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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문화재 다 모았던 조선유물 '덕후' 日 오구라, 국보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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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문화재 다 모았던 조선유물 '덕후' 日 오구라, 국보도 가져갔다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2부 ⑤ 오구라는 왜 조선의 유물에 관심을 가졌을까?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도쿄대학 졸업 후 선망받는 회사에 취직하며 밝은 미래를 보장받는 듯했지만, 아버지의 뇌물 수수 사건으로 인해 교도소 수감자가 되었다가 조선으로 건너와 전기사업에 성공하며 '조선의 전기왕'으로 거듭나는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갔다. 그는 전기사업을 중심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지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유지로서 활동했다.

그러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920년대 초부터 신라와 가야의 고분 도굴품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고고유물, 불교조각, 금속공예, 목공예, 도자, 회화, 전적, 복식 등 그 종류도 다종다양했으며, 그 시기 또한 신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광범위했다. 현재 그가 수집한 한국 관계 유물들은 그의 사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으며, 그 수는 1,030점에 이른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에 해당하는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 도쿄국립박물관의 오구라 컬렉션 일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사업가·재력가로서 '조선의 전기왕'으로 불리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왜 조선의 유물들을 모으는 수집가가 된 것일까? 고고학이나 역사학, 미술사학과 같이 문화재들과 관련한 학문을 전공한 적이 없는 그가 조선의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구라 컬렉션'이라고 부를 만큼 수많은 조선의 유물들을 손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회고를 통해 그가 조선에서 수많은 유물들을 모은 동기 또는 이유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나는 사학이나 고고학에 대해서는 일개의 문외한에 지나지 않으나, 다만 다년간에 걸쳐 취미와 기호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수집하였다··· 일본의 고대사 중에는 조선의 발굴품이나 고미술품에 의거해서 비로소 분명하게 되는 부분이 의외로 많은 사실에 놀랐다. 나는 이 점에서, 반드시 고미술품이 아니더라도 조선의 고기(古器)와 고물(古物)을 가능한 한 계통에 따라 정비·보존하는 것은 일본의 고대사를 밝히는 데 뿐만 아니라 극동의 퉁그스족 문화의 연구에도 공헌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여 수십년에 걸쳐서 그 수집에 힘을 기울여 왔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자신이 사학이나 고고학을 모르지만, 일본의 고대사를 밝히는 데 조선의 유물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조선의 여러 유물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다른 회고에서도 '조선 문화의 옛것들이 일본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고고학 등 가치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수집했다'와 같은 취지로 조선의 유물을 수집한 이유를 밝혔다.

이와 같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본의 고대사나 일본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조선의 유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유물들을 수집했을까?

오구라가 수집한 유물은 무엇이 있었을까?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조선에서 수집해서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들은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고고자료 580점, 조각 49점, 금속공예 130점, 도자기 152점, 칠공예 44점, 서적 36점, 회화 94점, 염직 25점 총 1,110점으로 '오구라 컬렉션'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패전하자 그도 귀국하게 되는데, 그동안 수집·보관해 온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그는 1958년에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하고, 1964년에는 『오구라 컬렉션 목록』을 만들어 유물들을 관리했다. 1964년에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오구라 야스유키(小倉安之)가 오구라 컬렉션을 관리하다가 1981년에 이를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오구라 컬렉션 중 중국, 일본, 그 외 출토 유물 80점을 제외한 1,030점이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그 유물의 시대부터 그 종류까지 다양하며,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에 해당하는 중요문화재와 중요미술품도 각각 8점과 31점이나 포함하고 있다.

석창(石槍, 돌로 만든 창), 타제석촉(打製石鏃, 돌을 깨트려 만든 화살촉)과 같은 신석기 시대 유물부터 분청사기, 백자와 같은 조선 시대 유물까지 광범위한 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골고루 있으며, 그중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금동관모(金銅透彫冠帽), 금동신발(金銅透彫飾履)과 같은 중요문화재와 견갑형동기(肩甲刑銅器), 환두대도(環頭大刀), 금동원통형사리합(金銅圓筒形舍利盒)과 같은 중요미술품도 포함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들 중 중요한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경상북도 고령 출토 금관

가야 최대의 고분군인 경상북도 고령군의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5세기 말에 제작된 대가야의 금관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13.2㎝, 직경 17.1㎝의 크기로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금관은 대가야의 최고위급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발굴되지 않고 도굴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가 없다. 도굴 이후 시중에서 매매되다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 고령 출토 금제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보통 금관이라고 하면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관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이마에 두르는 테두리인 대륜(大輪) 위에 날 출(出)자의 나뭇가지 모양으로 장식을 한 출자형입식(出子形立飾)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가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금관은 대륜 위에 꽃과 풀 같은 모양으로 장식을 한 초화형입식(草花形立飾)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 금관은 가야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금관과 비슷한 모양을 한 금관은 삼성미술관 리움과 국립광주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고령 출토 금관과 나주 출토 금관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출토된 사례가 많지 않다.

경상남도 창녕 출토 유물

금동관모(金銅透彫冠帽)는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유물로 구리에 금을 도금하거나 금박을 입힌 금동(金銅)을 재료로 하여 이를 파내면서 장식을 만드는 투조(透彫) 기법을 사용한 관모(冠帽)이다.

고깔 모양의 머리에 쓰는 모(帽)에는 양쪽에 두 개의 날개 모양 장식이, 윗부분에는 깃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으며, 크기는 높이 41.8㎝, 폭 21.2㎝이다. 5~6세기 즈음 신라 또는 가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경주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독특한 모양을 한 금동관모가 출토된 사례가 없다. 창녕군 지역의 고분군들은 대부분 도굴당했는데, 그중 일부를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사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 경상남도 창녕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굵은고리귀걸이, 팔찌, 팔가리개, 환두대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금동관모는 새날개모양관식(金銅鳥翼形冠飾, 길이 38.9㎝/폭 22㎝), 금동신발(金銅透彫飾履, 길이 28.3㎝), 굵은고리귀걸이(金製太環耳飾, 길이 7.2㎝/직경 3㎝), 팔찌(金製釧, 직경 7.5㎝), 팔가리개(金銅臂甲, 길이 37.7㎝/폭 16.8㎝), 환두대도(單龍文環頭大刀, 길이 26.8㎝)와 함께 창녕 출토 일괄 유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유물은 모두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부산 연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

부산 연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로 철로 만든 투구(遮陽冑), 갑옷(鐵製短甲), 관모형복발(冠帽形覆鉢), 원두대도(圓頭大刀) 4점이 여기에 속한다. 1931년 5월~6월 사이에 도굴되어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투구는 야구모자와 같이 앞쪽에 챙이 달린 모양으로 높이 20㎝, 직경 31㎝의 크기이다. 5세기 즈음 한반도 남부와 왜에서 유행하던 방식으로 일본에서는 다수 출토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출토되는 일이 드문 유물이다. 원두대도는 명칭 그대로 칼의 손잡이 끝부분이 둥그렇게 되어 있으며, 금은으로 장식하고 있고 길이는 93.3㎝이다. 오구라 컬렉션에는 금은으로 장식한 대도(大刀)가 다수 존재하는데, 이 원두대도와 같이 그 상태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흔치 않다.

▲ 부산 연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 투구, 관모형복발, 원두대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및 오구라 타케노스케의 한국 문화유산 약탈과 반출

현재 '전(傳) 경상남도 동래군 연산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기 전에 오구라 컬렉션 목록에는 이러한 표기가 없었다.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여 '동래군 연산리 출토로 전해진다'는 의미를 드러내면서 도굴된 유물이라는 점을 애써 희석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유물들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불법적으로 유물들을 수집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례이며, 한일 양국의 고고학 연구 자료로 학술적 가치도 큰 유물이다. 특히 투구와 갑옷은 삼국시대 당시 투구와 갑옷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중요한 유물이다.

석조 유물

경북대학교박물관의 야외전시장인 월파원(月坡園)에는 석불, 석탑, 석등, 문관석 등 여러 석조 유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중에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자신의 대저택 마당에 장식품처럼 놔두던 석조 유물들도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해야 했던 그는 이 석조 유물들이 너무 무거워 일본으로 반출하지 못했고, 결국 1956년 1월, 1958년 12월, 1960년 4월 세 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로 옮겨진 경위가 있다.

▲ 석조비로자나좌상(보물 제335호, 왼쪽)과 석조승탑(오른쪽 상단: 보물 제135호, 오른쪽 하단: 보물 제258호).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수집한 석조 유물 중에는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있다. 보물 제335호 석조비로자나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과 보물 제135호 대구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大邱山格洞蓮花雲龍裝飾僧塔), 보물 제258호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大邱山格洞獅子奏樂裝飾僧塔)이 그것이다. 석조비로자나좌상은 높이가 275㎝이며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석조승탑 2점은 모두 높이 280㎝이고,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승탑이 세워져 있었던 원래 위치와 승탑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이와 같이 보물에 해당하는 가치가 큰 석불과 석조승탑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석조 유물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력과 이를 눈감아 주는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조선의 유물들을 수집한 동기는 일본의 고대사와 일본 문화를 연구하는 데 조선의 유물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경상북도 고령 출토 금제관, 경상남도 창녕 출토 유물, 부산 연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 경주 금관총 유물, 석탑과 같은 다양한 문화재들을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유물들 중에는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유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불법적으로 자행된 도굴품들이었다. 다음주에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불법적으로 도굴된 유물들을 수집했다는 정황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일화를 살펴보자.

■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2006.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편, <오구라 컬렉션-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박천수, <오구라 타케노스케의 한국 문화유산 약탈과 반출>, 경상북도·(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24.

정규홍 편저, <구한말·일제강점기 경상도지역의 문화재 수난일지>, 경상북도·(사)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18.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문화재 일본소장 ②>,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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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봉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엄태봉 교수는 정치학자로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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