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영희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
리영희 선생님 살아 계실 때, 여러 번 뵈었습니다. 마지막 뵌 것은 2009년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그해 가을 윤건차 선생님의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 - 1945년 이후의 한국·일본·재일조선인> 출간 기념 자리가 '창비'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저자와 역자를 포함해서 열 명 남짓 인사동 식당에서 식사하며 축하하는 자리에 저도 초대받아서 함께 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께서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모두 일어나서 인사드리고 안쪽 자리로 모셨습니다. 김응교 선생님의 사회로 한 분씩 오신 분을 소개하고, 리영희 선생님께 말씀을 청했습니다. 재일조선인의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참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하는 중에, 선생님께서 역자 중 한 분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쓰쿠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역자의 소개말을 주의 깊게 듣고서 쓰쿠바대학의 마쯔오카 히로시(松岡完) 교수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마쯔오카 히로시 교수는 국제관계학전공으로 <베트남전쟁- 오산과 오해의 전장(ベトナム戦争――誤算と誤解の戦場)>(2001년), <베트남증후군-강대국을 괴롭히는 '승리'에의 강박관념(ベトナム症候群――超大国を苛む「勝利」への強迫観念)>(2003년) 등 저서를 냈습니다.
이 장면을 옆에서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지적 활동을 못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민족문제와 베트남전쟁문제'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고 계셨습니다.
저자와 역자들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중, 선생님께서는 다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신발을 신으러 나가셨습니다. 그제서야 창비 관계자가 급히 나가서 선생님을 부축하고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못내 이겨내는 모습이었습니다.
2. 2008년 베트남에서 <베트남전쟁>을 읽다
저는 2008년 2월부터 '평화로운 아시아를 위한 나와우리'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2월 '나와우리'는 당해 베트남 현지 사업을 위한 답사를 해왔고, 저는 이 답사에 합류하면서 처음으로 베트남을 찾았습니다. <새로 쓴 베트남역사>(유인선 저)와 선생님의 <베트남전쟁>을 챙겨갔습니다.
먼저 인천에서 호치민으로 갔습니다. 비행기가 호치민시에 내리는 순간, 따스한 공기가 가슴으로 스며 들어왔습니다. 렌트카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오토바이의 물결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몇 차례 베트남 방문 후 익숙한 풍경이 되었지만, 어디서 그렇게 많은 오토바이가 쏟아져나왔는지 오토바이가 도로 대부분을 점령하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첫날의 식사는 베트남쌀국수. 식사 후 일정은 호치민시 전쟁증적박물관(寶藏證蹟戰爭, War Remnant Museum) 관람이었습니다.
베트남에는 크게 세 종류의 전쟁박물관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하노이의 군사박물관. 하노이의 군사박물관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비롯해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적인 요인을 중심으로 승전을 기억하는 박물관입니다.
두 번째, 미라이학살박물관. 전 세계를 분노케 한 미군의 미라이에서의 학살 사건을 기억하는 박물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곳에는 미라이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노력한 미군의 활동과 미국의 반전 시위가 박물관의 중요 전시 스토리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호치민시의 전쟁증적박물관. 전쟁의 참담함을 기록으로 보여주는 전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첫째, 1945년 이전 베트민과 미국의 대일항쟁 공동전선. 1945년 이전에는 미국과 베트남이 대일본 공동전선을 구축해서 활동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둘째, 베트남전쟁 시기 일본의 반전 시위 및 베트남 구호 활동을 특별하게 전시해두었습니다. 셋째, 미국의 동맹군 중 특별히 한국군 사진이 세 장 등장합니다. 아주 키가 작은 한국군 병사의 정글에서의 작전, 베트남 중남부지역으로 진입하는 한국군, 마지막으로 고엽제로 고통받는 퇴역군인.
지금도 그러하지만, 한국의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에서 베트남전 참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서면 반공의 십자군으로 한국군이 참전했다는 점이 첫 장면에 나옵니다. 다음 장면은 한국군이 어떻게 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쳤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과 한국군 현대화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 '기념'과 베트남의 전쟁 '증적(證蹟)'과의 간극은 상당했습니다. 특히 고엽제로 고통받는 퇴역 한국군을 베트남에 가서야 만났다는 것이 당시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다낭으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당시 다낭 공항은 국제선이 없었습니다. 다낭에 내려서 호이안시로 이동해서 베이스캠프를 치고 가장 먼 마을부터 방문했습니다. 피해자에게 직접 생활 지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울퉁불퉁한 포장 반 비포장 반인 도로를 몇 시간 달려서 꽝응아이성 마을 입구에 내렸습니다. 인민위원회를 들러서, 한 달 전 보낸 공문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고서 바로 마을의 피해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할머니 한 분이 제게 끊임없이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무엇인가를 손짓 발짓하면서 억울한 일을 호소한 듯이 제게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와우리'에서 피해자를 만나고 나와도 여전히 할머니는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이번엔 인민위원회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인민위원회의 공무원도 여간 곤혹스런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소란스러운 현장을 간신히 벗어나서 인민위원회에 도착했습니다.
회의실에 앉아서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제가 베트남 현지 한국인 활동가에게 이 상황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활동가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도 피해자인데, 왜 지원금을 주지 않느냐고, 인민위원회가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협작해서 자신은 배제하고 못 받는 것은 아니냐고 격하게 항의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나와우리'에서 생활비를 지원하는 피해자의 어두운 얼굴이 떠오르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마을에서의 사업과 관련된 회의는, 마을에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로 끝나고 피해자 지원을 위한 방문은 자제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듣고서 호이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내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들어와서 <베트남전쟁>을 펴보기 시작했습니다.
3. 베트남을 떠나 베트남전쟁 속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남전쟁>을 읽고서 리영희 선생님의 저작을 한 권씩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첫 저작 출간과 같은 해에 태어난 저와 제 세대에겐 선생님은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찾듯이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살펴보니 리영희 선생님의 저작에는 베트남전쟁을 다룬 글이 연속해서 나왔습니다. 첫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의 머리글 '강요된 권위와 언론 자유-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초출 <문학과지성>, 1971년 가을호)부터, '베트남전쟁Ⅰ 1945~56년'(초출 <창작과비평>, 1972년 여름호) '베트남전쟁Ⅱ 1956~72년'(초출 <창작과비평>,1973년 여름호). 두 번째 저작 <우상과 이성>(초판 1977년, 증보판 1980년, 제 2개정판 1988년)의 '베트남 정전협정의 음미'(1973), '베트남 35년 전쟁의 총평가'(1975), '종전 후 베트남의 통합 과정'(1976).
앞의 글 다섯 편과 두 편의 글 '민족해방전선의 기원과 구성'(프란시스 핏제럴드 저), <해방전선의 우편배달부>(오카무라 아키히코 저)를 묶어서 <베트남전쟁>(1985년)으로 출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 중 '베트남, 그후'(피터 헤이스팅즈 저)와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레 부진스키 저), <분단을 넘어서> 중 <심청이의 몸값>,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중 <베트남 인민에게 먼저 사과할 일>, <스핑크스의 코> 중 <'광기의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면서>, <반세기의 신화> 중 <한국과 베트남, 그 바람직한 관계를 위하여>, "1999년 이후 단편적으로 발표되거나 공개되지 않은 새 원고로 구성"한 저작집의 마지막 책 <21세기 아침의 사색> 중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바로 알자>까지.
'베트남전쟁'은 선생님의 집필 중요 주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베트남전쟁을 분석한 글을 발표하고 1990년대는 회고하고 반성하는 글로 구성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바로 알자>는 베트남전쟁의 핵심을 드러내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1965년부터 8년 동안 국군 연 33만 명(상주 병력 5만 명)을 전투에 파견한 그 전쟁은, 사실은 베트남인민이 160년에 걸친 프랑스·일본·미국의 식민지·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해방·독립전쟁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미국 국민은 자기 정부가 시작한 제2차 베트남전쟁을 프랑스가 일으킨 제1차 베트남전쟁과 마찬가지로 현대사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고 불러 반대했던 것이다. 미국 청년·대학생 37만 명이 베트남전쟁 징집을 거부했다(현재의 클린턴 대통령 포함). 베트남전쟁 기간에 미국 군대의 장병 수만 명이 탈영했고 수만 명이 도주했다. 불명예제대가 56만 3000명이나 되었다.
긴 베트남전쟁 기간 중 세계의 민주적 문명국가는 한 나라도 미국을 위해 파병하지 않았다. 세계 제1차, 2차 대전에서 미국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진 미국의 형제국인 영국이 영국군 '의장대 6명'을 베트남에 보냈을 뿐이다! 의장대 6명!!
미국과 대한민국이 군대로 도우려고 했던 이른바 사이공(베트남)국가와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타락·부패했고, 그 집권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과거의 프랑스·일본 식민통치에 충성했던 '반민족행위자'들이었다. 미국이 이런 자들을 '자유'니 '반공'의 이름으로 돕기 위해서 벌인 전쟁이 베트남전쟁이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이 '명예'가 아니라 '오욕'임을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달리 보일 것이다."(P.123)
'나와우리'에서는 1999년 베트남 첫 답사 이후, 2000년부터 현재까지 베트남전쟁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에게 생활비 지원을 지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또 전후에 태어나, 전쟁을 모르는 한국과 베트남의 청년 60여 명이 2주일 동안 베트남의 피해 마을에 머물면서 서로의 땀과 웃음으로 평화를 쌓는 한베청년평화캠프를 열었습니다.
양국의 청년들이 한국군에게 피해입은 마을에 전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위령비(퐁니위령비)를 짓고 묘지(빈영마을 무연고자 묘역)을 조성하는 작업 등을 진행했습니다. 그 후 한국과 베트남 청소년이 함께 베트남역사문화수학여행을 다년간 같이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초 한국인만으로 구성하여 진행한 네 차례의 현지 조사후, 2015년 제 5차 조사단부터 베트남과 한국의 공동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 연구 결과는 2015년 한국문화인류학회에서 <베트남전쟁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이후 해원(解寃) 과정 연구 서설>(발표자:조진석)로 발표되었습니다.
제6차 조사단의 연구 결과는 2018년 '하미마을의 학살과 베트남의 역사 인식 : 위령비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집필자: 한성훈, <사회와 역사> 제118집(2018년))에 발표했습니다. '나와우리'에서 장학 지원받는 중, 한국-베트남 공동 연구에 참여한 베트남인 연구자는 2019년 '베트남전쟁기 한반도와 베트남 관계연구'를 박사논문으로 제출했습니다.
4. 1985년 리영희 선생님은 왜 저서 <베트남전쟁> 출간했을까?
선생님의 <베트남전쟁>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은 1970년대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에 실린 베트남전쟁 관련 논문을 묶어 1985년에 <베트남전쟁>을 출간하셨습니다. 왜 기존 책에 실은 글을 묶어서 새로 책을 내야만 했을까? 실마리를 찾고자 책의 머리글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습니다.
"<베트남전쟁>이라는 처절한 무대 위에서 주역을 맡았던 개인이나 국민 또는 관객의 입장에 섰던 국가나 정부도, 모두 새로운 전쟁놀이를 찾아 몰두하고 있다."
주역을 맡았던 개인이라는 글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대대장으로 복무한 것을 떠올렸고, 동맹의 보은과 반공의 십자군으로 나간다고 알려진 군을 열렬히 환송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전쟁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책에서는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시대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1985년이라면, 제가 불과 10세 남짓의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조금 찾아보면서 추측해보았습니다.
리영희 선생님께서 다시금 베트남전쟁을 떠올린 것은, 한반도의 전쟁 공포가 내습했다고 판단한 결과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1983년 10월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 전두환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한 폭파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0월 9일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했습니다.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대통령은 급 귀국하고, 귀국 즉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비상경계태세를 결정했습니다.
10월 13일 희생된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북한만행규탄대회가 연일 열렸고, 대북보복론까지 대두되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보복공격을 감행해야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상황이었고,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바로 다음 해, 70년대 후반 시작된 한미연합군사훈련 팀스피리트가 연인원 20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야외기동훈련으로 발전했고, 1985년부터는 북한의 화학전을 대비한 훈련을 하였습니다. 한미양국은 훈련이라고 했지만, 실제 북한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이 연 70~80일 전개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를 북침을 위한 공격훈련이라고 비난하면서 훈련 중지를 요구했지만, 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훈련에 그치지 않고 우발적 충돌이라고 해도, 한반도의 상황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힌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때 선생님께서는 다시금 <베트남전쟁>을 출간하면서 "30년간에 걸친 이른바 <베트남 사태>가 가르친 바도, 아니면 적어도 그것에서 받았으리라 생각되는 역사적 교훈도, 별로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잊혀져 버린 듯 보입니다. 그 교훈을 똑바로 가슴에 새기고 기억 속에 깊이 간직했다면, 그토록 엄청난 재화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못되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다시 인류의 내일을 걱정케 하는 전쟁 준비에 이토록 넋을 잃는 작태는 보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떤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는지, 베트남전쟁으로 예시해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버마 암살폭파사건', '팀스피리트훈련' 참고)
5. <베트남전쟁>을 읽어야 하는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13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응우옌티탄씨(Nguyễn Thị Thanh, 1960년생, 퐁니·퐁녓 마을 학살 피해생존자)와 응우옌티탄씨(Nguyễn Thị Thanh, 1957년생, 하미 마을 학살 피해생존자)가 선정되었습니다. 두 분을 비롯해서, 베트남전 당시 피해 입은 민간인에 대한 지원과 피해 마을을 위한 사업은 두말할 여지없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분들 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한국에는 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2세, 3세, 4세가 있습니다.
방송에서 베트남 참전용사로 소개된 이용우씨는 자신이 베트남전에 참전했기 때문에 말초신경계 장애를 겪었고, 척수 뼈에 장애가 있던 아들에 이어 중학생이던 손녀에게 유방암이 발병한 군인의 가족까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서 오늘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 아직 <베트남전쟁>을 읽어야 하는 시대는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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