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대만 관련 뉴스는 단연 '대만의 일인당 GDP 재역전'일 것이다. 22년 만에 대만에게 일인당 GDP를 역전당했다는 내용의 뉴스들이 다소 선정적인 제목을 달고 쏟아졌다. 12월 현재 양국 정부가 전망하는 한국과 대만의 올해 일인당 GDP는 각각 3만 7430달러, 3만 8066달러다. 한국은 2003년 1만 5211달러로 1만 4041달러의 대만을 추월한 이후 22년 만에 1인당 GDP를 역전당하는 셈이다.
대만 입장에서는 그리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래로 꾸준히 대만의 경제 수준은 한국보다 높았다. 대한민국이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딛고 '맨땅에서' 산업화에 열심이던 60~70년대, 이미 대만 경제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에 한국 출장을 다녀왔던 대만 어르신들은 한국을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가난한 나라'라고 기억한다. 사실 그랬다. 1970년대 후반 대만, 홍콩, 싱가포르,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Four Asian Dragons)'이라고 불렸다. 그중 선두는 확실하게 대만이었고, 한국은 굳이 끼워줘야 할지 망설여지는 나라였다. 2003년 한국이 대만 경제를 추월한 이후로도 두 나라의 일인당 GDP는 크게 벌어진 적이 없다.
여하간 한국에서는 다소 충격적인 뉴스였다. 이러다가 일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경쟁에서 대만에게 뒤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번졌다. 갑자기 대만 경제 관련 영상이 늘었다. 대만 경제는 왜 강한가? 하지만 어떤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그 분석들을 들여다보자면 아주 간단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대만 경제가 강한 이유는 국민에게 저임금을 강제하는 정책 때문이다. 그러나 TSMC(台積電)라는 세계적 기업 하나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실제로 대만의 임금은 한국보다 낮다. 통계에 따르면 대만의 중위 월소득은 약 189만 원으로 한국의 약 313만 원에 비하면 60% 수준이다. 대졸 초임은 한국의 최저시급 수준인 130~150만 원대로 확연히 낮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그렇다고 대만인의 생활 수준이 절반에 가깝게 낮은 건 아니다. TSMC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분명하다. TSMC의 시가총액은 삼성전자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 그만큼 대만의 국가 생산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렇다고 간단한 두 문장으로 한 국가의 저력과 미래를 모두 설명하는 건 무리다.
과연 대만의 경제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한국과 대만이 가진 공통점은 높은 교육열과 근면함 그리고 단결력과 질서 의식이다. 우리에겐 당연해 보이는 이런 특징들은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드물고 신기한 일이다.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며 쉬지 않고 일한다. 공동의 목표가 설정되면 개인 이익을 뒤로 미루고 힘을 모을 줄 안다. 카페 테이블에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있고, 길에 떨어뜨린 지갑이나 열쇠를 되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세계적으로 이런 신기한 나라는 인근의 일본, 싱가포르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두 나라는 이런 공통점을 바탕으로 양질의 노동력을 경제 성장에 쏟았다. 덕분에 국가 주도로 서구에 비해 한참 늦은 산업화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질의 값싼 노동력만 있다고 선진국이 되진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만의 힘이 있다. 바로 국가 단위를 뛰어넘는 중화권(中華圈) 네트워크다. 외국에 살면서 중국 국적을 유지하면 화교(華僑), 거주 국가 국적을 취득하면 화인(華人)으로 불린다. 화교든 화인이든 중국 본토와 대만 밖에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인구가 4000만에서 6000만 명 규모다. 대한민국 면적의 3분의 1, 인구의 2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 대만이지만, 이들이 가진 중화권 네트워크의 규모는 이렇게 크다. 특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들 중국계가 경제를 주도한다.
과연 중화권 네트워크는 힘이 있을까? 대만을 대표하는 기업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Morris Chang, 張忠謀)'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 물론 현재는 대만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다.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으로 이주시킨 장제스와 동향이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중일전쟁, 국공내전의 난리통에 대륙을 떠돌다가 결국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다. 미국에서 반도체 공학자, 기업인으로 성장한 그는 1985년 대만 정부의 요청을 받고 대만으로 이주해 87년 TSMC를 설립한다. TSMC는 그 설립 자체가 중화권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설계회사가 대규모 생산시설에 투자할 필요 없도록 위탁생산을 전담하는 '파운드리(Foundry)' 개념을 창안했다. 그가 만든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기술과 노동력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을 평정했다. 그가 미국에서 성장할 때 미국 국적을 취득한 화인이었는지,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한 화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중화권 네트워크의 일원이었고, 대만은 그 중심지였다.
AI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기업 중 하나인 엔비디아(NVIDIA)를 보자. 엔비디아는 미국 기업이고 창업자 '젠슨 황(Jensen Huang, 黃仁勳)'은 미국인이지만, 그는 대만 타이난(臺南) 출신이다. 올해 한국에서 재벌 총수들과 '치맥회동'을 하면서 한국인에게 친근해진, 가죽 자켓을 입은 그 아저씨다. 대만을 떠난 그의 가족은 말레이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엔비디아가 그래픽칩에 이어 AI칩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동안, CPU 분야에서 인텔과 양대산맥을 이룬 에이엠디(AMD)라는 회사가 있다. 2014년 AMD의 CEO로 취임해 폭발적인 성장을 이끈 '리사 수(Lisa Su, 蘇姿丰)' 역시 대만인이다. 심지어 젠슨 황의 이종사촌의 딸, 우리식으로 말하면 오촌 조카다. 타이난 출신의 두 미국인 CEO가 이끄는 엔비디아와 AMD는 둘 다 TSMC의 핵심 고객이다.
TSMC 설립자 모리스 창은 중국 본토 출신 미국인이었지만 이제는 대만 경제를 떠받치는 대만인이다. 그 핵심 고객사인 엔비디아와 AMD의 CEO들은 대만계 미국인들이다. 그들의 오랜 파트너십에 같은 문화권으로서 가지는 동질감이 어떤 역할을 했을까? 외국에서 살면서 비즈니스를 해본 한국인이라면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만에서 가장 인기있는 온라인 쇼핑몰 '쇼피(Shopee,蝦皮)'는 싱가포르 회사지만, 창업자 '포레스트 샤오동 리(Forest Xiaodong Li, 李小冬)'는 베이징 인근 텐진 출신의 중국계다. 쇼피는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의 전자상거래를 압도하고 있다. 덕분에 전자상거래만큼은 대만이 이들 국가가 연결돼 있다.
대만 출판시장 규모는 신간 숫자나 연간 매출액 규모로 볼 때 한국과 큰 차이가 없다. 대만 인구가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데도 그렇다. 대만인들이 책을 많이 읽는 건 분명하지만, 한국인의 두 배까지는 아니다. 이를 단순히 국가 단위 인구만 보면 설명하기 힘들다. 동남아 화교 중심의 중화권 시장 전체를 계산에 넣어야 설명된다. 최근 한국 출판물의 해외 진출도 눈에 띄지만, 중화권의 일원인 대만과는 차이가 크다. 대만 출판물은 처음부터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초국가 시장을 목표로 기획되고, 실제로 판권이 팔리는 일도 많다.
대만 시장은 보기보다 크다. 국경을 넘어서는 네트워크 경제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외교적으로는 철저하게 고립돼 있지만, 경제적으로 상당히 넓은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같은 언어 사용자들은 국경을 넘어 연결된다. 중화권 전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품, 서비스, 정보가 활발하게 오고 간다. 비즈니스에서도 교류가 활발하다. 태어난 곳이 다르고 국적이 달라도 서로 교류하고 신뢰를 쌓으며 비즈니스를 키운다. 오랫동안 대만은 이러한 '중국 대륙 바깥 중화권'의 중심이었다.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고 개방과 성장을 이루면서 변화가 생기겠지만, 아직은 대만이 중화권 허브의 위상을 지키고 있다. 중국과 맞서는 작은 섬나라 대만의 경제 성장은 하나의 기적이었다면, '보이지 않는 초국가 네트워크'가 그 기적의 비결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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