유산을 경험했지만, 이후 가상의 아기가 만 5살이 될 때까지 육아 관련 회사들의 메일과 우편물을 받게 된다. 소셜미디어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임신과 관련한 온라인 검색도, 상품이나 서비스도 일절 구매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조사 결과 마케팅 업체들은 한 데이터 브로커 기업으로부터 그녀의 정보를 구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에벨링은 건강데이터로 구성된 가상의 '몸'이 물리적 공간에 실재하는 '몸'을 거꾸로 규정하는 모순적 현실을 고발한다. 이처럼 우리가 무심코 공유했거나 제도적 틈새로 빠져나간 각종 건강정보와 라이프로그 데이터, 의료기록과 유전체 정보 등은 데이터 브로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결합된 '디지털 분신'은 영리 기업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상품화될 것이다. 문제는 데이터로 분할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individual)인 우리가 정량화된 건강데이터의 총합, 즉 '분체(dividual)'로 취급된다는 것으로, 그 결과 진짜 내 몸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또 이 과정에서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만들어내는 편향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본이 우리에게 더 많은 건강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팔기 위해서다. 데이터의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우리가 판매한 건강정보는 머지않아 더 큰 청구서로 돌아올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데이터 착취'로도 볼 수 있다. 막상 구매력이 없는 이들은 소외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보험사가 건강 고위험군의 보험가입을 거부하고 보험료를 인상하는 행태와 그 본질은 똑같다. 무엇보다 건강정보의 사유화와 상업화는 건강에 대한 책임을 더욱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건보 데이터의 상업적 활용을 막는 것은 '병목'이 아니라 우리의 건강과 사회를 지키는 '버팀목'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제기해야 할 올바른 질문은 어떻게 하면 건강정보의 상업적 활용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확보할 것인가가 아니라 불신의 원천인 상업적 활용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AI 광풍에 휩쓸려 우리의 소중한 건강정보를 자본의 먹잇감으로 내어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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