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김해 가야사 조명을 위해서라도 '임나일본부'란 걸림돌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영식 김해 인제대 명예교수가 최근 이같이 피력했다.
이 교수는 "서기 732년 고대일본에서 편찬된 <일본서기>는 6세기 전반에 아라국왕이 함안에 고당(高堂)이란 국제회의장을 세우고, 가야 여러 나라의 왕과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을 불러들여 외교적 현안을 논의하는 데 함께 참가했던 왜인(倭人)들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또는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로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과거의 일본학계는 행정관청을 뜻하는 부(府)의 한자표기에 집착해 고대의 일본이 4~6세기의 2백년 동안 한강 이남의 백제·신라·가야를 근대의 식민지처럼 지배했다"며 "그 통치기관으로 가야에 설치되었던 것이 '임나일본부'였다고 강변해 왔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1960년대 말~970년대 초의 대대적인 논쟁과 재검토를 거친 지금 일본에서 역사학자로서 이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은 거의 없다"면서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외교사절로 보는 것에 한-일양국의 학계가 어느 정도의 접근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고 말했다.
즉 지금 와서 일본의 주장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
그러면서 "이러한 표현과 내용이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에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창작이나 거짓으로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교수는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는 고대의 총독부와 같이 본 과거 일본의 주장도 있었다"며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일로 지금의 오카야마~히로시마에 세워졌던 가야계통의 분국(分國)인 임나(任那)를 둘러싸고 큐슈북부의 백제계 분국, 큐슈동부의 신라계 분국, 나라, 오사카의 왜국(倭國)이 쟁탈전을 벌인 결과 승리한 왜국이 일본열도에 세웠던 통치기관으로 보는 북한학계의 해석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일본서기>에는 모두 23번의 일본부라는 표기가 등장한다"면서 "왜 이런 해석들이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주장대로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정기관이었다면, 왜나 백제가 가야에서 세금을 거두거나 군사를 동원하고 소와 말을 징발하거나 가야의 왕과 인민을 강제하는 것 같은 기술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단 한 자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외교활동에 관한 기술들 뿐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광개토왕의 대군을 맞아 싸운 임나도 가야였고, 신라의 외교문장가로 유명한 강수(强首)의 출신지 임나도 가야였으며, 속세의 성이 김해 김씨였던 신라의 진경대사는 임나왕족의 후예로 기록되었다"며 "임나 모두를 가야로 보는 데에는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임나일본부는 562년까지 보였다"면서 "원래는 왜(倭)였던 것을 732년에 편찬되는 <일본서기>가 일본으로 바꿔 쓴 것이다. 결국 문제는 관청을 뜻하는 것 같은 부(府)이다"고 말했다.
이영식 교수는 "562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임나일본부'는 '임나'였다"고 하면서 "가야에 파견된 일본 또한 왜의 사신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점차 한-일 양국의 공통된 해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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