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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시위로 전과 4범? 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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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기후 시위로 전과 4범? 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요

[COP30, 아시아-남미 청년의 목소리] ③ 기후 재앙 막기 위한 비폭력 직접 행동 나서는 이유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가 10일부터 21일까지 브라질 벨렝에서 개최된다. <프레시안>은 이 기간 동안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하인리히 뵐재단 동아시아지부와의 공동기획으로, 기후위기에 맞선 아시아-남아메리카 청년기후활동가들의 목소리를 하루에 한 편씩 싣는다. 한국기후활동가 다섯 명의 글과 COP30 참가자 대학생의 취재기 다섯 편을 차례로 게재한다.

분당 두산타워 앞 로고에 수성스프레이를 뿌렸다.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의 베트남 석탄화력발전소 수출을 막으려고. 더불어민주당 당사 2층 난간에 올랐다. 문재인 정부의 부산 가덕도신공항 날림 추진에 반대해서. 포스코 포럼에서 산업부 장관 축사 직전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친환경 수소환원제철을 홍보하며 뒤로는 NDC(유엔에 제출하는 국가 기후목표)를 낮추려는 위선을 폭로하러.

윤석열 정부 산업부 공청회장에서 많은 이들과 함께 외쳤다. "핵 폭주에 주민 배제하는 깜깜이 에너지계획(전력수급기본계획) 폐기하라!" 마지막은 12월 19일 1심 선고라 전과가 확정되지 않았으니, 나는 기후위기를 막는 시위, 직접행동을 하다 전과 3~4범이 된 셈이다. 물론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은 아니고,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그런데 정말 내 선택이 맞나? 지구가 기후위기 들고 협박한 건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기후위기는 인간들, 특히 과거에는 제국의 대자본과 권력자들이, 지금은 부유층이 과도하게 석탄, 석유 등 화석연료를 사용한 결과니까.

그러니 실은 기후위기는 지구나 자연의 반격 같은 것도 아니고, 마왕 신해철의 일갈처럼 그냥 인간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버린, 이른바 '스불재'다. 마왕은 리우 총회(UNCED, 유엔환경개발회의)가 열렸던 1992년 환경 콘서트에서부터 '내일은 늦으리'를 외쳤지만, 한국 사회는 가수들과 과학자들의 목소리에 침묵해 왔다. 사실 시민들만 열심히 '일상의 실천'에 나서면 기후위기가 해결될 것처럼 호도해 왔다. 텀블러 사용, 일회용품 줄이기, 안 쓰는 플러그 뽑기, 폐식용유 비누 만들기 등의 것들 말이다. 아니, 사회 탓할 것 없이 나부터도 침묵했다.

▲2021년 2월 28일 이은호, 강은빈 활동가가 분당두산타워 두산 로고 조형물에 초록색 스프레이를 뿌리는 직접행동에 나섰다. ⓒ청년기후긴급행동

나도 똑같았다, 남 일이거나 무력함에 피하거나

왜 침묵했냐고? 당장 먹고살 걱정이나 바쁜 일상도 컸겠지. 하지만 나부터도 기후위기를 최소 100년, 200년 뒤의 먼 문제, 투발루처럼 저 먼 섬나라 주민들이나 북극곰들의 문제로 여겼다. 결국 남 일이거나 멀리 있는 일이었던 거다.

그렇지만 내가 기후위기 문제에 진심으로 뛰어드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무력함이었다. 전 세계적 규모의 문제에, 내가 당장 플라스틱을 덜 버리거나 전기플러그를 뽑는대도 해수면 상승이 요만큼이라도 늦춰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나 하나쯤이야~'를 넘어 '나 한 사람이 뭘 할 수 있는데?' 까지 간 셈이다. 문제는 커다랗고 심각한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니 피하고 싶고, 우울한 소식은 듣기 싫으니 던져두고 제쳐두게 됐다.

그러던 사람이 어떻게 직접행동에 전과까지 얻게 됐느냐고?

내 변화는 2019년이 지나고 몇몇 기후활동가의 강연을 들으면서부터였다. 기후 문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고 눈앞에 닥쳐온 위협인 데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와 당신의 일상을 위협할 문제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유엔 IPCC 보고서며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증언이 신뢰를 줬고, 남의 문제였던 것이 하루아침에 내 문제가 돼 버린 순간이었다.

그것뿐이었다면 앞서 말했듯 무기력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핵심 원인인 과도한 탄소 배출을 빠르게 줄이면, 그러니까 감축하면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 그리고 롤러코스터 타고 떨어지듯 급격한 탄소 감축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전 사회적인 각성과 변화의 노력이 필요했다.

지금은 뉴스를 틀기만 하면 기후 이야기가 직간접적으로 나오고, 날씨만 봐도 기후위기를 실감하는 시절이다. 그만큼 기후위기가 심해졌다는 말이니 나쁜 일이지만, 4~5년 전만 해도 기후 문제의 ㄱ자도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던 때였다. 그렇게 우리들은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위기를 알리고, 막대한 탄소 배출을 낳는 결정들에 반대하고자 직접행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룡처럼 멸종할래? 큰불이 났으면 어떻게든 불을 꺼야지!

다 좋은데 과하지 않느냐는 말 앞에

그렇지만 꼭 불 끈다고 유리창을 깨거나 온 마을을 시끄럽게 하는 등 피해를 주거나, 법을 어기거나 질서를 어지럽혀야 할까? 이것이 직접행동을 둘러싼 핵심 질문이다.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바를 남에게 요청하거나 협상, 투표로 해결하기보다 직접적인 행동으로 스스로 얻으려는 행위.

대표적인 방식을 꼽자면 항의성 연락이나 방문부터 피케팅, 보이콧, 집회나 행진, 봉쇄나 점거, 단식, 태업과 파업, 물리적 파괴, 예술 퍼포먼스 등. 역사적으로는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부터 마하트마 간디의 소금 행진(소금 사티아그라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비폭력 운동과 그 대표 격인 로사 파크스의 버스 보이콧 등이 있겠다.

최근에는? 블랙 라이브스 매터부터 월스트리트 점거(오큐파이) 운동,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저항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없었을까? 물론 많았다. 굵직한 것만 3.1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 미투와 위드유, 남태령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진격과 응원봉 물결에 이르기까지. 아, 밀양 할매들과 연대자들의 탈핵·탈원전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다시 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직접행동을 다룬 매우 두꺼운 저서로 유명한 에이프릴 카터에 따르면 직접행동은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동기에서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저항이 쟁점이 된다.

그 적절한 범위나 강도는 어떻게 될까? 일단 폭력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다수의 논자가 비폭력을 지지하는 듯 보이나, 이번에는 또 폭력의 범위가 문제가 된다. 남의 재산에 피해를 주는 것은 폭력인가 아닌가? 통행을 방해하거나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은?

실제로 영국에서 도로를 점거하고 구급차도 못 지나가게 막았던 '영국을 단열화하라(Insulate Britain)'는 전국적인 비판에 직면했지만, 단열 문제를 제1의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반면 가짜 피를 뿌리고 문을 봉쇄하는 등의 직접행동 방식으로 기후위기를 적극적으로 알리던 '멸종 반란(Extinction Rebellion)'은 보다 대중적인 노선으로의 변화를 천명하기도 했다. 어느 길을 택해야 옳은가? 하나의 정답은 없는 듯 보인다.

직접행동, 하면 뭐가 달라져?

우리의 직접행동들은 변화를 만드는 데 기여했을까? 기후위기는 더 많이 알려졌지만 '더더' 많이 심해졌고, 우리는 베트남 붕앙-2 석탄화력발전소 수출이나 정부 그리고 포스코의 행보, 신공항 추진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녹색당의 포스코 1심 재판을 통해 법원에서 기후위기를 인정한 최초의, 가장 아름다운 판결문을 얻어냈고, 두산 재판의 대법원 승소로 기후위기를 알린 직접행동이 기업 재산권을 이긴 판례를 만들어냈다. 이는 법조계 안팎에서 생태법 및 지구법학 논의의 확산에 조금이나마 기여했고, 뒤이어 열리는 다른 직접행동 재판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리고 또 우리 청년기후긴급행동은 국내 마지막 석탄화력발전소가 지어진 강원도 삼척에서 주민들과 지역을 알아가며, 머지않은 미래에 베트남 현지 방문을 꿈꾸고 있다. 우리 멸종저항서울·멸종반란은 한 편의 법정드라마 같았던 재판에서 승소하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기후정의운동에 기여하며,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에게 얼마간 떳떳할 수 있었고, 고민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더 많은 존재와 이어지고 연결되며, 다음 변화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적어도 나에게 직접행동은 사회나 세상을 서서히 바꿔감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함께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렇게 우리는 작고 무력한 존재에서, 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어간다. 리베카 솔닛의 힘 있는 이야기처럼.

"법적 결정이 변화를 이끈다거나 판사들이나 입법자들이 법정이라고 불리는 극장의 문화를 이끈다는 이야기가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다만 변화를 승인할 따름이다. 변화는 대부분 언저리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그들은 변화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그것이 완결되는 곳에 있을 따름이다. …(중략)… 그 변화는 … 힘이 그림자들과 주변적 존재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언저리의 어둠 속에 있지 무대 중앙의 환한 조명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희망, 그리고 일쑤 우리의 힘이." (리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중)

▲2019년 3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기후 위기 집회 풍경. ⓒBy School Strike-Sydney,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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