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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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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할아버지

[세상을 바꾸는 힘, 나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일본인

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 2015년 제1회 아시아필란트로피 어워드(APA)를 수상한 노무라 모토유키 씨와 부인 요리코 씨 모습. ⓒ푸르메재단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긴 폭염으로 한반도가 설설 끓고 있던 지난해 여름 이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일본에 계신 노무라 모토유키(野村 基之) 할아버지의 아들 마코토(眞理) 씨의 편지였다.

"오늘 새벽 2시 40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한국분들의 도움으로 기쁘게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지금쯤 북한 어린이들을 만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유해는 내일 화장합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셨던 노무라 할아버지의 부고였다. 할아버지가 악성 림프종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찾아뵈어야지 마음먹었는데 기다려 주시지 않았다. 마코토 씨는 다시 보낸 이메일에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을 갖지 않고 유해를 화장했다며 언젠가 유해의 일부를 아버지가 사랑하셨던 한국 청계천에 뿌릴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살아생전 노무라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과거 일본이 저지른 범죄를 한국민이 용서해 줄 것과 당신의 뼈가 한국에 묻히길 기도했다고 한다.

오래전 노무라 할아버지의 댁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났다. "아! 드디어 왔어요." 며느리 미나(美奈) 씨가 속삭였다. 큰 여우 한 마리가 흰 눈을 밟고 조심스럽게 마당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탐스러운 황금색 털을 가진 여우였다. 여우는 주위를 살피며 한 발 한 발 다가가 바위 위에 놓인 고기를 덥석 물고 숲으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여우는 남은 고기를 먹어 치운 뒤 '할아버지! 오늘도 잘 먹고 갑니다'라고 인사하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라졌다.

▲ 먹이를 찾아 노무라 모토유키 씨 집에 온 여우. ⓒ푸르메재단

노무라 할아버지와 요리코(順子) 할머니의 집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집은 도쿄에서 서남쪽 200킬로미터 고랭지 채소로 유명한 야마나시현(山梨懸) 호쿠토시(北杜市)의 산속에 있다. 일 년 중 절반 이상이 눈으로 덮여있다. 집 뒤로는 2500미터가 넘는 고봉(高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정면에는 후지산(富士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할아버지는 큰맘 먹고 사륜구동 중고차를 샀다. 집에 찾아오는 야생 동물들의 먹이를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 매주 금요일이 되면 노무라 할아버지는 20리가 넘는 눈길을 달려 읍내 정육점에서 여우와 너구리, 노루를 위해 닭고기와 돼지비계, 옥수수를 샀다.

내가 할아버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마코토와 미나 씨 부부는 3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달려왔다.

노무라 할아버지께 시골 생활을 물었다. "불편한 것이 많지만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젊은 시절 수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더 애정이 갑니다. 지금도 큰 개 두 마리를 키우는데 한 마리가 폴리입니다. 캐논 카메라의 광고모델이었지요. 한 마리는 은퇴한 시각장애인 안내견 몰리입니다." 반갑게 달려 나와 꼬리치던 흰색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이 폴리였다. "어느 날 개 보관소 직원이 전화했어요. '좋은 개가 있는데 키워달라'고요. 나도 너무 늙어서 어렵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 직원이 그 개도 너무 늙었고, 늙었다는 이유로 주인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처럼 착하다고요. 그 말을 듣고 키우게 됐습니다. 제가 버려진 개를 돌본다는 소문이 나면서 도쿄에서 유기견 7마리를 트럭에 실어 보낸 적도 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버려진 개 200여 마리가 편안히 살다가 이 집 마당에 묻혔습니다."

▲ 노무라 모토유키 씨 가족. 오른쪽부터 아들 마코토 씨와 며느리 미나 씨, 부인 요리코 씨. ⓒ푸르메재단

내가 갑자기 노무라 할아버지를 방문하기로 결심한 것은 일본 극우세력의 위협 때문이었다. 2012년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자, 할아버지는 일제 만행을 공식적으로 사과할 기회라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소녀상 앞에서 할아버지는 "청춘을 짓밟힌 할머니께 용서를 구한다"고 눈물을 흘린 뒤 플루트를 꺼내 들고 가곡 '봉선화'를 연주했다. 애잔한 선율이 울려 퍼졌고 한국의 언론은 앞다퉈 이 소식을 전했다. 할아버지의 참배 소식은 외신을 통해 전해졌고 이때부터 일본 극우파의 위협이 시작됐다. "이메일을 열면 나쁜 말이 가득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최근에는 한 사람이 집에 찾아와 위협하기도 해서 외출을 삼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왜 이토록 한국을 사랑하시느냐고 물었다. "제가 5살쯤 됐을 때예요. 동네 꼬마들이 우물물을 길으러 온 한국 여성에게 '한국에서는 돼지가 꿀~꿀~꿀거리네…' 하는 노래를 부르며 놀리는 것을 목격했어요. 교토에는 가난한 한국인이 많았고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일했습니다. 두 명이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하루는 일본 아이들이 이들을 에워싸고 '한국인은 돼지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한 기념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고무공을 하나씩 나눠줬지만 한국 아이들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한국 순천에서 도쿄 수의대(현 일본대학 농수의학부)에 유학 온 김오남(金五南) 씨를 만나면서 일제가 한국에서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듣게 됐습니다. 그때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고 한국인을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한 배경에는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던 부모님이 계셨다. "저의 어머니는 여성운동을 하셨던 노무라 가스코(野村 かつ子) 여사입니다. 도시샤(同志社)대학 행정학 교수였던 아버지 노무라 지이치(野村 治一)는 도시빈민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사회복음 운동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일본여성운동과 소비자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가스코 여사는 1993년 김용기 선생을 기념한 일가상을 수상했고 일본 여성 최초로 2005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눈물 흘린 노무라 모토유키 씨 가족. ⓒ푸르메재단

1931년 교토에서 태어난 노무라 할아버지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후두결핵으로 돌아가시자 삶이 요동치게 된다. 어머니가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면서 노무라와 여동생을 도쿄의 외갓집과 외삼촌 집에 각각 맡긴 것. 외갓집에 맡겨진 노무라는 소풍 때 도시락을 싸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어렵게 대학에 입학했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마취제도 없이 동물을 해부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수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해 자퇴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학을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생활비와 장학금이 끊기면서 굶는 날이 많아졌다. 청년 노무라는 주일이 돼야 겨우 교회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덩치 큰 미국인이 "이곳은 '잽스(Japs, 쪽발이)'를 수용하는 곳이 아니야, 어서 꺼져" 하고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문밖으로 내던졌다. 청년 노무라는 인종차별을 경험하면서 일제와 한국전쟁으로 고통당한 한국인을 더 이해하게 됐다.

미국 신학대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된 그는 귀국하면서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가정교회를 열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예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청년 노무라는 1968년 한국 선교단체의 초청으로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1973년에는 한국도시산업선교회의 초청으로 부인 요리코 씨와 초등학생이던 아들 마코토, 딸 메구미(恩惠)를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노무라 가족은 청계천 철거민들이 보금자리를 만들던 남양만을 찾아가 이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어린 시절 한국을 두 번 방문했던 마코토 씨는 "한국을 방문한 기억 때문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현재 정신장애인시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의 현장 탑골공원을 방문한 날 한국 노인이 '일본인이 이곳에서 얼마나 나쁜 일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라고 말했다.

▲ 노무라 모토유키 씨가 촬영한 1970년대 청계천. ⓒ푸르메재단

▲ 노무라 모토유키 씨가 촬영한 197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 모습. ⓒ푸르메재단

다시 한국을 방문한 청년 노무라가 찾아간 청계천 빈민가는 생지옥이었다. "창문도 없는 조그만 방에 10살 정도의 소녀가 누워있었습니다. 옷을 들춰보니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뼈가 드러난 허벅지에는 구더기가 넘쳐나는데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노무라는 동네 청년들과 소녀를 둘러업고 병원을 찾았지만, 소녀는 끝내 숨졌다. 청계천의 참상을 목격한 청년 노무라는 이곳을 돕기로 결심했다.

"마을 앞 공중변소에는 매일 아침 길게 줄을 섰습니다.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청계천이 범람해 화장실 오물이 길가로 넘쳐흘렀습니다. 장마철 판잣집들에는 어김없이 전염병이 나돌았습니다. 사람들이 악취와 오물, 소음 속에서 살아갔지만,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인근의 대형 교회들도 거들떠보지 않는 데 분노했습니다. 인분과 쓰레기가 흘러가는 청계천 옆에서는 날마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청계천에서 빈민운동을 하는 제정구를 만났다. 그는 낮에는 자신도 뚝방촌 넝마주이가 되어 청년들과 폐품을 주우러 다녔고, 밤이 되면 야학을 열어 더 나은 사회를 고민했다. "제정구는 한 번도 금전적으로 도와달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제정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청년 제정구는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자였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서재에 있던 수백 권의 앨범 중 제정구의 사진을 찾아내 "지금도 존경하고 그리운 친구"라고 말했다. 사진 속에서는 서른 살의 제정구가 딸 '아름이'를 무릎에 안고 활짝 웃고 있었다.

▲ 고(故) 제정구 의원과 딸 아름이. ⓒ푸르메재단

청년 노무라는 청계천뿐 아니라 동대문 평화시장 안 봉제공장을 찾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생활비를 아낀 돈으로 사진을 찍었다. 청계천과 동대문 시장뿐 아니라 전국을 돌며 찍은 사진 중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2만 점을 2005년 서울시에 기증했다.

당시 청계천에는 선교활동을 하던 K목사도 있었다. "교회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낮은 곳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50여 차례 일본과 미국, 서독, 호주를 오가며 사진 전시회와 교회 간증을 통해 모은 기금을 전달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저를 독재정권이 고용한 외국 스파이라고 의심했고, 중앙정보부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외국인이라고 감시했지만 옳은 일을 하기에 상관없었습니다. 하지만 K목사는 국제전화로 중앙정보부에서 협박하고 있으니 돈을 부치라고 강요했습니다. 때로는 카메라나 전기면도기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청계천에 탁아소를 짓겠다고 해서 서독에서 모금한 기금을 보냈지만, 그는 탁아소 대신 교회를 지었어요. 뉴질랜드 소가 필요하다고 해 소 살 돈을 보냈지만, 그는 부동산에 투자해 돈을 날렸다고 들었습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노무라 할아버지의 손이 떨렸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했던 K목사가 왜 갑자기 변한 것일까. "아마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활동이 알려지고 주목받으면서 변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칭찬과 박수는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할아버지가 추운 산골에 사는 이유도 젊은 시절 도쿄 집까지 팔아 K목사를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K목사로 인해 끊어졌던 한국과의 인연은 동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쓴 임정진 작가에 의해 30년 만에 이어졌다. 임정진 작가는 노무라 할아버지가 찍은 70년대 사진을 보고 동화책을 쓰고 싶다고 연락했다. 할아버지는 임정진 작가로부터 작은 단체가 장애어린이치료센터와 장애인치과를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꼭 가보고 싶다"고 청했다. 그렇게 2009년 푸르메재단 첫 방문이 이루어졌다. 푸르메재단을 찾은 할아버지는 "이곳에 오니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실감한다"며 장애어린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한국에서 쓰려던 여비를 탈탈 털어주고 떠났다.

푸르메재단이 중증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치과 봉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아들 마코토 씨 부부가 한국을 찾아왔다. 전날 밤 서울에 도착한 부부는 쉬지 않고 환자의 입안에 손전등을 비추고 치과 도구를 소독했다. 하루만 묵어가라는 간곡한 만류에도 그날 밤 한국을 떠났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기부벽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은 노무라 모토유키 씨 부부. ⓒ푸르메재단

박애 정신을 실천한 노무라 할아버지는 2015년 처음 제정된 '제1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APA)'의 주인공이 되었다. APA는 한국의 비영리활동가 100명이 사명감과 열정으로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아시아의 숨은 영웅들을 발굴해 그 활동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상이었다.

2022년 11월 노무라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국 방문 때였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경기도 여주에 있는 <푸르메소셜팜>에 갔다. 발달장애 청년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동한 할아버지는 "바람이 하나 있다면 어릴 때 한국을 방문해 가난한 사람들을 목격한 아들이 앞으로 한국의 장애어린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며느리 미나도 때마침 장애인치과에 다니고 있어 마침 너무 잘된 일입니다".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1968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청년 노무라가 겹쳐졌다.

* 2024년 7월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을 시작으로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 정호승 시인, 고 김정주 넥슨 창업주, 이지선 교수, 가수 션 등 나눔을 실천한 분들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글이 모아져 문학동네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20년 동안 푸르메재단 일을 하면서 문을 열어주시고 푸르메재단과 함께 꿈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준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뜻과 정성을 모아주신 기부자와 시민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내 것을 나누고 시간과 열정을 바친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자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확산해 온 시민들에게 보내는 찬사입니다.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 <세상을 바꾸는 힘>(백경학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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