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일, 서울의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에서 '고운: 기억, 상처, 트라우마 토론회'가 '고운동지회 준비위'의 주최로 열렸다. 고운은 고등학생운동의 준말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10대들의 조직적·집합적 운동을 가리킨다. 최근 주류 역사 서술에서 지워지고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고등학생운동을 기억하고 의미화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토론회는 한국 현대사에서 고운을 복원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로, 고운을 단순한 성공이나 실패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 그 과정 전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기록함으로써 비판적 유산으로 만들고자 마련되었다. 특히 고운을 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학교, 정부, 사회의 탄압을 겪으며 좌절하고 상처받았고, 기억을 꺼내놓기를 어려워하는 사례가 많았기에 그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이번 토론회를 제안하고 조직한 조한진희(<고등학생운동사> 기획자이자 공저자)는 "고운을 하며 새겨진 고통의 연원과 실체를 개인적인 것으로 남기지 않고, 함께 만나서 그 이유와 의미를 물으며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적 경로를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발표는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에서 활동했던 조한진희, 세일고등학교에서 활동했던 이원석, 중대부여자고등학교에서 활동했던 김명희, 한성고등학교에서 활동했던 이형신, 동터오름학우회에서 활동했던 최윤식이 맡았다.
본격적으로 토론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한진희는 지난 몇 년 간 고운과 관련해서 이루어진 활동을 공유했다. 2020년부터 시작된 고운 기록화 작업은 흩어져 있던 개인들의 경험을 모아 사회적 의미를 갖는 역사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고등학생운동사> 책을 출간했고 언론 연재와 영상물 기획, 토론회, 북토크 등의 활동으로 고운은 현재 사회에 접속했고, 현재의 청소년인권운동과도 연결되었다. '고운동지회'는 이러한 활동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한 제안이다. 어린이·청소년을 사회를 변혁하는 투쟁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알리고자 했던 고운 기록화의 문제의식은 청소년인권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자 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토론회에서는 고운관련 활동에 대한 이후 제안이 이어졌는데, 청소년들에게 <고등학생운동사> 책을 배포하는 사업이나 고등학생운동 열사 합동추모제 등의 아이디어는 고운과 청소년인권운동이 서로에게 든든한 연대자이자 지지자로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0대 시기의 운동이 남긴 자긍심이자 상흔
이어서 조한진희는 고운이 당시 고운 활동가들에게 남긴 이중적 의미인 ‘자긍심’과 ‘상흔’에 대해 조명했다. 자긍심의 측면에서 고운은 삶의 가치와 인간다운 삶의 길을 터준 계기였으며 개인의 삶과 투쟁의 자양분이었고, 현실 문제 제기의 원동력이 되는 원형적 경험으로 기억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 이면에는 여전히 진행 중인 고통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고운 활동가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복합적이다. 교사나 교육당국에 의한 무자비한 구타나 심문과 감시 그리고 1990년대 공안정국 아래서 고운을 타깃으로 자행된 탄압과 같은 국가폭력의 피해 , 전교조 교사 해직에 맞서 싸웠으나 이후의 교사운동에게 외면당한 데서 비롯된 배신감, 상급 운동 조직의 노선 변경에 따른 유기, 그리고 운동사회 내 성폭력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들로 인해 고운은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는 단순히 고운을 회고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운동의 실패 원인과 소멸 과정까지 분석해야 비로소 '비판적 유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발표자인 이원석은 고운 활동 당시 억압적인 환경에서 저항하며 겪은 신체적 폭력과 심리적 공포에 대한 경험을 고백하며 그 경험이 현재의 삶과 정치 참여에 어떤 기준으로 남아 있는지 이야기했다. 또한 강압과 통제에 대한 불응과 함께 힘을 모아 문제를 바꾼 경험은 어렴풋한 승리의 마음을 주었지만, 되돌아보면 그 과정에서 '나서는 사람은 결국 좋지 않은 일을 당한다'는 공포심을 다른 학생들이 학습하게 된 것은 아닌지 늘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투쟁과 징계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지만, 그 경험을 딛고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던 그의 이야기는 정상적 생애주기(입시 혹은 학생다움) 강요를 이탈하고 거부해온 청소년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고, 정치적 실천을 통해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큰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 발표자인 김명희는 고운의 경험을 국가폭력과 트라우마라는 맥락에서 재해석했다. 특히 5·18 사후노출자(혹은 사후노출 피해자) 개념을 바탕으로, 고운 활동가들이 겪은 구체적 사례를 조명하며 집단적 트라우마와 생애사적 피해를 인권 기반 접근으로 확장했다. 인권침해 피해자의 정의는 피해를 돕거나 방지하려 개입하다가 새롭게 피해를 입은 사람까지 포함하는데, 고운 활동을 하며 학습권의 침해나 공권력에 의한 피해를 경험한 이들, 전교조 교사나 다른 친구들을 돕다가 생애사적 피해를 경험한 모든 이들이 광의의 피해자로 간주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명희는 피해를 경험한 이들이 인권 침해 사건에서 권리를 가진 행위자이며, 그렇기에 고립된 기억 속에서도 자신의 경험이 현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고, 그것을 넘어서는 트라우마의 행위성과 역동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네 번째 발표자인 이형신은 고운 시기에 학생들이 싸웠던 이슈와 대상을 재조명하며 입시 경쟁 체제와 군사 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 등 구조적 모순을 학생의 위치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실천에 대해 통찰했다. 학생으로서 학교 현장에서 경험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활동이었으며 근본적인 사회 변혁에 대한 지향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학도호국단 체제의 잔재, 수사기관을 방불케 하는 학생부의 통제, 학생회 및 서클 활동의 극심한 제한, 사학 비리 등 학생인권과 자치권 부재에 맞선 고운의 학내 민주화 투쟁의 흐름을 설명했다.
다섯 번째 발표자인 최윤식은 '실패한 기획 좌절한 운동, 고운 - 87체제 형성기 고운의 의미와 한계'를 주제 삼았다. 고운이 이전의 엘리트 중심 학생 운동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달랐는지, 그리고 그 운동이 왜 좌절되고 개인의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분석했다. 이전의 학생운동(광주학생운동, 4·19, 60년대 한일협정 반대투쟁 등)이 소수의 엘리트주의에 기반했다면, 고운은 대중 교육 체제에서 발생한 자발적이고 조직화된 저항이었으며 학생들은 사회 진출을 위한 입시 압박과 군사 정권에 순응하는 교육 현실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운동 주체로 형성했다고 밝혔다.
그는 고운의 실패는 당시 존재하던 운동 진영(정치 조직 등)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1991년 투쟁 실패 후, 활동가들이 '패륜아'라는 낙인과 함께 운동의 좌절을 겪으면서, 조직적 해결은 되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져 트라우마가 형성되었을 것이라 분석했다.
여전히 투쟁하는 청소년이 겪는 일
발표가 끝난 이후 토론에서는 다양한 참여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말 제주도에서 흥사단고등학생아카데미에 참여했던 경험과 제주도의 고운 활동 조사와 기록의 어려움, 지역적 특성 및 운동의 단절부터, 현재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대상화, 윤석열 퇴진 광장을 통해 조직된 시민들의 투쟁 지속가능성 등 세대를 아우르는 운동의 연속성과 단절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함께 공유했다. 특히 학교라는 환경을 벗어난 청소년들이 겪는 스트레스나, 청소년들이 당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밀려나는 현실에서, 조직화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청소년인권운동의 오랜 숙제이기도 한데, 고운 토론회에서 공동의 문제의식으로 이야기될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행동하고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많은 탄압과 어려움에 노출된다. 공고해진 학교 체제 속에서 이를 비판하고 운동의 주체로 나서는 청소년들은 더욱 열악한 위치로 밀려나기도 하고, 주거와 생존이 위협받게 되기도 한다.
이번 토론회는 과거의 실패와 좌절의 기억 위에서 계속 새로운 삶을 모색해 세대 간의 경험을 연결하고,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실질적인 연대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만 언젠가 모든 지역의 고운의 목소리가 기록될 수 있기를, 그 개인의 경험과 지식을 모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운에 대해 더욱 전체적인 이야기와 그림을 구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고운의 이야기들이 과거의 역사로만 다뤄지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함께 고민하며, 10대의 정치적 실천과 주체성도 제대로 이야기되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가 사회 변혁의 주체이자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청소년을 인정하는 것은, 고운에 대한 탄압과 낙인찍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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