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현지시간) 베트남 출장 중 건강이 악화해 현지에서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25일 민주평통은 "고인은 심근경색 진단을 받고 스텐트 시술 등 현지 의료진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현지시간 1월 25일 14시 48분 운명하셨다"고 밝혔다.
이 수석부의장은 민주평통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 참석차 지난 22일 베트남 호치민에 도착했다. 이후 다음날인 23일 아침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기고 긴급 귀국절차를 밟았으나, 베트남 공항 도착 후 호흡 곤란으로 호치민 탐안(Tam Ahn)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
현지 병원에서 치료 중에도 위중한 상황이 이어지자 이재명 대통령은 정무특별보좌관인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현지로 급파했다. 이곳에서 조 특보는 이 수석부의장을 한국으로 이송하는 방안 등을 찾아보았으나 이 수석부의장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제36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 수석부의장은 장기간 민주당계의 중추를 맡은 정치 거물이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한 이 전 총리는 서울용산고를 졸업한 후 1971년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자퇴했고,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이후 곧바로 이 전 총리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핵심 계기는 1972년 10월 유신이었다. 이 전 총리는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복역한 후 졸업하지 않고 한동안 직장인 생활을 살았다. 무역회사를 다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민주화계 재야 인사로 지내던 그는 지금도 한국의 중요 출판사인 돌베개 출판사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 전 총리는 1980년 서울의봄이 되어서야 복학해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민주계 정치권에 투신한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아래의 동교동계 인물로 분류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다시금 옥고를 치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전 총리는 1985년이 되어서야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이 전 총리는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88년 재야인사들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에 입당했고, 13대 총선에서는 서울 관악구을에서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내리 5선을 지낸 후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겨 20대까지 7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장기간 행정 업무 역시 맡아 왔다.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아래에서 1996년까지 초대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고 1998년에는 제38대 교육부장관을 지냈다. 아울러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4년에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특히 이 때 노 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국정 역할을 이 전 총리와 나누면서 그는 이른바 '책임총리'로 불리며 강력한 국정 역할을 맡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실세총리'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이 전 총리가 되기도 했다.
이런 경력을 통해 이 전 총리는 자연스럽게 동교동계로 대표되는 구 민주당 계열과 열린우리당 이후로 대표되는 386계 민주당 의원의 고리를 잇는, 민주당계 역사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하게 됐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2007년 정권교체 후 유시민 전 장관 등 친노 세력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한 모습이다.
이 전 총리는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한동안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으나, 개성공단이 폐쇄되자 정치 무대로 복귀했고 2016년 무소속으로 세종시에 출마해 새누리당 박종준 후보, 더불어민주당 문흥수 후보를 꺾고 다시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때 이 전 총리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도부가 그를 쫓아내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 복당했다.
이로써 그는 7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번도 지지않고 전승한 기록을 세웠다. 이 전 총리를 앞서는 당선 기록은 9선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유일하다. 다만 김 전 총재는 비례대표로 떨어진 사례가 있다.
이후 민주당 당대표를 지낸 이 전 총리는 2020년 당대표 임기를 마친 후 32년의 정치인 생활을 마무리하고 비정부기구인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2025년에는 이재명 정부의 첫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임명되는 등 남북 평화를 위한 일에 여생을 바쳤다.
이 전 총리는 생전 민주당계의 대표적 선거 전략가로 통했다. 그가 대선 후보 캠프에 있는 동안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라는 민주당계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해, 이 전 총리는 민주당계의 킹 메이커로 군림했다. 여론조사 자료를 잘 활용했고, 소셜미디어 시대에 들어서는 유튜브 등을 통해 바닥 민심을 훑는 등 데이터와 정치권 흐름에 모두 통달한 정치인으로 통했다. 이런 이력으로 인해 보수정당에서 '선거의 제왕'이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통했던 것처럼, 민주당계에서는 이 전 총리가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로 꼽혔다.
민주화 운동 시절 지독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별세한 김근태 전 의원과 마찬가지로 이 전 총리도 민주화 운동 당시 고문 후유증을 앓았다. 이는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별세한 그의 생애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굵직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강성 발언은 비판도 많이 받았다. 특히 장애인 비하 발언,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장례식 당시 기자를 향한 면박 등은 이후로도 장기간 비판의 대상이 됐다.
특히 교육부장관 시절 그의 정책도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 전 총리는 1998년부터 1999년 교육부 장관 재직 시절 대입 제도를 바꾸고자 체벌제한조치, 무시험 대학 전형 등의 개혁을 단행했고 당시만 해도 강제로 진행되던 야간자율학습과 모의고사 등을 폐지했다. 이 때문에 이후 세대의 학력이 떨어진다고 해 일각에서는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으나, 장기적으로 이는 학교 민주화 등을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반론이 더 강하다.
민주평통은 25일 "유가족 및 관계기관과 함께 국내 운구 및 장례 절차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유가족으로 배우자 김정옥 씨, 딸 이현주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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