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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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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사회

[오찬호의 틈새] 나는 비겁하다

아이가 묻는다. 왜 전쟁을 하는지를. 답을 못하겠다. 역사 속 사례를 언급하며 이런저런 배경에서 전쟁이 발발했고, 전개됐고, 마무리됐음을 교과서대로 설명할 수준의 전쟁이 아니다. "내가 아는데"라는 말이 이유의 전부인 트럼프의 모습을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한 나라를 석기시대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한 명의 광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욕만 한다. 뉴스에 등장한 전문가가 대놓고 미국을 편든다고 욕한다. 이란을 적대적으로 묘사하는 신문의 사설을 찾아서 욕한다. 그런데, 이게 다다.

이 와중에도 글쟁이 티는 또 낸다. 수양대군이 사람 죽여놓고 계유년(1453년)에 일어난 난을 평정했다며 자화자찬했듯이, 트럼프는 자신의 행동이 병오정난으로 기억되길 바라기에 저 모양 저 꼴이라는 문장을 쓰면서는 킥킥 웃었다. 아, 한명회를 네타냐후에 대입하면서는 탁월한 비유라며 무릎을 쳤다. 그런데, 이런 거 말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내가 초라하다. 더 짜증 나는 건, 내 비겁함을 들키지 않아야 하는 거다. 아이가 쓰레기봉투 사재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어제 어렵게 산 봉투 두 뭉치를 안 보이는 곳에 숨겨둔다.

나의 냉소가 들키지 않았으면

아이가 묻는다. 정치가 무엇인지를. 답을 못하겠다. 개인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공동체의 기초라고 모범적으로 답을 하기에 정치인들의 모습은 너무 괴이하다. 어느 정도면, 저들의 싸움을 우호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재, 협상, 타협이 없다면 사회가 엉망이 되니 때론 일보 후퇴하는 결심이 필요하고 가끔은 이보 전진하겠다는 강단이 필요한 거라고 말이다. 혼란스러움도 정치의 한 조각이니 결코 정치를 외면 말라는 신신당부까지 곁들이면서. 그럴 수 있는가? 이전투구.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비열하게 다투는 지금의 정치판을 이 사자성어 말고 다르게 표현할 길이 없다.

언론은 중계한다. “내가 아는데”라는 말이 근거의 전부인 자칭 정치공학 해설자들은 정치 진영의 권력 다툼을 관람하며 장기판에서 훈수를 두듯이 중얼거린다. 맞으면 "내가 그랬지?"라면서 으쓱거리고, 틀리면 "정치는 생물"이라는 얄팍한 말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이런 룰렛 게임 수준의 해석들이 아군이냐 적군이냐로 나눠지니 팬클럽이 형성되고 인기를 얻는다. 상대 진영이라고 규정된 이의 발언 하나를 갈기갈기 찢은 후 본인 입맛에 맞춰 귀에 걸고 코에 건다.

솔직히, 아이가 뉴스를 볼까 봐 겁난다. 신문을 읽을까 봐 두렵다. 결정적으로 유튜브 검색창에 정치라는 단어를 검색할까 무섭다. 음모론자 양성 과정에 빠져들까 봐 오싹하다. 그래서 뉴스를 끈다. 신문을 덮는다. 인터넷을 멀리하라고 채근한다. 이런 데 관심 가져봤자 네 인생에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다는 말도 은근슬쩍 뱉는다. 마치 "책 그만 읽고 공부나 해"라는 초월적 표현을 당당히 하는 한국인처럼 말이다.

부끄럽다. 평소 내 생각이 아니다. 그래봤자 세상은 그대로라고 말할수록, 사회는 반드시 나쁘게 변한다는 문장은 내 책 곳곳에 있다. 그런데 정치를 외면하라니. 그래놓고, 또 사회가 나빠졌다며 정치인만 욕하겠지. 나의 냉소가 그 원인이었음은 감추고 말이다. 비겁하다.

공동체를 향한 질문이 사라지면

아이가 왜 사람들이 알하다 죽는지를 물으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자동차를 로봇이 만들 정도의 혁신적인 세상이라는데, 그 자동차의 부품을 만드는 곳에서는 화재로 인간이 죽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산업안전보건법, 위험물안전관리법, 게다가 중대재해처벌법까지 있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 처참한 죽음의 반복을 원래 세상은 그러한 것이라면서 말할 수 있는가. 과거보단 환경이 좋아지고 있으니, 나쁘게만 볼 건 아니라고 할 건가.

유치원 교사가 죽을 정도로 열이 나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다가 결국 죽는 걸 어찌 설명할 건가. 억울하면, 더 좋은 직장을 다니면 된다고 할 건가. 하긴,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는 동문서답이 당당한 사회 아니었던가. 위험이 수평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걸 능력주의라는 폭력적인 단어로 태연하게 포장하는 어른들이 정말 많다. 짜증 난다. 그런데, 이 짜증이 반복되니 나도 체념한다. 그 순간, 욕망이 파고든다. 아,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 비겁하다. 너무 비겁하다. 그런데, 정말 잘했으면 좋겠다.

위험의 외주화를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아이에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걱정 말라. 한국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결코 이 현상을 의아하게 이해하지 않는다. 공부를, 위험을 떠맡는 기준선 아래로 가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아래가 이제 이주노동자로 채워져, '위험의 이주화'라는 말까지 나오는 마당이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게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는 한국 사회의 응답 아닌가?

내 모습이 그런 한국사회의 결과 아니겠는가. 전쟁의 연도는 괴상한 방법을 동원해 가며 외우면서, 전쟁은 나와 상관없다며 외면한다. 전쟁을 외면할 만큼 공부의 단기 효능에만 집착하니, 정치 따위는 지금의 나와 무관하다며 무시한다. 이런 대중을 정치가 무서워할 리 없으니, 공공은 푸석해지고 노동자는 일터에서 죽는다. 이걸 보고, 그래서 공부가 중요한 거라고 확신하니 악순환은 선순환한다.

체념과 냉소 그리고 각자도생의 철학으로 무장한 이들이 넘치는 사회에 세상을 좋게 만들려는 의지가 들어갈 틈은 없다. 차별과 혐오의 불씨가 어찌 없겠는가. 왜 이런 끔찍한 사회인지를 아이가 물어도, 내가 공범이기에 대답할 수가 없다. 어? 이때, 기름을 부은 자가 트럼프 아니었던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루스소셜' 계정 갈무리

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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