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워싱턴과는 다르다", 극동민족대회 vs 워싱턴회의
박인규
<김규식과 그의 시대> 2권은 '3.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라는 부제 아래 시기적으로1919-1921년, 김규식의 외교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었다. 1919년 8월까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김규식의 외교 활동을 그의 독립운동의 절정이었다고 한다면, 이후 미국에서의 공채 판매와 이에 따른 이승만과의 갈등, 그리고 임정의 분열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고 할 수 있다.
1921년 중국으로 돌아온 김규식은 1922년 여운형 등과 함께 모스크바극동민족대회에 수석대표로 참석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임시정부를 새로운 독립운동 기관으로 재창조하려 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한다. 이후 10년 가까이(1923-32년) 상하이, 톈진 등에서 교육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자 한중 합작에 의한 독립운동 노선을 추구하며 1933년 두 번째 도미 외교를 벌인다. 그러나 이 때는 대공황 시기로 미주 교포들의 후원도 미약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한편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 후원으로 김구 주도의 임시정부와 김원봉 주도의 의열단(민족혁명당)의 무장 투쟁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1933년 김규식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했으나 얼마 안 돼 사직하고 1935-42년에는 쓰촨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일한다. 그가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1943년으로 1944년에는 부주석을 맡게 된다. 다시 말해 1922년 이후 김규식의 독립 활동은 이전에 비해 다소 침체했다고 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1922-45년을 다루는 3권은 '냉정과 열정 사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김규식의 활동보다는 이 시기 중국 한국독립운동의 추이를 다루고 있다. 가장 주요한 주제는 1921년 이래 분열로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를 다시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선 김규식의 활동을 살펴보자.
김규식은 이 시기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가한다. 1차 대전을 마무리하고 세계 평화와 안보를 위해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군비 축소와 세력 균형에 초점을 둔 워싱턴회의를 한 반면, 러시아는 1917년 혁명 이후 미국, 일본 등 서방의 군사개입에 맞서 극동지역을 안정시켜야 했다. 극동 안정의 핵심은 한국이었다. 그래서 한국 대표단이 제일 많았다. 주석단에 김규식, 여운형이 들어갔고, 김규식이 개막 연설을 하고 한국의 혁명 운동을 정리했다. 굉장히 큰 대회였다. 책에 따르면 국망 이후에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글이 바로 이 김규식의 발표문이었다. 미국의 이승만, 서재필이나 국내의 이상재, 송진우 등이 워싱턴회의에서 독립의 계기를 찾으려 했다면 김규식, 여운형은 러시아의 협력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에서는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당시의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아니라 중앙혁명 지도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 레닌이 지원한 혁명 자금(40만 루블)을 놓고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임시정부 등이 그야말로 난장판을 벌이면서 1922년 4월에 결국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실패로 끝난다. 김규식이 미국에서 인문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서방식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인데, 극동민족대회에서는 공산당 후보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비판하고 러시아를 긍정하는 '대변신'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정병준
당시 상하이에서의 사상적 교류나 기풍이 아주 급격하게 변화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걸었던 미국, 기독교, 민족자결주의, 외교 독립노선에 입각한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규식, 여운형, 현순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다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로 갔다. 제일 중요한 건 파리강화회의가 한국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김규식이 미국에서 활동할 때 지원은 오로지 교포들로부터 이루어졌고, 미국 조야의 도움은 없었다. 그 자금을 둘러싸고 이승만이 독점하려는 행각을 벌였다. 반면 신생 러시아는 달랐다.
러시아는 당시 시베리아 출병 이후 극동이 굉장히 불안했다. 당시에 러시아 전선이 6~7개나 됐다. 특히 일본을 상대해야 했는데, 그 때문에 극동공화국을 세워서 일단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여러 전선의 내전을 안정화하기 위해서 제일 신경 쓴 게 사실 시베리아 쪽이었다.
그러면 어떤 나라가 필요했을까. 첫째는 코리아, 그 다음 중국이나 몽골이었다. 당시 대회 제목이 '약소민족 해방 대회'가 아니라 '극동민족대회'였던 이유다. 일본의 시베리아 진출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 중국, 몽골을 키워야 된다. 시베리아에 당시 수만 명의 병력을 거듭 보낸 게 일본이다. 러일전쟁도 겪어봤고. 그래서 레닌이 전폭적으로 40만 루블이라는 자금을 주면서까지 한국을 도우려고 했던 것이다. 40만 루블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걸 금괴로 줬다. 혁명 후에 러시아 경제가 굉장히 어려웠다. 여운형의 당시 기록을 보면 '주는 빵에는 지푸라기가 섞여 있어서 먹을 수 없어서 베개로 쓴다'고 했다. 자기들이 그런 상황인데 조선을 지원하겠다는 의향을 표현한 거다. 파리강화회의에서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후원, 우호적인 반응을 전혀 받을 수 없었는데 러시아는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온 것이다. 혁명운동, 해방운동 후원하고 게다가 자금도 지원하고 대회도 하니까 민심의 추향, 상하이 젊은이들이 완전히 하루아침에 다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로 변했다. 이 상황을 주도한 건 이르쿠츠크파였다.
당시 김만겸이 운영하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한국 공산주의운동 화요계의 삼총사,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 머물렀다. 셋 다 1900년생, 3.1운동 당시 19, 20살이었다. 모두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고 뜨거운 몸과 마음으로 뭔가 해보려고 상하이에 왔다. 그런데 상하이에 오니까 생계부터 해결이 안 됐다. 그러다 김만겸의 사회과학서점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배우게 된다. 러시아혁명을 풍문으로만 듣다가 첫 번째로 목격한 조선인 엘리트들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건 극동민족대회를 경험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수도 모스크바를 경험하고 나서 첫 순례자로서였던 것이지, 그 이전에 이념적으로 동화되어서 그리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들이 속해 있던 이르쿠츠크파의 지도자가 현순이었다. 현순은 사실 감리교 목사였고, 친일파였다. 3.1운동 때 상하이에 와서 만세운동을 알리고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갔다가 이승만이랑 대판 싸우고 쫓겨온 사람이다. 민족자결주의, 친미, 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일종의 독립운동 방편으로 미국 중심의 외교, 독립 노선에서 러시아 중심의 모스크바 중심의 외교로 전환한 것이었다.
박인규
실제로 이념에 충실했나?
정병준
그런 측면은 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러시아로부터 지원이 들어오고, 혁명의 기운과 에너지가 왔다. 복음주의적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를 퍼트리고 자금을 주고 모스크바 여행이라는, 그때로 보면 정말 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여기에 50명이 참가했다. 어마어마한 지원이었다. 50명의 한국 대표단이 혁명을 경험하고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박인규
러시아는 조국 수호라는 목표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자금을 포함해서 큰 도움을 줬다.
정병준
러시아의 제일 큰 목표는 이제 일본과의 전선에서 도움을 얻는 것, 그리고 워싱턴회의에 맞불을 놓는 것이었다. '너희 제국주의 승전국들끼리 회의를 하는데, 우리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해서 국제 연대회의를 한다.' 그래서 굉장히 후대를 하는 것이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이 참가자들을 다 만나준다. 최상급의 대우를 한 거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레닌을 두 번이나 만난 것 아닌가.
임팩트가 달랐다. 미국에서는 토머스 하딩이 어떻고 하면서 서재필, 이승만이 떠들었지만 근처에도 못 가봤다. 재미한인 돈을 싹 모아서 추진한 건데 '폭망'했다. 표면적인 성과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가 훨씬 큰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레닌 자금에 얽힌 격투는 사실 소련 붕괴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외교문서들이 비밀 해제되면서 그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박인규
당시에 이상재, 송진우 등 국내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워싱턴회의를 많이 지원했다고 한다.
정병준
국내에서 이승만의 가장 큰 지지자가 이상재였다. 이승만이 유일하게 선생이자 존장으로 인정한 게 이상재다. 이상재는 이승만의 감옥 동지였다. 이상재가 이승만을 예쁘게 생각하고 지원했다. 유명한 얘기가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이상재한테 '내가 밤낮 죽으로 연명한다'고 편지를 보낸다. 오트밀 먹는다는 얘기였다. (웃음) 거짓말은 아닌데, 어쨌든 이상재는 이승만이 조석으로 고생한다고 돈을 모아 보내줄 정도였다. 이승만은 3.1운동 시기에도 이상재에게 돈을 내놓으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이상재는 기호파 양반, 변법 개화파, YMCA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등의 국내 핵심이었다. 사실 윤치호도 이상재 밑에 있던 사람이다. 이승만이 태평양회의에서 한국인 100만 명 서명을 내면 한국 입장이 관철된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데, 이상재가 그 명단을 만들어서 도장을 찍어서 보냈다. 그게 <태평양회의서>라고 하는 굉장히 긴 연판장이다. 거기에 이강(의화군) 이름부터 온갖 사람 이름이 들어 있다. 독립 자치 청원을 한 거다. 역시 무시당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실 태평양회의는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서재필이 외교의 기회가 있다고 하니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부풀린 것이다. 이승만이 그때 정말 죽을 뻔했다. 돈이 미국에서 와야 하는데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 현순이 돈을 안 줬다. 현순은 공사관 설립을 한다고 해야 돈을 보낸다고 했다. 이승만이 어쩔 수 없이 공사관 설립을 하라고 한다. 이것 때문에 나중에 난리가 난다.
이승만은 여권도 없었다. 이것도 뛰어난 재주인데, 1921년 상하이에 왔던 이승만은 여권 없이 미국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주한 총영사였던 버그홀츠가 상하이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배에 타고 있어서 거기에 로비를 해서 온다. 이승만이 그 고생을 하고 비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서, 나중에 미주의 자기 정적인 안창호, 박용만을 '볼셰비키'라고 투서해서 문제를 만든다. 이 사람들은 당시 대다수 한국인이 그랬듯 중국인으로 입적해서 중국 여권으로 들어왔는데, 한국인인데 중국인으로 행세를 하며 '미국 영사를 속여서 비자를 얻은 거다', 뭐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든다.
레닌 자금을 둘러싼 부끄러운 결전
박인규
극동민족대회가 끝나고 김규식은 이른바 4인 외교교섭단의 대표가 되어 활동한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레닌 자금을 둘러싼 소동이 일어난다. 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 갈등이 얽힌 이야기인 것 같다. 자유시참변도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정병준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이 주축이다. 즉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이들은 한국계 러시아인으로서 러시아 내에서의 지위가 가장 중요했다. 한국 독립은 그다지 안중에 없었다. 러시아 혁명 성공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반면 이동휘 등 상하이파는 한국인들이 주축이다. 당연히 한국 독립운동이 더 중요하다는 거였다. 독립 먼저 하고 그다음 혁명을 하는 게 한국의 코스라는 거다. 처음 레닌 자금을 상하이파가 받는다. 이동휘는 자기가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이름으로 받았으니 공산당에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레닌이 준 돈은 외무인민위원부(외교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 준다고 생각한 거다. 이걸 알게 된 임시정부가 돈을 내놓으라고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사람도 죽는다(김립). 이르쿠츠크파는 혁명 운동에 쓸 돈을 한국 독립에 쓴다고 반발하면서 상하이파가 자금 횡령을 했다고 주장한다.
자유시참변 이야기를 하면, 핵심은 3.1운동이 일어나니까 독립군들이 국내 진공 작전을 하고, 일본은 토벌한다. 그게 1920년에 경신참변, 간도참변이다. 그 과정에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다. 압력이 심해지니까 독립군이 러시아령으로 넘어가서 자유시에 결집하게 되면서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두 계열의 부대가 병립하는 상황이 된다.
독립군의 목적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다시 만주나 중국으로 넘어가서 싸운다는 거였는데, 이르쿠츠크파는 이들을 다 러시아 적군 산하 한인 부대로 편성하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독립군이 반발한다. 이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지고, 이르쿠츠크파가 당연히 유리했다. 독립군 중에 같은 민족끼리는 안 싸운다고 해서 강에 뛰어들어 익사한 사람도 많았고 행방불명된 사람도 많았다. 자유시참변을 보면, 이르쿠츠크파는 동족의 군대를 죽인 혐의를 받는다.
레닌 자금 이야기는 그 이후의 이야기다. 이들이 모스크바에서 싸움을 벌인다. 당시에 자유시 참변 관련자 재판도 있었다. 여운형, 김규식, 홍범도 등이 이르쿠츠크파의 초청으로 그들 버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판을 참관한다. 적군 휘하에 편입하려고 하는데 말을 안 듣고 무장 저항을 했다, 이런 내러티브였을 것이다. 재판은 몇 명을 처형하고 대부분 방면하는 것으로 끝난다. 김규식의 반응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여운형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는 연구들이 있다.
레닌 자금을 두고 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 임시정부가 싸우는데, 어쨌든 극동민족대회에서 임시정부가 한국 혁명운동의 중심이 아니고, 새로운 민족 혁명운동의 중심 기구를 만들기로 했으니까 지금 50명 모여 있는 이들이 대표가 되어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에 김규식이 동조한 것 같다. 김규식이 명망이 높으니까 내세워졌다.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외교 대표였던 것이다. 그렇게 싸우는데, 레닌이 이 상황을 보니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이어서 결국 다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국민대표회의를 열어서 새로운 혁명지도부를 만들라고 한다. 그래서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냉정히 보면, 진행 과정에서 러시아도, 한국도 다 잘못이 있었다.
박인규
책에 보면 돈과 관련해서 난장판이 벌어지는 모습이 자세히 나온다. 외부 자금이라는 게 통일의 촉매가 될 수도 있지만, 분열의 씨앗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여러 돈 문제가 나온다.
정병준
극동민족대회 이후 중국이나 일본 공산당은 후끈 달아올라서 조직을 만든다. 대회가 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다. 반면 조선에서는 2개로 공산당이 분열된 상태였고, 그게 더 심해졌다. 레닌 자금이 너무 빨리 상하이파의 손에 넘어간 게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박인규
김규식, 여운형은 극동민족대회 주석단까지 올라갔다. 김규식은 이르쿠츠크파에게 끌려다닌 것 같고, 여운형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정병준
김규식은 자신이 극동민족대회에 갔다는 걸 나중에 얘기를 잘 안 하려고 그랬다. 자기 활동의 전반적인 흐름과는 잘 안 맞으니까. 그리고 활동이 너무 치욕적이었으니까. 김규식이 사실 가장 극단적으로 움직였던 시기였던 것 같다.
여하튼 간에 김규식은 나름대로 임시정부와는 다른 조직이나 다른 중심 코어를 만들어 보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르쿠츠크파는 김규식을 내세웠지만, 당시 상황에서 결정권이 김규식한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규식이 미국에서 공채 세일즈 하면서 학을 떼고, 상하이 임정에서 이승만에 대해서 또 한 번 학을 떼고, 그 이후로는 임정을 반대한 건 아니지만 비임정 계열로 계속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이 당시 대통령을 그만뒀으면 김규식도 임정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계속 버티면서 타이틀을 지키려고 하니까, 그럼 내가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이승만이 임정에 알박기를 한 게 사실 이동휘, 김규식, 안창호가 임정을 떠나는 이유다. 임정에 일정한 애정이 있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이승만이 붙박이로 '배 째'라고 하니까 떠나서 다른 걸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된 것이다.
박인규
어쨌든 외부적으로 한인들한테는 극동민족대회가 굉장히 성공한 듯 보였고, 그 여세를 몰아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된다. 임정을 혁신하든가, 대체하든가 결정을 하라는 거였다. 레닌이 돈을 준 이유가 결국 최고 혁명기관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기관을 만든다. 책을 보면 임정에 개조파, 창조파, 유지파가 있는데, 대회의 주도권을 가진 이르쿠츠크파(창조파)가 지리멸렬한 상황을 만들고, 그러다가 다 떨어져나가고 처음의 4분의 1 정도의 사람들이 국민위원회를 결성하고 새로운 당, 정부를 만들지만, 결국은 망신스럽게 실패하고 만다. 이 과정에 김규식이 함께 했다. 김규식의 정치적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극단으로 달려간 김규식의 실패
정병준
그때는 김규식이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봐야 한다. 사실 국민대표회의에서 안창호가 주도권을 잡았어야 했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안창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제일 큰 어른이고, 실질적으로도 그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성립되어 그때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건 안창호의 헌신 때문이었다. 야심도 있었지만 헌신이 컸다.
이승만은 대통령 행사나 하고 돈이나 뜯어내고 있을 때, 독립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니까 안창호가 달려와서 중심이 되어 자금도 모으고 사람도 포용해서 운영한 것이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처음 인원수는 개조파가 제일 많았다. 임정을 혁명적 기관으로 개조하자는 게 목표였다. 이승만 같은 사람은 제외하고 혁명적 노선을 취하는 이동휘 같은 사람은 함께해서 잘 해보자는 방향이었는데, 이르쿠츠크파가 조직적으로 '안창호 죽이기'에 나선다.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 동조한 거 아니냐, 대의원 자격이 없다', 뭐 이런 식이었다. 국민대표회의에 모인 사림이 100명에 가까웠다. 당시 임시정부 의정회의에 20명 안팎으로 모이던 시절이었다. 대단히 많은 세력이 모인 것이었고,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 중심 기관으로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있었다. 제대로 됐다면, 임시정부를 흡수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창조파 사람들이 안창호를 매장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최대 지분을 가진 세력을 지워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회의가 정상적으로 순행이 안 되고 안창호가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안창호의 체면이 떨어지고, 논란 끝에 유지파가 떨어져 나가고, 개조파도 희망이 없다고 떨어져 나가고, 결국 창조파만 남는다. 이들끼리 '한 공화국'이라는 걸 선포한다. 임정 대신 공화국을 만든 거다. 그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니까 현지 독립운동가들이 너희는 정부기관이 아니라는 지적을 하게 되고, 그러니 자신들은 공화국이 아니라 독립당이라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당시 코민테른은 정부가 아니라 민족통일전선 단체와의 연계를 수립하고자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인규
그 과정을 거치면서 파리강화회의와 극동민족대회에서 외교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쌓아 올린 김규식의 명성과 정치적 자산이 큰 타격을 받았다.
정병준
그래서 그 이후 1930년대 초반까지 김규식이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정치 활동을 못 하게 되는 큰 좌절감이 생겼다. 당장은 운동 전선에서 면목을 일신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
박인규
1924년부터 1933년까지, 교육자로서 활동을 했다. 김규식은 왜 그렇게 행동을 한 것인가?
정병준
김규식의 독특한 특성인데, 그는 생업이 있었다. 김구는 죽으나 사나 독립운동을 했다. 반면 김규식은 미국에서 교육받은 특징이랄까, 교육자로서의 생업이 항상 비빌 언덕처럼 있었다.
박인규
김규식은 '실의와 온축의 10년'을 일상인으로서 살다가, 1933년에 도미 외교로 다시 활동 전선으로 나온다. 한중연대를 배경으로 한다.
(⑥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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