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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불꽃이 된 김규식의 정점, 그리고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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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불꽃이 된 김규식의 정점, 그리고 시련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출간한 역사학자 정병준과의 대담 ④

김규식의 놀라운 파리 강화회의 단독 외교투쟁

박인규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해서 3월 13일 프랑스에 도착했다. 사실 미국에서 이승만, 정한경,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오려고 했는데 일본의 방해 등으로 못 오고 혼자 도착했다. 그리고 8월까지 거의 혼자 힘으로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등 외국 대통령들에게 독립 청원서와 비망록 등을 제출했다. 언론들과 기자회견도 여러 차례 했고 한국의 실정과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통신전>이라는 걸 20여 차례 발행했다. 나중에 조소앙 등이 와서 도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혼자서 굉장히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책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국과의 협업이 상당했다. 예컨대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이 처음 머문 장소가 이욱영(리유잉)이라는 중국인의 집이었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법적 지식과 논리는 사동발(시통파)이라는 중국계 프랑스인의 도움을 받았다. 독립운동 시기에 한중 협력이라는 게 상당히 뿌리가 깊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정병준

사실 출발하는 배편부터 중국의 협조가 있었다. 여운형이 표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파리 가는 건 다 매진됐다. 이때 국민당 정부에서 일했던 정육수(정위슈)라는 아주 유명한 여성이 자신의 표를 김규식에게 준 거다.

배 안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가는 중국 대표단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 중국 유학생,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이들을 주도하던 사람들하고 김규식이 관계를 맺고서 도움을 받게 된다. 영어를 잘 했지만 법률 문서를 쓰려면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중국 측 사동발의 존재가 제일 크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김규식이 그 일을 하는데 한국 측에서는 누구도 제대로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거다.

박인규

김탕이라는 학생이 김규식의 일을 보조하긴 했다.

정병준

이 책에 실린 김탕 사진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탕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자료 조사 없이 엉터리로 알려진 게 많았다. 당시 김탕은 공식 직함 없이 <통신전> 일부 작성자로 이름을 올렸는데, 김규식은 "세부 과업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한 "대표단을 방조하던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어쨌든 김규식이 낸 청원서는 정말 잘 만들어진 문서다. 구사한 영어뿐만 아니라, 형식적에서도 측면에서 그렇다. 3.1운동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임시정부에 돈을 보냈고, 그걸로 이런저런 청원서를 여러 번 내기도 했는데, 결국 공식적인 청원서로 미국 대사관 접촉하는 등의 일은 고립무원으로 김규식이 혼자 다 해냈다.

김규식이 짊어진 무게를 상상해 본다. "만약 나라면?" 혼자서 이 정도 해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김규식이 1921년 뇌종양 투병을 하는 것도 이때의 무리한 활동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영국, 미국의 문서고에는 김규식이 낸 청원서, 그리고 당시 사용했던 그의 명함이 보관되어 있다. 그걸 직접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책에 관련된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청원서 표지. 돌베개 제공.

▲김규식이 사용했던 명함. 당대 한국인 중 가장 능숙한 영어를 구사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을 John Kiusic Soho Kimm으로 영문 표기했다. 정병준 교수가 미국 Taker. H. Bliss Papers에서 촬영했다.

박인규

세계사적으로 보면 윌슨이 1918년 이른바 14개 조를 내세우면서 민족자결을 얘기했지만, 그 이전에 레닌이 이미 민족자결을 얘기했기도 하다. 어쨌든 김규식이 엄청난 고군분투를 했고 2백만 한국인들이 시위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성과가 없었다.

정병준

결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김규식의 활동이 3.1운동과 결합해서 한국인들이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민족적 에너지를 모아낸 건 처음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이다. 사실 당시에 한국만 그랬던 건 아니다. 당시 프랑스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의 호치민도 파리 강화회의에 와 있었다.

박인규

당시에 호치민이 김규식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본래 호치민은 '자치' 정도를 주장했다.

정병준

그렇다. 당시 호치민의 '안남(베트남) 인민의 요구'는 독립 주장이 아니었다. 인도, 이집트 등도 윌슨 영향으로 파리에 대표를 파견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레닌이 윌슨보다도 먼저 민족자결, 약소민족 해방을 주창했다고 이야기하지만, 1918~19년 당시에는 신생 러시아와 레닌의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를 풍미하고 있던 건 승전국인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였다. 영구평화, 세계대개조, 정의, 인도주의 같은 말은 정말 대단한 호소력이 있었다.

박인규

3.1운동으로 비록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피압박 민족의 주체적 각성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큰 불꽃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 이후 1919년 8월, 김규식은 미국으로 간다. 앞으로 생겨날 국제연맹에서 외교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에 갔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당시 대미 외교는 이승만, 서재필이 독점하고 있었고 김규식에게는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공채를 팔라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 '공채' 이야기가 좀 복잡하게 느껴지긴 했는데, 어쨌든 '돈 문제'가 정말 중요하구나 하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후에도 1920년대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193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자금을 둘러싸고 임시정부 내의 파벌 싸움이 엄청나게 심하지 않았나.

이 공채 판매는 이후 김규식이 이승만과 결별하는 주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국채 이야기를 조금 설명해 달라. 그 이전에는 미주 등 해외교포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애국금이 주요 자금원이었는데 이승만이 굳이 공채를 통한 자금 모집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승만이 독립운동 진영을 장악하기 위해 한 일인가?

정병준

이승만이 1913년에 하와이에 처음 간다. 초청자는 박용만이었다. 하와이국민회가 미주에서 가장 센 단체였는데, 이 국민회를 1915년 박용만과의 권력 투쟁 끝에 이승만이 차지한다. 물론 내부에서 갈등이 컸다. 그러다 3.1운동 이후 이승만이 위임통치론을 이야기하면서 임정에 가담하지 않으니까 박용만이 강하게 비판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이승만은 국민회를 장악하고 싶어 했다. 이승만은 가공의 노령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자신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임장'과 '청재권(請財權, 빚 얻을 권리)'을 요구했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던 노령정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독립운동을 하려는 건지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지위를 명확히 하고, 자금 모을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게 제일 중요했던 사람이다.

공채 혹은 국채는 채권이다.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으로 이걸 처음에 외국인한테 판다고 했다. 그러다 말이 안 되니 내국인에게 팔게 된다. 그러면서 국민회가 임시정부로 보내던 애국금을 걷으면 안 된다고 한다. 공채가 애국금을 대체하는 게 아닌데, 이승만은 애국금을 없애고 미주의 재정관할권을 장악하려 했다. 당연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 자금 줄이 마르게 된다. 이승만은 자기가 권력을 가지면 다 잘 될 줄 알았겠지만, 그렇게 안 됐다.

▲박인규 프레시안 고문(좌)과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우). ⓒ돌베개 정지연

이승만의 농간과 '공채표 세일즈맨' 김규식

박인규

근데 애국금은 사람들이 돈을 내는 거고, 공채는 국민회가 빚을 얻는 것인데, 둘 다 하면 안 되는 거였나?

이승만

이승만은 안 된다고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수립될 때 이승만이 임시정부 정통성을 넣은 이유는, 임정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을 해 본 사람이 이승만이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주장은 국민회는 민간단체고, 자신은 임정 대통령으로서의 공식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하는 게 정당하고, 자기가 하지 말라면 정부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니 중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위력으로 관철시켰다. 그에 따라 실제로 공채를 팔고 다닌 게 김규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김규식은 명망이 높고, 대표성이 있으니까. 뇌종양 수술을 하고서도 몇 개월동안 미 전역을 다니면서 약정 받고 현금 가져오고, 그런 일을 했다. 그러다가 하와이에서도 공채를 팔아야 하는데 김규식 후배이자 이승만 지지자였던 송헌주가 하와이에서도 미주처럼 국민회가 아니라 구미위원부가 돈을 걷어야 한다고 하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는 국민회가 자금을 거두게 내버려 두라고 했다. 송헌주는 당연히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자신이 할 일인 하와이 재정 수합을 실행하려 했고, 이승만은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잘라버렸다. 이때 김규식도 더이상 이런 농간에 놀아날 수 없다고 해서 그만두게 된다.

박인규

이승만에게는 내부 권력 투쟁에서 자기가 승리하는 것이 전체의 이익보다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병준

이승만은 그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송헌주를 날리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애국금을 없애고 다 공채로 하라더니 하와이는 또 예외라는 논리를 쓴다. 소위 자기 왕국인 하와이에서는 애국금을 걷으라는 거다.

박인규

1919년이 김규식의 일생에서는 대단히 빛나는 한 해였지만, 1920년에는 미국에 와서 외교 업무는 못 하고 그냥 공채 수금원으로 일하다가 사임하고 중국으로 돌아오고 만다. 이게 대단히 중요하게 보였다. 3.1운동의 결과로 1919년 4월 11일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본토는 물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인들의 에너지가 모였을 때 뭔가 계속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이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즉 상하이 임정이 독립운동의 중심 기관이 되어 대동단결을 했는데, 실제로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된다.

정병준

상하이 임시정부는 외교적인 방식으로 정부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외교 독립노선이다. 파리 강화회의가 첫 시도였고, 두 번째가 1922년 이승만 쪽에서 추진했던 워싱턴 군축회의다. 두 가지가 모두 실패하면서 임시정부가 대위기에 처하고, 이 때문에 이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는 거다.

1919년의 기운을 잘 살렸어야 했다. 독립군의 국내 진격 작전이 1919~1920년에 걸쳐 폭발한다. 3.1운동에서 이어진 에너지다. 이걸 잘 갈무리해야 하는데, 이승만은 미주에서 돈 문제에만 열심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자금을 모으고 기세를 높여서 행동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권력 장악에만 몰두하면서 3.1운동에 기댔던 사람들의 에너지를 쇠잔하게 만들었다.

▲이승만과 김규식. 1919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이승만이 뭐길래

박인규

한 가지 궁금한 건, 이승만이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대통령을 시켜주고, 공채 요구 같은 무리한 요구도 결국 들어줬는가 하는 점이다. '이승만 신화'가 그렇게 대단했나?

정병준

3.1운동 이후 많은 임시정부 각료 명단 등에서 이승만이 기본 국무총리급 이상이다. 왜냐하면 외교 독립론자로 미국과 친하고, 대통령 윌슨의 제자고, 미국 박사고 전도사였기 때문이다. 3.1운동 때 이승만이 위임통치론을 말하니까 신채호가 그랬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 먹었다"고. 그런데 우리는 이것만 알고 있는데, 뒷얘기가 더 있다. 그 회의에서 어떻게 진행됐냐면, '그래. 그럼 신채호도 대통령 후보에 이름 올리고 투표를 하자.' 투표해서 이승만이 당선되고 신채호가 뛰쳐나간다. 당대에 독립운동 지도부에 있었던 민심의 추향이 이승만을 인정했던 측면이 있다. 그 사람들은 이승만이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거다.

나름 독립운동을 하면 공공선을 위해 판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볼 때 이승만은 사실 그런 게 없는 사람이었다.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문 기간은 1921년에 5~6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안 오려고 했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 미주에서 대통령 행세하는데 권위는 결국 임시정부에 있었으니까. 임시정부가 이승만의 다른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줬다. 그리고 하나만 요구했다. '상하이로 와서 우리랑 같이 일하자.' 이승만이 안 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왔지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정 방침, 위임통치 문제, 자금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이승만이 다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하이를 떠나게 된다.

박인규

그 와중에 김규식도 공식적으로 임정을 떠난다. 1921년 상반기가 되면 임정은 사실상 와해 상태다. 이 당시 임정에 마지막 결정타가 되는 게 결국 태평양회의인데, 이것은 일종의 1차 대전 후 군축회의, 평화안보회의다. 이때 이승만이나 서재필이 미일 갈등설, 미일 개전설을 말한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1920년 1월 서재필이 미국의 신임 하딩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과 중국이 협력해서 정식으로 일본에 개전을 선언하면 미국이 도울 수 있지 않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20년 후에는 현실이 되지만, 이때 이승만과 서재필은 미일 개전설에 많은 기대를 실제로 한 것인가?

정병준

사실 여기엔 믿기 힘든 사정이 있다. 기회 포착적인 생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서재핑이 하딩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제를 증폭시켰다. 아마도 그저 '스몰토크'를 했는데, 서재필이 주관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 같다. 이승만도 상하이에서 궁지에 처해 있다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미일 개전 가능성을 확대 선전한 것 같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너희들처럼 이런 독립운동 하는 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이 개전하게 되면 기회가 생길 수 있으니 여기에 전심전력 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이상재가 '조선인민치태평양' 선언을 도장 찍어서 보낸다.

여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자고 해서, 1차 대전 후 호황이 다 끝나는 시점인데 한인들이 수만 달러를 모아서 지원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그렇게 되니 비난의 화살이 외교 독립노선의 상징인 임시정부로 오게 되고, 결국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개조파, 유일파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승만은 탄핵하고 구미위원부도 해체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리하면, 워싱턴회의는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블러핑, 즉 '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직접 준 사진명첩.

박인규

이승만은 파리 강화회의에 가려다 못 갔다. 기대는 있었나?

정병준

없었다. 사실 윤치호랑 거의 비슷한 입장이었다. 대표로 선정해 주니까 그 타이틀은 좋지만 실제로 자기가 파리에 가서 뭔가를 했을 때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하와이에서 출발하더니 샌프란시스코에서 입원해버린다. 그 다음에 정한경이 '파리에 안 가면 세컨드 옵션이 뭐냐'라고 하니까 '위임통치 청원이다' 한 거다. 그런데 이승만이 생각지도 못한 3.1운동이 터지고, 여기서 갑자기 총리급 대통령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이승만은 대통령 직위로 구미위원부 같은 걸 만들어서 뭔가 호령해보려고 하게 된다.

박인규

아편전쟁으로 서양이 중국의 문을 열어 자신들끼리 중국 시장을 나누고 있는데, 일본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서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 이 상황에서 중국 진출을 노리던 미국은 1898년과 1899년 이른바 '문호개방(open door)' 선언으로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공정한 권리를 요구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중국 시장을 놓고 미일 간 갈등의 소지가 있기는 했겠지만, '192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인다', 이건 좀 너무 나간 얘기 같다.

정병준

사실 태평양회의는 해군 군축회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이 바란 것은 영일동맹 해체였다. 그리고 태평양의 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해군 군비 축소, 태평양 지역 질서 정리였는데 여기서 일본이 넘버 3가 된다. 영국, 미국, 일본 순서로. 태평양회의 끝난 직후에는 미일 간에 정말 우호적인 분위기가 넘쳐났다. 1922년 이후에 미일 우호를 상징하는 공작상을 하와이에 세운다. 이 뜻은 태평양지역을 영일동맹이 아니라 미국이 개입하는 다자 체제로 바꾼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일개전설이라는 것은 매우 과장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결국 이승만, 서재필은 완전히 실패하면서 신한민보도 문 닫게 되고 구미위원부도 임시정부가 해체하라고 하고, 이승만도 탄핵된다. 이후 임시정부는 사실상 대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박인규

워싱턴회의 이후 1931년 만주 사변 전 10년 동안은 임정의 침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정병준

만주 사변 이후 윤봉길, 이봉창이 등장하기까지는 임시정부나 중국 내 한인 운동 세력은 완전히 침체기였다.

(⑤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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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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