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이 출간된 지 12년 지났다. 나는 2007년부터 대학 강의를 하면서 자기계발이란 단어가 어떻게 개인을 짓누르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지를 추적했다. 기업가적 자아, 자기 효능감 등의 말들이 시대정신처럼 부유하던 때였다.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하는 효능감은 얼핏 수백 년 전부터 사용했을 것 같지만, 2000년이 넘어서야 공부 잘하는 사람의 특징으로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개인의 삶을 지배했다. 자연스레 '사회 탓'은 공부 못 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핑계가 됐다.
이 공기를 마시고 성장한 이십 대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이 책 제목이 됐다. 분명한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라고 하니 결론적으론 차별에 찬성하는 꼴 아니냐는 뜻이었다. 지금은? 더 심하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라는 고전적인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아예, 차별이 뭐가 문제냐는 투로 윽박지른다. 사십 대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때의 이십 대나 지금의 이십 대나 비슷하다. 그래서 책을 지금 접하는 이들 중에는, 이건 특정 세대가 아닌 한국사람 모두의 이야기이기에 별 감흥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짜증의 가시화, 조롱의 과시화
차별에 찬성하는 걸 넘어 좋아하는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눈에 차별과 혐오의 피해자가 꿈틀거리는 게 어떻게 보이겠는가. 당할 만한 사람의 한심한 궤변으로 들릴 거다. 그런데 이 꿈틀거림은 격렬한 항의의 형태만 있는 게 아니다. 조용한 죽음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장기판의 말이 되어 시키는 대로 일하다가 죽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떨어져서 죽고, 끼어서 죽는다. 물건을 분류하다 죽고 배송하다 죽는다.
꿈틀거려 달라는 고인의 마지막 울부짖음일 거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목소리를 낸다. 하청업체도 단체교섭하게 해 달라, 배달노동자도 노동조합 만들 수 있게 해 달라, 비정규직을 철폐해 달라, 그리고 새벽배송을 금지하자는 등등. 이때, 시대의 민낯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게 왜 차별이냐"면서 짜증이 표출되고 "저런 인간들의 특징을 내가 잘 안다"라는 조롱이 온갖 모욕적인 표현과 함께 나열된다. 짜증을 가시화하고 조롱을 과시하는 건, 간절히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만병통치약처럼 처방되는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노력하지 않는 이들이나 사회 탓을 한다는 말이 인생 조언이랍시고 부유하니, 누가 사회를 바꾸자고 하면 일단 빈정거려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많다.
한국인들에게 공부란, 목표를 달성해야지만 증명되는 것이기에 어떻게 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목표와 무관한 것들을 철저히 차단해 성과를 얻어내야만 한다. 바디프로필을 찍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체중, 체지방 심지어 수분량까지 목표에 맞추기 위해 음식을 선과 악으로 분류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독서를 편식하고 자본주의의 이면을 살펴보는 사색을 금지한다. 그 강도가 세질수록 세상 보는 눈이 좁아질 건데, 역설적이게도 그래야만 삶이 잘 풀린다.
대학부터 앞장섰다. 선택과 집중이라면서 지난 20년간 특정 학문을 몰살했다. 취업이 중요하다는 이유였는데, 인정한다. 대학의 기업화가 대학생들의 삶을 보장한다면 사회비판 학문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래서 좋아졌는가? 돈 안 되는 학문을 찬밥 취급했으니, 이제는 모두가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 사회비판의 총량이 확 줄어들었는데, 어찌 사회가 나쁘게 변하지 않겠는가.
바늘구멍이 더 좁아졌으니 생애 전체를 경쟁해야 한다. 열 살이 되기 전부터 대학 입시를 계산한다. 열 살부터 해야만 하는 게 많다는 건, 굳이 안 해도 되는 공부도 많아진다는 뜻이다. 지금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게 뚜렷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나중은 오지 않는다. 그럴 여유는 평생 없다. 대학을 가자마자 취업 준비를 시작해야 하고, 취업해도 보장되는 건 없다. 죽을 때까지 목표를 촘촘하게 세우고, 목표와 무관한 것을 차단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를테면 밤에 주문한 물품이 새벽에 현관 앞에 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따져 묻는 건 살아가는 데 쓸데없는 질문이다. 내가 편리하니 노동자가 위험하다는 추론도 무용하다. 내 알 바 아니라고 여기고, 자신의 경쟁에만 몰두해야 한다.
쿠팡은 악랄했고 우리는 순응했다
그래서 쿠팡이 성공했다. 논란이 생긴들, 논란을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한국이었다. 쿠팡이 정보유출을 뒤늦게 인지한 걸 제대로 밝히지도 않고 있을 때, 이 사회에서는 새백배송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다는 간증이 넘쳐났다. 길들여진다는 건 이토록 무서운 건데, 그게 편리함일 땐 더 그렇다. 그 편리함 덕택에 자신의 속도가 빨라진다면 더 그렇다. 그 관성이 뒤틀리면 짜증과 분노가 여지없이 분출된다. 아이 준비물 어떻게 챙기느냐고 화를 내더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 한 번 제대로 해본적도 없는 얼치기 좌파들이라는 식의 표현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그 틈을 타고 쿠팡은 대단히 좋은 기업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모두가 로켓의 연료를 가득 채워주는데 어찌 쿠팡이 악랄한 춤을 자유롭게 추면서 성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좋은 기업의 민낯은 이제야 드러난다. 고객 돈으로 이자 장사까지 하고 있었다. 정산 시기를 늦춰, 현금 순환이 절박한 업체에 최고 18.9%라는 고금리의 대출을 받도록 했으니 이 무슨 봉이 김선달 같은 짓이란 말인가. 이런 머리를 굴리는 기업에서 산업재해를 은폐하기 위한 매뉴얼을 촘촘하게 만드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노동자가 사망할 때마다 회의실 풍경은 어떠했을까? 사람이 죽어서 귀찮아 죽겠다는 짜증과, 유족들은 산재 신청한다고 분수도 모르고 날뛸 거라는 조롱이 넘쳐났을 거다.
쿠팡만의 모습은 아닐 거다. 하청업체 노동자가 죽었을 때 본청 회의실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할 때 취업생의 커뮤니티에서, 그리고 대중교통 파업 관련 기사의 댓글에서도 짜증과 조롱은 넘쳐난다. 왜 장기판의 말이 사람 행세를 하느냐면서 화를 낸다. 사람 되려면 시험 합격하라고 빈정거린다. 이 연장선에 쿠팡이라는 기업이 있었을 뿐이다. 책임지고 말을 말답게 부려주겠다는 기업 덕택에 많은 이들이 편리함을 느꼈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우리가 쿠팡을 탈퇴하는 것 이상의 가치관을 원해야 하는 이유다. 쿠팡 없어도 살겠더라 수준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로켓배송의 연료였음을 인정하고, 이 사회가 무엇을 불태워 이토록 빨라졌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또 다른 기업이 혁신 어쩌고란 이름을 앞세워 우리에게 편리한 삶을 선사할 거다. 거기에 다시 중독되었을 땐, 사회는 결코 회복되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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