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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꼭 해야 했어요”… 여섯 번 무너진 교실을 지킨 '송욱진 미산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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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꼭 해야 했어요”… 여섯 번 무너진 교실을 지킨 '송욱진 미산초 교사'

프레시안 전북취재본부 연말기획 <전북과 사람> ③송욱진 전주 미산초 교사·전 전교조 전북지부장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거센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혼란 속에 시작된 2025년은 결국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을 거치며 또 한 번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권력은 교체되고, 국정 운영의 방향도 달라졌지만, 사회 곳곳에 켜켜이 쌓여온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은 여전히 지역과 현장을 짓누르고 있다.

전북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역소멸 위기, 새만금 논란, 교육·환경·노동 현안까지 긴박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있는 가운데 그 시간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를 헤쳐나가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프레시안 전북취재본부 연말특집기획 <전북과 사람>은 상대적으로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모든 것이 촘촘히 엮여 있는 ‘지방권력의 기득권’ 구조 속에서 홀로 질문하고, 침묵을 거부하고, 불합리를 견뎌 온 이들의 활동상을 다시 불러내 본다. 때로는 고립되기도 하고 지역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 사회 정의와 상식, 존엄을 지키기 위해 '외롭지만 멈추지 않았던 이름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2025년, 전북을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 침묵 대신 질문을 선택했던 사람들의 한 해를 통해, 우리는 다시 지역 민주주의의 좌표를 확인하려 한다. <편집자주>


▲전주 미산초 송욱진 교사가 국회 앞 1인 시위 현장에서 “저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육은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프레시안 / 송욱진 교사 제공


여섯 번의 담임 교체, 끝나지 않은 민원

아동학대 신고 다섯 번, 경찰 출동 아홉 번

배움보다 불안을 먼저 익힌 교실

그럼에도 “제가 하겠습니다”를 택한 교사의 선택


◇ 2025년, 교실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있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민주주의가 흔들리던 지난해, 교육 현장은 또 다른 종류의 ‘붕괴’를 겪고 있었다. 전주 미산초.

학부모의 반복되는 악성 민원으로 담임이 여섯 번이나 교체된 교실, 신고와 고발이 일상이 되어버린 학교, 교사들이 ‘그 학급만큼은 맡지 않기 위해’ 전출을 고민하던 공간이었다.


그 혼란의 한복판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교사가 있었다. 전교조 전북지부장 임기를 마친 뒤,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그 학급의 담임을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사람.

전북 교육의 가장 어두운 골짜기에서, 조건 없는 ‘버팀’으로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육의 최후 경계를 지켜낸 송욱진 교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미산초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한 통의 전화였다. <PD수첩>이 방영된 뒤, 악성 민원 학부모를 규탄하기 위해 기자회견에 나섰던 한 학부모가 오열하며 전화를 해왔다.

방송 이후 오히려 아이들이 악성 민원인의 실체를 알게 됐고, 그 뒤로 학교에 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는 이미 30일 가까이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송욱진 교사는 그 전화를 이렇게 기억했다.
“PD수첩에 미산초가 나와서 선생님들은 위로를 받았을지 몰라도, 아이들은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그날 마음을 정했다. ‘내가 저 교실로 가야겠다.’

◇ “아동학대 신고만 다섯 번… 경찰 출동이 아홉 번이었습니다”

현실은 각오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송 교사가 미산초에 부임한 올해 1학기 동안 접수된 아동학대 신고만 다섯 건. “째려봤다”, “정서적으로 위협했다”, “안내장을 건네며 책상을 쳤다”는 이유였다. 3월 한 달 동안 학교로 출동한 경찰만 아홉 번에 달했다.

그는 매일 쉬는 시간마다 창문 너머 주차장을 가장 먼저 바라봤다. “오늘은 경찰이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찰의 출동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민감하게 알아챈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이었다. 교실 구조상 고개만 살짝 돌려도 교문이 보였기 때문이다.

“경찰이 올 때마다 아이들의 눈빛이 먼저 흔들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수업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죠.”

그가 해명을 위해 교장실로 향하는 동안, 교실에 남은 아이들은 또 다른 불안을 키워갔다. 그 마음을 그는 나중에 아이들이 쓴 편지에서야 알게 됐다.

‘또 담임쌤이 바뀌는 거 아니에요?’

송 교사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뿐이었지만, 제 마음의 불안조차 아이들 앞에서는 숨겨야 했다”고 말했다. 교실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그는 ‘조사 대상자’가 돼 있었다.

그가 이 시간을 버티며 남긴 한 문장은, 지금의 한국 교육을 가장 적나라하게 압축한다. “저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 송욱진 교사에게 아이들이 전한 손편지. ⓒ프레시안 / 송욱진 교사 제공


◇ “저는 담임이 또 바뀌는 걸 막고 싶었습니다”

그가 그 학급을 선택한 이유는 결국 아이들이었다. 학급의 한 아이가 남긴 손편지 속 문장 하나가 그의 마음을 붙잡았다.

“올해는... 선생님이 바뀌지 않으면 좋겠어요.”

전교조 전북지부장 시절, 송 교사는 이미 미산초 학부모들의 고발과 민원을 직접 겪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 학급의 담임을 맡는다는 것이 어떤 위험을 의미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담담히 말했다.

“또 다른 교사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위험 속으로 밀어 넣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 버텨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결국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교사는 언제든 아동학대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송 교사는 지금의 교권 붕괴를 만든 구조적 원인으로 현행 아동복지법의 적용 방식을 지목한다. 학생이 느낀 ‘기분’만으로도 교사는 언제든 아동학대 신고 대상이 된다. 눈빛 하나, 말 한마디가 곧바로 형사 절차로 이어지는 구조다.

현장 상황을 녹음하지 않았다면 교사는 조사관 앞에서 온몸으로 모든 상황을 입증해야 한다. 경찰에서 무혐의가 나와도 사건은 곧바로 검찰로 송치된다. 그 과정에서 교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고, 결국 병가를 내고 교체되는 일이 반복된다.

송 교사는 이 흐름을 이렇게 규정했다. “이제 이 방식은 담임교사를 가장 쉽게 바꾸는 공식이 되어버렸습니다.”

▲ 전교조 전북지부를 비롯한 교원·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7월 전북교육청 앞에서 전주 미산초 사태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언제까지 교사 혼자 견뎌야 하느냐”고 호소하고 있다. ⓒ프레시안

◇ PD수첩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현실

2024년 방송된 PD수첩은 미산초 사태를 전국에 드러냈다. 반복되는 악성 민원, 끝없이 교체되는 담임, 통제되지 않는 신고 구조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방송 이후에도 학교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 초에만 송 교사를 포함해 교사 4명이 형사 고발됐다. 무고한 아동학대 신고는 계속 이어졌고, 학부모의 무단 교실 침입까지 벌어졌다. 교실은 더 이상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분쟁이 발생하는 ‘사건 현장’이 됐다.

최근에는 한 학부모가 진학에 필요한 서류 제출을 거부하며 학교와 지원청을 상대로 압박에 나섰다. 이어진 방대한 양의 정보공개 청구 민원은 학교 행정을 사실상 마비 상태로 몰아넣었다.

송 교사는 당시 기고문에 이렇게 적었다. “교사는 아이를 지키려 한 죄로 상습적인 아동학대 피신고자가 됐습니다.”

그가 맞서야 했던 것은 단순한 개인 민원이 아니었다. 드러났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 그리고 교육 붕괴를 방치하는 구조 그 자체였다.

◇ 전국의 교사들이 그의 글에 울었다

송 교사가 <민중의소리>에 남긴 기고는 순식간에 전국 교사들의 SNS를 타고 번졌다. 현장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한 교사의 절규는, 곧 동료 교사들의 언어가 됐다.

“저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전국의 교사들이 거리에서 외쳤던 그 구호, “우리는 가르치고 싶다”는 외침이 다시 전주 미산초의 한 교실에서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 악성 민원에 내몰린 교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며, 전북교육청 관계자들과 교원, 학부모들이 ‘악성민원방지법(송욱진 교사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프레시안 / 송욱진 교사 제공


◇ 장관이 내려와도, 교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지난 10월 23일, 최교진 교육부 장관이 미산초를 직접 찾았다. 송 교사는 이 자리에서 악성 민원을 학교 차원에서 원천 차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매뉴얼과 권한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장관은 11월까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장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학부모의 SNS에는 교사를 조롱하고 힐난하는 글이 끊이지 않았고, 진학 원서 제출을 둘러싼 민원으로 또다시 여러 이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문제는 더 확산됐다.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정보공개 청구 민원이 학교와 교육청으로 쏟아졌고, 행정은 마비 직전까지 내몰렸다.

송욱진 교사는 그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대책이 아니라 문구만 바뀌었습니다.”

“문구는 달라졌지만, 교실의 현실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장관이 다녀간 뒤에도 학교는 여전히 민원의 악순환 속에 갇혀 있었다. 현장에 남아 있는 것은 대책이 아니라, 버티고 있는 교사들의 누적된 피로와 깊어진 고독 뿐이었다.

▲ 지난 10월 23일, 송욱진 전주 미산초 교사가 전주 미산초에서 열린 현장 간담회에서 최교진 교육부 장관에게 악성 민원 피해 실태와 교권 보호 요청서를 전달하고 있다. ⓒ프레시안 / 송욱진 교사 제공

◇ 가장 깊은 상처, 그러나 가장 흔들리지 않은 사람

송욱진 교사는 지금도 미산초 교실에서 아이들과 마주하고 있다. 민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교육청의 법적 절차 역시 진행 중이다. 상처는 현재진행형이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저는 절대 물러서지 않습니다. 저는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는 지난 몇 년 간 이어진 교단의 비극이 겹쳐 있다. 서이초 교사, 인천의 특수교사, 제주중 교사, 그리고 지난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28명의 교사들. 그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더 이상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곁에서 그를 지켜본 동료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다 무너져도, 그 사람은 끝까지 버팁니다.”

전북의 교권을 지탱해 온 것은 법도, 제도도, 조직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때로는 단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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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수

전북취재본부 양승수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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