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월 3일 치러질 지방선거를 전망하기 위해, 지난해 11월과 12월 미국에서 열린 지방선거(off-year election) 결과는 참고할 만 하다. 한국처럼 양극화된 미국 정치 지형에 질린 유권자들의 심경 변화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反트럼프 좌파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이라는 '스타 탄생'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함께 치러졌던 뉴저지,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를 살펴보자. 특히 12월 있었던 마이애미 시장 선거에서 당선된 아일린 히긴스의 사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한국에도 몇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도널드 트럼프의 정치적 안마당인 플로리다의 주도, 특히 트럼프의 별장 마러리고 리조트를 코앞에 둔 마이애미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마이애미 최초 여성 시장이자, 1997년 이후 28년만의 민주당 시장, 그리고 1996년 이후 최초 비히스패닉계 시장인 아일린 히긴스가 당선된 것이다. 61세의 히긴스는 뉴멕시코 기계공학과를 나온 공학도 백인 여성으로 한국으로 치면 마이애미의 '시의원' 출신이다.
우리로 치면 미국의 '경북 구미'와 같은 도시에서 리버럴리스트 백인 여성이 시장에 당선된 이유는 뭘까. 미국의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히긴스의 캠페인은 플로리다의 다른 민주당 도전자들에게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히긴스는 사회 정의나 문화 전쟁 문제를 내세우지 않고, 주거비 부담 완화와 정부 효율화에 주력했다. 또한, 시 재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공화당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분석했다.
히긴스 시장 공식 홈페이지에서 그가 가장 먼저 내세우고 있는 업적은 저렴한 노동자 주택 7000채 공급, 역내 중소기업 300만 달러 지원금 지급 등이다. 그는 캠페인 내내 양극화 문제 해소를 주장했고, 관광지인 마이애미의 환경 보호 문제 등에 관심을 보였다. 히스패닉계 이민자의 도시인 마이애미의 정체성으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을 역공했다. 경찰에 대한 재정 지원 등 전통적인 공화당 이슈도 흡수했다. 모두 지역 밀착형 생활 이슈다. 히긴스 선거 캠프 고문은 "이번 승리가 유권자들이 공동체 통합과 생활고 해결에 다시 집중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은 극단적 '정치 놀음'에 질려 있었다. 특히 지방선거에 개입한 '마가'와 '정치적 올바름'에 모두 거부감을 보였다.(마이애미 시장 선거는 당적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교육감 선거처럼 무당파 선거다.)
마이애미 시장 뿐 아니라 지난해 11월 지방선거에서도 유권자들의 성향 변화가 감지된다. 버지니아주에서는 1979년생(46세)의 백인 여성 애비게일 스팬버거가 공화당으로부터 주지사직을 탈환, 여성 최초의 버지니아 주지사에 당선됐다. 그는 12년간 CIA에 몸담아 마약, 테러 정보 등을 담당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민주당 내에서는 오른쪽에 있는 인물로 분류된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한 적도 있고, 진보적 법안들이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불리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도'에 가까운 성향인 셈이다.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의 마이키 셰릴은 여성으로 해군사관학교.미해군 헬리콥터 조종사(중위) 출신에, 지방검사보를 지낸 법률가다. 전통적인 민주당 정치인의 이력에 비하면 '리버럴'의 향취가 적다. 하원의원 시절엔 민주당 온건파 그룹인 신민주연합 (New Democrat Coalition)과 보수파 민주당 의원단인 블루독연합(Blue Dog Coalition)에서 활동했다. 뉴저지 유권자 입장에선 민주당 색깔보다 '중도'의 색깔이 더 강하게 어필되는 이력이다. 버지니아와 뉴저지, 두 지역 모두 '스윙보터' 지역이다.
조란 맘다니라는 스타 때문에 가려졌지만,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트럼프와 공화당이 패배한 요인들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지방선거에서조차 '마가' 이념을 밀어붙였던 이들은 '극단적 정치색'을 뺀 민주당 당원들에게 처참하게 밟혔다. 이들은 이민 이슈를 '정치 문제'가 아닌 '민생 문제'로 이해했고, 지역 경제, 특히 '생활 밀착형 이슈'에 집중했다. 폴리티코는 마이애미에서 공화당이 패배한 것을 두고 "마이애미 시장 선거의 핵심 쟁점이 히긴스 후보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민주당 후보를 매번 '사회주의자'로 낙인찍는 전략이 앞으로도 효과적일지 여부"라고 지적했다. 결국 이 지방선거 패배로 공화당은 올해 11월에 있을 중간선거 패배의 공포가 싹트게 됐다. '과잉 정치'를 지방선거에 투영하려는 양당, 특히 공화당에겐 고민이 깊어지는 지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앞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서 온건 노선과 극단 노선 사이에서의 대결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극우주의의 발호'를 예견한 셈이다. 나아가 '극우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온건+좌파'의 연합이 합리적이라고 봤다. 노무현의 '대연정' 시도는 지지층의 반발을 불러 실패로 결론났지만, 극단적 보수 세력까지 껴안으려는 '전략 미스'에 원인이 있을 뿐, 노무현이 추구하려는 게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실제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이나 남미에서 극우주의에 대항해 승리한 자유주의 진영은 대부분 '중도+좌파' 연합이었다. '보수를 대체하겠다'는 의지마저 보이는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실용주의'도 이런 전략적 사고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선거에서 중요한 건 '중도'다.
윤석열의 미치광이 계엄 정국을 통과하면서 한국도 미국처럼 극단적 정치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지금 유권자들은 1년 이상 진행되고 있는 내란 정국에서 정치적 피로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물론 이 피로감의 가장 큰 지분은 '윤어게인'으로 표출된 극우세력의 '정치 난장'에게 있다. 판판히 선거에 깨지면서도 '이념적 극단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국민의힘의 책임이 크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적대적 내란 청산'이 큰 호응을 받는 것도 아니다. 차기 서울시장으로 계엄 정국에서 활약한 박주민 의원 같은 인물이 아니라,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엔) 무색무취에 가까운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에서 역시 현역인 중도 성향 김동연 지사에 비해 강성 민주당 지지자들에 어필하는 추미애 의원 같은 이가 좀처럼 힘을 못 쓰고 있다는 사실을 보자. 지방선거는 총선과 다르다. '정치 피로감'은 이번 6월 선거에서 중요한 전략적 고려 사항이 될 것이다.
미국 지방선거에서 '마가 세력'이 깨져 나가고, 민주당스럽지 않은 '보수 리버럴리스트'들이 당선되고 있는 현상이 심상찮아 보이는 이유다.
물론 내란 청산 작업은 진행중이고, 매우 중요한 것이며, 끝까지 진행돼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피로감이 높아진 유권자들은 '내란 청산'이 중앙정치를 떠나 지방정치에까지 침투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주목해야 한다. '내란 프레임'을 가장 먼저 버린 정당이 올해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이건 '정의'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선거 전략'의 문제다. 지방선거에서 실패하면 내란 청산은 없다. 여도 야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지방선거에까지 '내란 청산'을 끌고 들어올 이유가 없고, 국민의힘이 지방선거에서 '윤어게인'을 주장하면 필패할 것이다. 이 점을 누가 먼저 깨닫느냐가 선거 승패를 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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