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선고에 앞서 몇 말씀 드리겠다. 옛말에 형무등급(刑無等級), 추물이불량(趣物而不兩)이라는 말이 있다. 법의 적용에는 그 적용을 받는 사람이 권력자이든, 아니면 권력을 잃은 자이든, 예외나 차별이 없어야 한다."
우인성 부장판사는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자'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자본시장법 위반)과 명태균 여론조사 무상 수취 사건(정치자금법 위반)을 무죄로 판결했다. 그러면서 '권력이 없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잃은 자'라고 특정했다.
단어 선택의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꽃의 반대말은 무엇인가'라거나, '일요일의 반대말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다.
김건희는 과연 무엇인가? 일단 '권력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권력자의 대칭어로 '피지배자'는 이상하다. 그렇다고 김건희를 '약자'라 부를 순 없다. '피권력자'라는 말도 어색하다. '평민', '복종', '피치자' 따위의 말들도 다 틀렸다. 아마도 고민 끝에 우 판사는 권력자를 앞서 상정하고 그 대칭어로 '권력이 없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잃은 자'를 뒀으리라. '권력을 잃었다고 해서 더 가혹하게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읽어달란 요구처럼 들린다.
과문한진 모르겠으나 판결문에서 '약자'나 '서민'같은 말들은 많이 봤어도 '권력을 잃은 자'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본다. 권력을 잃었다는 말은, 권력이 없는 필부필부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한때 권력을 가졌전 자라는 말이다.
애초에 권력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특히 현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위임된 권력'이다. 즉, 스스로 권력을 발산한다고 믿어왔던 '왕조 시대'가 아닌 이상, 이 권력은 공화국을 구성하는 시민들에서 나오는 '힘의 집체'다. 그것을 '국가 권력'으로 바꿔 '합법적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는 자리가 대통령직이다. 애초에 그 권력이 김건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권력을 잃었다'는 건 그 권력이 김건희의 것이었다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권력을 잃은 자'를 굳이 외국어를 빌려 영어로 풀이해 보자면, 왕좌(throne)에서 파생된 단어 enthrone의 대칭어인 dethroned(권좌를 잃다. 폐위되다)에 가까운 뉘앙스로 들린다. 폐위된 자, 그걸 김건희로 보는 것인가.
그리하여 '권력을 잃은 자에 대해 차별하지 말라'는 판사의 계몽적 훈계가 주는 불쾌함의 정체가 드러난다.
'권력을 잃은 자'라는 말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자'라고 칭한 김건희의 말이 판사의 언어로 번역돼 나온 것에 불과하다. 판사는 권력을 잃었다고 해서 '형법상 범죄가 아닌 죄', '작은 죄'에 대한 처벌이 가혹하게 이뤄지는 경우를 안타깝게 여겨온 듯 하다. 그러나 이 말은 오히려 이 재판이 '정치 재판'이라는 걸 드러내 주는 역설로 작용한다.
판결문에 도덕적, 윤리적 수사가 들어갈 때는 설득력이 담보돼야 한다. 하지만 형의 경중을 따짐에 있어 '권력을 잃은 자'를 차별하지 않겠다는 건, 한때 권력을 가졌던 자가 저지른 범죄와, 권력이 없는 자가 저지를 범죄를 동일 선상에 놓고 보겠다는 말이다. 권력은 사회적 자원을 비대칭적으로 가진 걸 말한다. 그런 사람의 범죄 혐의를 일반 사람과 동일시 보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 아닌가.
내란범 한덕수에게 실형을 선고한 이진관 판사는 '아래로부터 쿠데타'와 '위에서부터 쿠데타'를 구분해 권력자의 범죄를 더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2.3 내란 가담자에 대한 형을 정함에 있어 피해 발생이 경미하였다거나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는 사정을 깊이 고려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우인성 판사는 정확히 이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잃은 자' 한덕수에 대해 우인성 판사는 어떻게 보는지 한번 묻고 싶다.
우인성 판사가 판결을 내린 두 개의 주요 사건은 대통령(혹은 영부인) 권력과 무관한 시절에 벌어졌던 일이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이것도 틀렸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은 15년 전 발생했던 사건이지만, 윤석열 대통령 영부인으로 '재임'했던 김건희가 '권력을 가졌던 자' 시절엔 어땠나. 검사들은 김건희를 조사하며 형무등급(刑無等級), 추물이불량(趣物而不兩)을 지켰던가? 일반 사람을 검사가 휴대폰 맞긴 채 출장 조사하는 일이 있었던가? '권력을 가진 자'였을 때, '권력의 수하' 민정수석을 통해 자신에 대한 조사를 무마시키려 시도한 것도 '권력을 잃은 자'가 되면 별게 아닌 일이 되는 건가?
명태균 여론조사 무상 수취는 대통령이 되기 전,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유리하게 조작한 여론조사를 이용해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차지하려 했던 사건이다. 윤석열김건희 부부는 그 권력마저 부당하게 쟁취한 사람들인데, 이들을 차별받지 않아야 할 '권력을 잃은 자'로 대접하는 게 합당한 일인가.
'권력이 없었을 때' 주가 조작을 인지하고 주가조작범에게 통장을 건네 수억원을 챙겼고, '권력을 가졌을 때' 그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다. '권력이 없었을 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세상 여론을 왜곡하고, 그걸 이용해 '권력을 가진 자'가 된 후 그걸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리고 사법적 단죄에 앞서 뻔히 드러날 파렴치한 거짓말로 시민들을 능욕했다.
그에 대한 판단에서 '권력을 잃었을 때'를 말하는 건 우습다. 김건희가 '권력을 가진 자'였을 때 그의 범죄 혐의들이 어떻게 다뤄져왔는지 우리는 생생히 목격했다.
근본적으로 애초에 김건희가 '권력자'였는지에 대한 생각도 해 보자. 우 판사는 김건희를 '권력자'라고 본 것이지만, 김건희는 선출된 자도 아니고, 권력을 행사할 합당한 지위에 있는 자도 아니었다. 그는 특검에 처음 출석할 때 말한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대선 때도 그는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했다.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어떻게 '권력을 잃은 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권력을 잃은 자'라는 분류에 맞는 인간이 대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위임된 권력'을 그 곁에서 불법적으로 잠식하고, 악용하고, 남용한 비리는, 일반 비리보다 더 무겁게 처벌돼야 한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게다가 권력을 잃은 이유가 본인이 권력을 반납한 게 아니잖은가. 더 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내란'을 일으켜 대한민국에 치명적 해악을 끼쳤다는 이유로 스스로 '폐위' 된 자들에게 '정권 교체'로 인한 권력 상실 같은 걸 비교할 일인가.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박탈당한 자들이다.
형에는 등급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판사는 AI가 대체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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